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4. 금속화폐제도의 시행
  • 1) 금속화폐 시행론

1) 금속화폐 시행론

 15세기 후반에 유통수단으로서 널리 상용된 것은 布貨였다. 포화의 소재는 처음에 베가 중심을 이루었으나 15세기 후반 이후로는 목화 재배의 보급과 면포의 상품성이 중시됨에 따라 면포가 베보다 더 널리 사용되게 되었다.

 포화는 五升布가 기준 포로 바로 正 1승은 80올이므로 5승포란 곧 400올로 짠 1필의 면포를 가리킨다. 이 시기에는 3승포·4승포 등이 常布란 이름으로 널리 쓰이기도 하였다. 이것들은 5승포보다 훨씬 조악하게 짰으며, 추포 또는 악포라고 불리던 2승포는 옷감으로 전혀 사용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성글게 짰다. 올 수가 성글었을 뿐만 아니라 길이도 30척 이하로 35척(1필)의 기준을 채우지 못하는 短布가 상포에는 많았다. 이렇게 기준에 미달하는 것이 만들어 진 것은 전적으로 화폐로서의 용도 때문이었다. 5승포보다는 훨씬 작은 소액 규모의 거래에 쓰기 위해 그러한 단포·추포가 출현한 것이다.1227)宋在璇,<16世紀 綿布의 貨幣機能>(≪邊太燮博士華甲紀念史學論叢≫, 1985), 389∼430쪽.
권인혁,<15세기 후반 저화제의 동요와 포화유통>(≪朴永錫敎授華甲紀念韓國史學論叢≫ 상, 1992), 802∼803쪽.
그러므로 소액 거래에 알맞는 추포, 그 위의 상포, 고액 거래에 상응한 정포·은 등이 나름대로의 화폐체계를 갖추었던 것이다. 16세기의 우리 나라 화폐경제는 이와 같이 동전의 주조만 결여되었을 뿐 기본적인 조건에서는 금속화폐가 유통될 수 있는 화폐의 체계가 마련되어 있었던 것이다.

 중종 10년(1515) 6월에 동전 주조 문제가 두 차례에 강력하게 대두되었다. 정포와 더불어 法貨로 채택된 楮貨를 다시 통용시키면서 동전을 주조하여 함께 유통하자는 주장이었다. 이 주장은 경제적인 미숙 때문이 아니라 관료사회의 문제 때문에 실현을 보지 못하였다. 이 시기의 정치에서 정치의 실천을 장악한 것은 戚臣들과 이에 결탁한 부류로서 이들은 군역과 공물·조세 등의 부과·징수에서 부정한 방법으로 화폐나 마찬가지인 면포를 과도하게 거두어 축재하는 것이 하나의 풍조를 이루었다. 이러한 비리는 새로운 정치세력의 비판 대상이 되었지만 인조 연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동전 주조가 결정되어 근본적인 개선이 이루어질 수 있게 되었다.

 16세기의 우리 나라 경제는 농업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소농민도 시장에 팔 잉여물을 가질 정도로 농업 생산력이 전반적으로 향상되었고 농촌 사회를 배경으로 한 장시1228)李景植,<16世紀 場市의 成立과 그 基盤>(≪韓國史硏究≫57, 1987), 87∼91쪽.가 더욱 발달하여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것은 원거리 교역의 비중이 크던 종래의 유통체계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으로 화폐제도의 변화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1229)李泰鎭,<16세기 東아시아 경제변동과 정치·사회적 동향>(≪朝鮮儒敎社會史論≫, 지식산업사, 1989), 102∼104쪽.

 16세기말에 발생된 임진왜란은 조선왕조의 화폐경제를 발달시킨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조선왕조 전기에 있어서 동전의 주조 문제를 둘러싸고 여러 차례 논의가 전개되었고 또 때로는 동전 통용을 시도해 보기도 했으나 결국 성공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조선왕조 중기에 와서는 임진왜란을 계기로 동전 주조론이 더욱 빈번하게 대두되었고, 숙종때부터는 동전의 주조, 유통이 조선왕조 후기에 이르기까지 비교적 일관성 있게 지속되었다.

