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3. 군수공업의 성장과 군수광업의 발전
  • 2) 군수광업의 발전과 광산의 경영형태
  • (4) 점소의 작업실태

(4) 점소의 작업실태

 17세기 군문·영문의 모든 광산은 군문·영문이 각 점소에 사사로이 파견한 監官들에 의해 운영되었다. 감관들은 점소의 운영비를 관장하고 점역을 감독하며 할당된 생산량을 수납하는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 감관의 업무수행을 보조토록 하기 위하여 각 군문·영문에서는 書吏·使令·庫直 등을 각각 1명씩 배정하였다. 서리는 물품의 출납과 장인·모군 등에 관한 사무를 처리하고 문서화하는 일을, 사령은 감관의 지시 사항이나 문서를 전달하는 일을, 고직은 각종 물품의 보관 업무를 담당케 한 것으로 보인다.1218)柳承宙,<朝鮮後期 軍需鑛工業의 發展>(≪史學志≫ 3, 1969), 21쪽.

 감관의 주관하에 실시된 점역은 대개 채광·제련·埋炭작업 등으로 구분되는데 장인들이 각 부문의 작업 현장에서 모군들을 거느리고 이를 실시하였다. 광석의 굴착·운반 배수작업으로 이루어졌던 채광작업은 광맥을 식별할 수 있는 장인과 갱도를 굴착하는 석공들이 주관하였다.1219)≪端川邑誌≫ 山川.
≪備邊司謄錄≫ 52책, 숙종 28년 6월 26일.
그런데 17세기초에는 이미 석공들에 의하여 폭약을 사용한 암석의 발파 기술이 이용되고 있었다.1220)≪宣祖實錄≫ 권 203, 선조 39년 9월 무자. 이른바 鑛砲라고 불리었던 이 발파 도구가 언제 어느 광산에서 처음으로 이용되었던 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왜란 중 화약무기가 널리 사용되면서 연구되고 당시의 가장 큰 석광이던 端川銀鑛에서 이용된 것으로 여겨진다.1221)李羲準,≪溪西野談≫. 어떻든 광포의 이용은 조선 후기 채광기술상 획기적인 발전을 가져온 것임에 틀림없다.

 광석의 제련작업은 가장 기술을 요하는 부문이었고 흔히 冶匠·黃匠·鉛匠(銀匠)으로 불리던 장인들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광석의 제련기술은 철·은 등의 금속 광물과 유황 등의 비금속 광물이 서로 달랐다. 철·연 등 금속 광물을 처음 제련하는 과정에서는 모두 冶爐와 風箱을 이용하고 있었다. 연은 연광석을 제련함으로써 생산되었지만,1222)≪端川邑誌≫ 山川. 철은 生鐵과 熟鐵의 생산과정에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생철은 水鐵 또는 무쇠라 불리었고, 숙철은 시우쇠 또는 正鐵이라고도 하였다. 생철이나 숙철을 제련하는 도구는 다 같은 야로와 풍상이었지만 야로와 풍상간에 연결된 風穴數에 차이가 있었다. 곧 생철 제련용의 풍혈은 1개인데 비하여 숙철용은 9개였다. 이러한 구조상의 차이는 제조 과정에 있어서도 생철 제련이 숙철 제련보다 수배의 노력을 요하게 하였다. 생철·숙철을 같은 용적의 야로로 제련할 때 생산되는 양을 비교해 보면 “생철이 100근 생산된다면 숙철은 그 보다 다소 적었다”고 하고 “숙철 初出品을 薪鐵로 하여 1근을 打鍊하면 정철의 劣品 4냥이 생산된다”고 하였다.1223)李圭景,≪五洲衍文長箋散稿≫ 권 60, 鉛鐵辨證說. 생철은 주로 釜鼎이나 농기구를 제작하는 데 쓰여졌고 숙철(正鐵)은 槍劍 등 무기나 낫·칼 등을 제조하는 데 이용되었다.

 한편 비금속 광물인 유황은 야로가 아닌 陶器에 넣어 제련하였고, 一周期만에 取出하였다.1224)李圭景,≪五洲衍文長箋散稿≫ 附錄, 五洲書種博物考辨, 石硫黃類. 煮黃法에는 이밖에도 渣滓를 제거하는 去滓法과 악취를 제거하는 無臭法 등 일련의 기술적인 방법이 적용되고 있었다.1225)南九萬,≪藥泉集≫ 권 29, 嶺南雜錄. 埋炭作業은 벌목 운반작업과 더불어 많은 인력을 필요로 하였다. 각 작업장과 막사 등의 건축 공사나 갱내의 동발 설비에도 목재가 필요하였지만 특히 제련시의 연료용의 목탄을 굽는 데는 엄청난 양이 소요되었기 때문에 점소를 설치할 때는 광맥이 풍부한 곳도 중요했지만 점소 주변에 풍부한 산림이 있는 가도 크게 고려되었다.1226)蔡濟恭,≪樊岩集≫, 論扶安蝟島銀鑛設店便否啓.

 이상과 같은 점소의 제반 작업과정에서 기술을 요하는 부문은 장인들이 담당하였고 기술을 요하지 않는 부분은 모군들이 담당하게 마련이었다. 일정하지는 않지만 대개 장인과 모군의 비율은 1:10인 것으로 추정되었는데 당시 각 점소의 모군수는 점의 규모에 따라 엄청난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철점의 모군은<표 6>에서와 같이 적은 곳은 50명에서 많은 곳은 300여 명이었고, 유황점도<표 7>에서와 같이 적은 곳은 150여 명에서 많은 곳은 400여 명이었으며, 연점의 모군수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평균 100명에 달하고 있다. 각 점소의 이들 모군은 장인들과 더불어 당연히 채굴·제련·매탄 작업장에 분속되고 분업에 기초한 협업형태로 店役을 지고 있었다.

<柳承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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