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4. 금속화폐제도의 시행
  • 2) 금속화폐의 논의와 주조
  • (2) 효종대의 화폐 논의와 동전 주조

(2) 효종대의 화폐 논의와 동전 주조

 효종 연간에는 淸錢의 수입 및 사주전의 허용 등 매우 이례적이며 과감한 동전 유통책이 전개되었다. 그것은 화폐정책을 주관하고 있었던 김육의 적극적인 노력의 결과로서 우리 나라 화폐경제 발전에 특기할 만한 일이었다. 김육의 화폐 유통책은 우선 청전의 수입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효종 원년(1650) 6월에 김육은 청나라에 陳慰使로 다녀오면서 자신의 노자로 청전 15만 문을 수입하여 평양과 안주에 이를 유통시킬 것을 건의하여 허락을 받았다.1251)元裕漢,<潛谷 金堉의 貨幣經濟思想>(≪弘大論叢≫ 11, 弘益大, 1979), 211쪽. 이를 계기로 효종 2년 3월에 비변사의 요청으로 의주·안주·평양 등지에서 각각 1천여 석의 管餉穀을 내어 청전을 수입하기로 결정하였으며 이를 점차 통용해 보아 시행할 만하면 더 많이 사오기로 국왕의 내락을 받았다.1252)≪孝宗實錄≫ 권 6, 효종 2년 3월 정해·경인.

 이와 같이 김육을 비롯한 고위 관료들이 청전을 수입하여 국내에 유통시키려고 한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그 하나는 청전을 수입하여 시험해 본 후 동전 통용의 가능성이 있으면 국내에서 동전을 주조하여 통용하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국내에서 동전을 주조하는 것 보다 소요 경비가 절감될 수 있다는 예상 때문이었다. 당시의 청전 수입 가격은 그 명목 가치와는 관계없이 重量으로 사들일 수 있었다. 따라서 조정에서는 청전을 중량 단위로 수입해 그것을 명목 가치대로 통용시키면 동전 주조에 소요되는 경비를 절약할 수가 있었다.1253)元裕漢,≪朝鮮後期 貨幣史硏究≫(韓國硏究院, 1975), 87∼88쪽.

 효종 원년에 김육이 수입한 청전 15만 문은 이를 은 값으로 환산한다면1254)≪孝宗實錄≫ 권 6, 효종 2년 3월 경인. 대략 185냥에 불과한 소액이었으나 이것이 조선 왕조 중기의 최초의 청전 수입이었으며 또 이를 계기로 하여 부분적이나마 일부 지역의 화폐 통용이 상당한 성과를 거둘 수 있게 되었다. 효종 2년(1651) 5월에 이르러 국왕이 먼저 황해도·평안도의 동전 통용 문제를 거론할 때 영의정 김육은 赴燕使行을 통한 청전 수입으로는 수요를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하자 국왕은 바로 국내에서의 주전을 제기하였다. 이러한 국왕의 태도는 곧 훈련도감의 동전 주조로 나타났고1255)≪孝宗實錄≫ 권 6, 효종 2년 5월 기축.
≪增補文獻備考≫권 159, 財用考 6, 錢貨 효종 2년.
아울러 인조대에 일시 논의된 바 있던 민간의 私錢을 허용하여 두 지역의 동전 유통을 원활하게 하려고 하였다. 특히 사주전 문제는 동년 7월에 우의정 韓興一이 건의한 것으로서 좌의정 李時白의 지지로 국왕의 허락을 받게 된 것이다.1256)≪孝宗實錄≫ 권 7, 효종 2년 7월 갑신. 이 문제는 인조대에도 논란이 있었지만 그 폐단을 염려하여 이를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효종 연간에는 김육을 비롯한 여러 신료들의 노력으로 청전의 수입 통용과 사주전의 허용 등 여러 가지 시책이 강구되었으나 관청과 민간의 주전사업은 부진을 면하지 못하고 민간에서의 동전 유통도 활발하지 못하여 효종 7년 9월에 동전 유통책이 중단되고 말았다.1257)宋贊植,≪李朝의 貨幣≫(한국일보사, 1975), 41∼42쪽. 그 이유는 동전 유통에 적극적이었던 김육이 노쇠로 인하여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고 효종도 동전 유통에 대하여 회의적 태도를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1258)元裕漢, 앞의 글(1972), 122쪽.

 효종대 동전 유통책은 상평청이 효종 2년 10월에 마련한 동전 유통 방안에 잘 나타나 있다. 그 내용은 대체로 세 가지로서 첫째, 쌀 1되의 값을 동전 3문으로 한다. 둘째, 각사의 收贖許通免賤·老職·空名帖의 동전 수납을 허용한다. 셋째, 시장의 모든 물건을 모두 동전으로 매매하도록 하되 동전이 필요한 자는 본청에다 쌀을 바치고, 쌀이 필요한 자는 쌀을 바치도록 한다.

 이와 같이 상평청의 동전 유통책1259)≪孝宗實錄≫ 권 7, 효종 2년 10월 계유.은 비교적 철저한 내용을 가진 것이었으나 당시의 사회 경제 상황을 감안한다면 현실과 동떨어진 매우 급진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상평청의 동전 유통책은 화폐를 유통 보급함에 있어서 별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오히려 여러 가지 부작용만을 일으켰다.1260)崔虎鎭, 앞의 책, 91쪽.

 또한 상평청은 화폐 유통을 장려하는 수단의 하나로 각 읍의 백성들로 하여금 동전 50문씩을 몸에 지니고 다니도록 강제하는 한편, 이를 독려하기 위하여 行錢別將을 각 지방에 파견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행전별장은 동전 통용을 강제하는 과정에서 많은 폐단을 일으키게 됨에 따라 효종 5년 4월에 행전별장을 폐지하고 都事로 하여금 대신 주관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행전별장이 폐지된 것은 아니었다. 효종 7년에도 경기도에서는 행전별장이 폐단을 일으키고 있었기 때문이다.1261)宋贊植, 앞의 책, 37∼38쪽.

 효종 6년 12월에는 앞서의 동전 유통책을 고쳐 현실에 맞도록 하였다. 김육이 작성한 이 更定科條1262)≪孝宗實錄≫ 권 15, 효종 6년 12월 계해.는 “첫째, 경기도 대동미 8말 중 1.2말을 동전으로 수납한다. 둘째 경기·황해·평안도에 점포를 설치하여 경중과 지방의 동전 유통을 장려한다. 셋째, 호조·병조·한성부·장예원의 贖布는 절반을 동전으로 수납한다. 넷째, 각사의 공물 값 중 1/5, 각사의 雇役, 호조·병조에서 지급하는 料布의 1/3을 동전으로 지출한다. 다섯째, 은을 동전 가치의 기준으로 삼아 은 1냥을 동전 600문으로 하고 쌀 1되는 동전 4문으로 하되 은 값에 따라 조정할 수 있도록 한다”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동전 유통책은 즉시 그 효과가 나타나지 않고 후일을 기다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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