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5. 중개무역의 성행
  • 2) 임진왜란의 종식과 중개무역의 재개
  • (1) 기유약조의 체결과 조일교역의 재개

(1) 기유약조의 체결과 조일교역의 재개

 임진왜란이 계속되는 중에도 일본의 무역에 대한 욕구는 그치지 않았다. 그것은 선조 26년 정월 평양전투 이후 명과 일본 사이에 강화 협상이 진행되면서 일본측이 제시한 요구 조건에도 명확히 나타난다. 선조 27년 6월, 풍신수길은 7개조의 강화 조건을 발표했는데 그 가운데 두번째의 것이 “폐지된 勘合貿易을 복구하고 官船과 商船을 왕래시키자”는 것이었다. 특히 명에 대해 풍신수길을 국왕으로 책봉해 달라고 요청한 것은 바로 감합무역을 실현시키기 위한 수단이었다.1297)佐島顯子,<壬辰倭亂講和の破綻をめぐって>(≪年譜 朝鮮學≫, 九州大 朝鮮學硏究會, 1994), 26쪽. 그러나 명측은 ‘寧波의 亂’ 등을 통해 막심한 피해를 입었던 경험 때문에 쉽사리 그것을 수용할 수 없었다. 풍신수길을 일본 국왕으로 책봉하겠다고 공언하면서도 책봉한 번국에게 허용하는 것이 상례인 貢市만큼은 완강히 거부하려 하였다.1298)岡野昌子,<秀吉の朝鮮侵略と中國>(≪中山八郞敎授頌壽記念明淸史論叢≫, 東京:燎原書店, 1977), 148∼154쪽 참조.

 실제 전쟁이 진행중인 가운데도 무역에 대한 열망이 얼마나 컸었는지는 일본군이 장기간 주둔해 있던 경상우도의 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조선 사람들과 일본 상인들 사이에 잠상무역이 끊이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는 보고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선조 29년(1596) 8월, 都體察使 李元翼은 “조선 사람들이 교역을 위해 倭營을 자유로이 드나들고, 倭商들 역시 끊이지 않고 왕래한다”고 그 실상을 전한 바 있었다.1299)≪宣祖實錄≫권 78, 선조 29년 8월 계해.

 전쟁 중임에도 잠상 교역 등의 형태로 명맥이 이어졌던 조선과 일본 사이의 교역은 왜란이 끝나자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일본은 德川幕府가 들어서면서부터 조선과의 국교를 재개하기 위한 노력을 다각도로 경주하였다. 그 배후에는 조선과의 무역이 경제적 생명선이나 마찬가지였던 對馬島의 필사적인 중개가 있었다. 그들은 조선과의 국교를 재개하려는 의도에서 幕府將軍이 조선에 보내는 國書까지 위조하는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하였다. 조선 역시 ‘萬世不共의 怨讐’인 일본 본국과 국교를 재개하는 것에는 미온적이었지만 대마도에 대해서는 무역의 재개를 허락하면서 그들을 이른바 覊縻體制 속으로 편입하려고 시도하였다.1300)孫承喆, <국교회복과 교린체제의 부활>(≪朝鮮時代 韓日關係史硏究≫, 지성의 샘, 1994), 119∼145쪽. 조선은 일본에 대해 幕府將軍 명의의 국서를 보낼 것과 왜란 당시 宣陵과 靖陵을 파헤쳤던 범인을 묶어 보낼 것을 요구했는데 대마도의 술수를 통해 그 조건이 충족되자 선조 40년 덕천막부에 ‘回答兼刷還使’라는 명칭의 사절을 보냄으로써 양국 사이에는 국교가 재개되었다. 이어 광해군 원년(1609) 이른바 己酉約條가 체결됨으로써 공식적인 교역도 재개되었다. 이 시기 조선이 내키지 않는 것이었음에도 일본과의 국교와 교역을 재개한 것은 서북방에서 점증하고 있었던 後金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대마도를 覊縻圈으로 다시 끌어들이고, 일본과의 관계를 정상화시켜 남쪽으로부터의 위협을 차단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1301)孫承喆, 위의 책, 145∼150쪽.
閔德基,<朝鮮後期 朝·日講和와 朝·明關係>(≪國史館論叢≫12, 國史編纂委員會, 1990) 참조.

 기유약조는 1609년 조선의 李趾完과 對馬島主 宗義智(소오 요시토시)가 체결한 통교 무역상의 제규정을 말하는 것으로 조선 후기 양국 사이의 통교 관계의 기본이 되었던 조약이었다. 모두 12개조로 구성된 규약은 대마도로부터 조선에 도항하는 선박의 종류·隻數·渡航者·渡航證·접대기준 등을 규정하는 것이었는데 그 가운데 임진왜란 이전의 양국관계와 비교하여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은 무역선의 숫자였다. 기유약조 당시 무역선의 수는 20척으로 제한되었는데 이것은 癸亥約條(1443) 당시의 50척, 壬申約條(1512) 당시의 25척, 丁巳約條(1557) 당시의 30척에 비해 현저히 줄어든 것이었다. 또 왜선이 조선에 도항할 때 대마도주가 발행한 文引을 지참토록 규정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실제로는 광해군 3년 대마도로부터 기유약조 체결 이후 첫 歲遣船이 파견되는데 대마도는 이제 조일무역, 나아가 전반적인 양국관계의 창구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1302)田代和生,<日朝關係の再開と對馬>(≪近世日朝通交貿易史の硏究≫, 東京:創文社, 1981), 44∼51쪽.
孫承喆, 위의 책, 145∼1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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