•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2. 상업·수공업·광업의 변모
  • 3) 공인과 공계
  • (3) 공인의 공물상납

(3) 공인의 공물상납

 대동법이 실시됨에 따라 현물로 징수되던 공물은 대동미·포·전으로 바뀌어져 납부되었다. 공인은 정부로부터 이들 대동미·포·전을 공가로 지급 받아 관부의 수요품을 구입, 상납하였다. 공인의 공물 상납에는 정기적으로 조달하는 元貢과, 원공만으로 부족한 경우 혹은 공안에 들어있지 않은 새로운 물품을 조달하는 別貿의 두 가지 형태의 방법이 있었다.1008)후대에 가면 공가의 지출을 줄이려는 정부의 의도에 따라 공물정책은 원공에서 별무로, 별무에서 私貿의 방향으로 전환되어 갔다. 이에 대해서는 吳美一, 앞의 글(1986), 121∼131쪽 참조. 元貢價는 원칙적으로 선혜청에서, 別貿價는 호조에서 각각 지급하도록 되어 있었다.

 各貢이라 칭해졌던 원공은 선혜청과 지방 6도에 57공이 있었으며, 진휼·상평·균역 3청에 17공이 있었다. 이 가운데 貢契人이 담당하고 있던 공납은 선혜청과 지방 6도의 57공 중 16공, 3청의 17공 중 7공 등 모두 23공이었다.1009)≪萬機要覽≫財用篇 各貢 및 賑恤·常平·均役 3廳. 공계인이 상납하던 총액은 3청 소관의 공인계의 경우 米 2,741石 2斗 6合, 木 14同 32疋, 布 2同 48疋 17尺 5寸, 錢 332兩 2錢으로서, 이는 3청 각공의 총액 가운데 米 85%, 木 100%, 布 2%, 錢 100%에 해당되는 대단한 액수였다.

 별무는 원공에 없는 물품을 조달키 위한 無元貢別貿와 원공만으로 부족할 때에 부족량을 보충하는 有元貢別貿의 두 가지 형태가 있었다. 별무는 본래 관부의 필요에 따라 부정기적으로 공물을 조달하는 것이었으나, 각공계의 별무에 따라 1년에 1회 내지 4회에 걸쳐 납품의 기한과 물품의 종류, 수량 등을 고정하기도 하였다.1010)≪萬機要覽≫財用篇 各廛. 일반적으로는 수시로 貿入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1011)≪萬機要覽≫財用篇 戶曹貢物. 아울러 별무는 ‘遺在’와 ‘加用’에 따라 운영되도록 되어 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상납 물품이 적음에도 불구하고 여유분이 남아 있을 때에는 그 遺在分에 따라 구입량을 감소시키거나, 상납 물품이 많음에도 물품량이 부족할 때에는 加用을 통하여 부족분을 마련하는 방식으로 운영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유재와 가용의 기본 원칙이 실제적인 공물 상납 과정에서 얼마만큼 적용되고 반영되었는지는 의문이다.

 또한 별무는 당해 년도의 사정에 따라 상·중·하의 등급에 의해 조달되었다. 예를 들면 정조 2년(1778)의 경우에는 상등 최다년분의 별무를 조달하였고, 정조 9년에는 중년의 별무를 조달하였으며, 정조 22년에는 하등 최소년의 별무를 조달하였다.1012)위와 같음. 이 가운데 공계인이 납부한 액수는 해당 년도의 各廛 各契의 별무 총액 중 대략 78∼87% 정도를 차지하는 높은 비율을 보이고 있다.1013)劉元東, 앞의 책, 97∼100쪽. 공물 상납에서 공인이 점하고 있던 경제적 비중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잘 말해주는 예가 아닐까 한다. 이외에도 공인들은 중국에 보내는 歲幣와 方物 가운데 지물류와 피물류·白紬·紅紬·綠紬 등 紬布類와 화문석 등의 일부를 조달하기도 하였다.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공인들은 원공과 별무를 중심으로 공물 상납량의 대부분을 차지할 만큼 활발한 공납 청부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이들에게는 상품을 매입·확보하는 과정에서도 특권이 주어지고 있었고, 독점적인 官需品 조달권도 보호받고 있었다.1014)姜萬吉, 앞의 글, 336쪽. 또한 정부가 지급하는 공가도 대동미·포·전이 여유있게 확보되어 있어서 시가보다 후한 가격으로 책정되었다. 따라서 이들은 자본을 축적할 수 있는 유리한 조건들을 갖추고 있는 셈이었다. 실제로 공인들은 특권적인 공물 조달과 독점적 상품 매집을 통하여 상업자본을 축적해 나갔다. 수공업 제품을 조달하는 과정에서 匠人을 고용하여 제조한다거나, 공물의 독점적 조달권을 배경으로 시중의 상품을 매점하는 都賈의 형태로 상업적 이윤을 취해 나갔다.

