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1. 16세기 사족의 향촌지배
  • 4) 향촌기구의 여러 양상
  • (1) 향약의 도입과 정착

(1) 향약의 도입과 정착

 향약은 사림파들의 지방지배의 한 방법으로 제시되기도 하였지만, 단순히 교화적 기능만을 가지는 것이 아니고 유향소나 서원 등 지방지배기구를 통한 향약의 실시를 통하여 자신들의 이해에 따른 향촌지배를 관철시켜 나갔다.0021)李 珥,≪栗谷全書≫권 16, 雜著 3, 海州一鄕約束. 이들 향약에서는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부세의 수취, 환곡의 분배, 군역의 차출 등에 관여하여 향권을 행사하였다.0022)崔是翁,≪東岡遺稿≫권 2.

 향약으로서 이른 것은 15세기에 李先齊가 전라도에서 광산향약을 실시하였다는 기록이 보이고 있으나, 향약이 사회운동으로 발전한 것은 사림파에 의한 소학실천운동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趙光祖 등 사림파들이 기묘사화에 의하여 타격을 받으면서 일시 주춤하였다. 그러나 사림세력들은 자신들의 지방지배의 한 방편으로 향약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실행하였다. 퇴계는 예안을 중심으로<예안향약>을 실시하였고, 율곡도 자신이 수령을 역임한 청주에서, 외가가 있는 해주에서, 선산이 있는 파주에서 각각 향약을 실시하였다.0023)金武鎭,<栗谷 鄕約의 社會的 性格>(≪學林≫5, 延世大, 1983).
―――,<朝鮮中期 士族層의 動向과 鄕約의 性格>(≪韓國史硏究≫55, 1986).
퇴계와 율곡의 향약은 각각 주자의 향약을 모범으로 하면서도 우리 나라의 현실에 맞게 변용시킨 향약이었다.

 주지하듯이 향약은 北宋末 陜西省 藍田縣人 呂氏 형제에 의해 시작되어, 주희가 그것을 증손하여 성리학의 고전인≪小學≫에 수록함으로써 성리학적 향촌지배원리의 하나로 정착되게 되었다. 조선시대 유교국가를 표방한 가운데 성리학은 지배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초창기에는 漢唐儒學 등이 지배원리로 활용되어, 성리학만이 지배원리로 작용한 것은 아니었다. 새 지배세력은 성종대의 鄕飮酒禮 보급운동, 중종대의 鄕約보급운동 및 소학실천운동, 선조대의 書院건립운동 등 시기에 따라 다양한 방법으로 향촌사회지배를 위한 시도를 하였으나, 그 중 가장 큰 영향을 미치고 실천을 하게 된 것은 향약보급운동이다.

 향약은 사림파들에 의하여 향촌지배원리로 받아들여져서 중종대에 조광조 일파의 급진사림파에 의한 도학정치의 일환으로 경향 각지에서 향약이 실시되었으나 그들의 정치적 실패와 함께 향약에 의한 지방지배도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러나 중종 12년(1517) 경상감사 金安國에 의하여 주자증손여씨향약의 諺解本이 출간되고, 선조대에 향약의 전국적인 시행 논의를 거치면서 전국적으로 보급·확산되어 갔다. 퇴계와 율곡 단계의 향약 즉 16세기 후반의 향약은 우리의 체질에 맞는 향약으로 수용된 것이라고 하겠다. 퇴계의 향약이 사족 중심의 자율적 성격이 강하였다고 한다면, 율곡의 향약은 시기와 장소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의 향약으로 변용되었다. 즉 半官 기구인 유향소를 활용하여 관권을 활용하는 측면이 강한<海州一鄕約束>과 같은 것이 있는가 하면,<社倉契約束>처럼 지역적인 범위가 20리를 넘지 않는 지역공동체의 재생산 기구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도 있다. 17세기 이후에<해주일향약속>은 향안을 모태로 하는 향안조직으로 발전하여 이른바 군현 단위의 향촌사회를 규정하는 ‘鄕規’로 발전한다고 할 수 있고,<社倉契約束>은 일정한 지역공동체를 단위로 생활 속에 살아서 움직이는 洞約(洞契)으로 발전하게 된다. 또한 지역적인 특성으로 본다면, 사회적·신분적 변화와 함께, 퇴계의 향약은 儒·鄕이 일치하는 嶺南型의 향규로 발전하고, 율곡의 향약은 유·향이 분기된 호남형·호서형의 향규로 계승된다. 17세기 이후 거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향약이 실시되었다. 즉 각 고을마다 향규가 만들어지고, 각 촌락마다 동약이 실시되었다.0024)최근≪嶺南鄕約資料集成≫(嶺南大 民族文化硏究所, 1986)을 필두로 하여 향약 관련 자료를 집대성한 자료집이 속속 간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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