 조선 왕조 중기에 본격적으로 동전 주조 문제가 거론된 것은 임진왜란 때부터이다. 임진왜란 중에 제기된 동전 주조 문제는 구원군으로 우리 나라에 참전한 명나라의 楊鎬가 선조 31년(1598) 4월에 이르러 조선 왕조 조정에 대해 萬曆通寶의 주조 통용을 제의함으로써 비롯되었다.1230)≪宣祖實錄≫ 권 98, 선조 31년 4월 병진·임술. 임진왜란 중에 명나라 經理인 양호가 만력통보의 주조 통용을 제의하게 된 것은 두 가지 목적에서 였다. 그 하나는 임진왜란의 발발과 더불어 국가 재정이 극도로 궁핍해짐을 보고 적자 재정을 보완하도록 하려는데 있었다. 다시 말하면 전쟁비용 부담으로 인한 국가의 재정 궁핍을 동전의 발행으로 해결하려는 데 있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명나라 군사의 군수품 조달을 용이하게 하려는 데 있었다. 다시 중국은 화폐경제가 상당히 발달하였으므로 화폐경제에 익숙한 그가 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군수품 조달 등에 많은 불편과 애로를 느꼈으리라 추측된다.

 양호에 의하면 동전 주조 문제가 제기되자 조정에서는 찬반론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국왕부터가 우리 나라의 토산과 풍속이 중국과 다르고 특히 주전 원료인 銅鐵이 부족하다고 하여 양호의 제의를 반대하였다.1231)≪宣祖實錄≫ 권 98, 선조 31년 4월 병진·신유·임술·계해.

 그러던 중 선조 31년(1598) 6월 양호가 萬世德과 교체되어 귀국함으로써1232)≪宣祖修正實錄≫ 권 32, 선조 21년 7월 갑신. 동전 주조에 대한 논의는 자연 중단되었다. 이와 같이 임진왜란 중 명나라 양호에 의해 제의되었던 동전 주조 문제는 전란으로 말미암아 사회 경제가 혼란 상태에 있었고 실제로 주전 원료인 동철 공급의 곤란 등으로 실현을 보지 못하고 말았다. 그러나 전란 중에 논의되었던 동전 주조론은 임진왜란 후 생산력이 복구 발전되고 교환이 활발해짐에 따라 다시 대두되게 되었다.

 임진왜란 중에 비록 부분적이기는 했으나 은이 금속화폐로서 유통 보급 되었다. 구원군으로 파견된 명군이 제반 군사비에 충당하기 위해 은을 반입하여 사용함으로써 널리 보급되었다. 명나라에서는 은의 유통이 활발하였는데 은은 명나라 이전인 金·宋·元 시기에도 화폐로 사용된 바 있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규모가 큰 거래에만 사용되었고 明에 이르러서야 소액 거래에도 사용되는 등 화폐로서의 독보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1233)崔虎鎭,≪韓國貨幣小史≫(瑞文堂, 1974), 84쪽. 이처럼 명나라에서 널리 유통되고 있는 은이 명군에 의해 국내에 반입·유통된 것이다.1234)≪宣祖實錄≫ 권 98. 선조 31년 4월 무인·임진.

 그러나 당시 은은 그 양이 제한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축재 수단으로 退藏됨으로써 유통수단으로서의 기능을 다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사회적으로 인정되는 널리 유통될 수 있는 동전 주조가 절실히 요구되었다.

 17세기에 들어와 동전을 유통시키는 것은 국가의 궁핍한 재정을 보충하기 위해서도 절실한 문제로 제기되었다. 선조 36년(1603) 5월에 特進官 成泳은 전란으로 궁핍해진 국가 재정을 보충하기 위하여 동전의 주조 문제를 거론하였다. 이를 계기로 같은 달에 호조와 고위 관료들이 서로 앞다투어 동전 주조에 대한 각자의 의견을 피력하였고,1235)≪宣祖實錄≫ 권 162, 선조 36년 5월 기사·무인. 동년 6월에도 2품 이상 고위 관료들이 대궐에 모여 동전 주조 문제를 협의하였다. 이 자리에서 영의정 李德馨은 미곡과 포화 등 현물 화폐만을 통용하고 동전을 통용하지 않는 관계로 농업이 쇠퇴하여 국가 경제가 궁색해졌다는 이유를 들고 시급한 경비 지출과 뜻하지 않은 수요에 대비하기 위하여 동전을 주조하자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좌의정 尹承勳과 우의정 柳永慶 등은 주전 원료인 동철이 부족하고 화폐에 대한 백성들의 인식도 부족하여 오히려 동전 유통이 여러 폐단만을 초래할 것이라는 이유로 동전 주조를 반대하였으며 국왕도 이를 반대하여1236)≪宣祖實錄≫ 권 162, 선조 36년 6월 기유.
≪宣祖修正實錄≫ 권 37, 선조 36년 6월 병술.
결국 실현되지 못하였다. 이리하여 선조 연간에는 동전 주조 문제가 세 차례에 걸쳐 크게 논의되었으나 실천에는 옮겨지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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