 그러나 이들이 지속적인 상업적 성장을 이루기에는 장애 요인도 적지 않았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대동법이라는 정부의 공납제 개혁책에 따라 형성된 상인들이었다. 다시 말해 공인은 정부의 공물 정책의 변화에 따라 그들의 경제적 처지와 형편이 좌우될 수 있는 소지를 당초부터 안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그들에게 주어졌던 특권과 정부의 보호·지원이 지속적으로 보장되지 않는다면 공인의 활동은 위축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공인은 초기에는 공인자본을 형성하면서 상인으로서의 경제적 성장을 이루어 나갔다. 하지만 후대로 갈수록 공가는 시가보다 싼 가격으로 책정되게 되었고, 無價上納 등과 같은 각종의 貢弊가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또한 공인은 과거시험의 비용을 충당하는 應辦을 비롯한 국역의 부담도 지고 있었다. 별무공인의 경우에는 ‘先進排 後受價’라 하여 먼저 공물을 납부한 후 공가를 지급받도록 되어 있었다. 원공공인 또한 먼저 공가를 지급받는 것이 상례였으나,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1015)關東蔘契貢人의 예가 그러하였다(≪備邊司謄錄≫권 160, 정조 3년 3월 9일). 이러한 사정 속에서 공인이 형성 초기와 같이 지속적인 이윤을 획득하리라는 것은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었다.1016)韓㳓劤,<李朝後期 貢人의 身分 -大同法 實施以後 貢納請負業者의 基本 性格->(≪學術院論文集≫, 인문사회과학편 5집, 1965).
―――,<李朝後期의 其人 -柴炭貢物主人의 實態->(≪亞細亞學報≫1, 高麗大, 1965) 참조.
결국 공인 가운데에는 공계를 떠나는 사람들이 나타나게 되었고, 심지어는 공계 자체를 해체하는 일까지도 생겨나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다름 아닌 정부의 공물정책의 변화를 극복하기 어려웠던 공인의 태생적 한계에 의한 것이었다.1017)그럼에도 대다수의 공계는 계속해서 존속되었다. 이는 공가에만 의존하던 공인들은 18세기 이후 도태되어 갔으나, 상품 유통 과정에 적극 개입하면서 공가 자체보다 공인권이 보장해주는 특권을 상업 활동에 활용해 보려는 사람들이 등장하게 된 때문이었던 것으로 이해된다(吳美一, 앞의 글(1986·87) 및 鄭亨芝,<朝鮮後期의 貢人權> ,≪梨大史苑≫20, 1983, 참조).

 공인의 경제적 위축과 쇠퇴는 광범하게 성장하고 있던 사상들의 활동에 기인된 바가 컸다. 사상들은 생산지에 나아가 대금을 선불하고 상품을 매점하는 방식 등을 통하여 공인의 공물 청부 활동에 심대한 타격을 주면서 경제적 우위를 점하여 나갔다. 원공→별무→사무의 방향으로 전환된 정부의 공물정책 역시 실질적으로는 사상층에 의해 주도된 상품유통경제의 발달이라는 사회경제적 조건의 변화와 성숙에 뒷받침된 것이었다.1018)姜萬吉,≪朝鮮後期 商業資本의 發達≫(高麗大 出版部, 1973).
吳美一, 앞의 글(1986·87) 및 吳 星, 앞의 책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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