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2. 향촌자치조직의 발달
  • 2) 향촌자치조직의 내용과 성격
  • (1) 유향소와 경재소

(1) 유향소와 경재소

 조선 전기 사족의 향촌자치조직을 대표하는 것이 바로 유향소와 경재소이다. 앞에서 살핀 바처럼 조선 초기 관권 위주의 향촌정책은 선초부터 재지세력의 거센 반발에 부딪쳤다. 이들 재지세력들은 중앙의 집권적인 정책에 반발하면서 자신들이 주축이 되는 향촌질서를 도모하기 위해 자신들의 이해를 반영하는 자율조직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유향소 조직이었다. 이 시기 사족들은 유향소 조직을 통해 향론을 창출하여 자기들의 세력기반을 유지하고 향촌의 자율권을 확보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유향소란 유향품관이 모이는 장소라는 소박한 의미이지만, 실제로는 그 인적 조직 자체를 의미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유향소가 언제부터 생겼는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조선건국 초부터 재지세력에 의하여 임의로 성립되어 人吏와 官奴婢의 所犯을 규정하고0039)≪成宗實錄≫권 216, 성종 19년 5월 을해. 있었던 듯하다.

 조선 초기의 유향소의 모습은 태종 6년(1406) 6월에 “수령을 저훼하고 인물을 진퇴시키며 백성을 침어한다”는 반중앙집권적인 성향 때문에 혁파당하였던 것을 미루어 재지세력의 합좌기구로서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이 혁파조치로 중앙정부가 향촌세력에 대한 통제를 가할 수는 있었겠지만, 유향소가 재지사족에 의해 장악되거나 적어도 긴밀한 관계에 있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조선 초기 중앙의 이러한 지방세력 통제 의지와 달리 유향소의 성립·운영은 재지품관세력의 성쇠라는 향촌의 개별적인 조건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따라서 중앙의 단속이 완화되면 언제든지 재등장할 소지를 지니고 있었다.

 중앙정부는 유향소를 혁파한 뒤 9년 만인 태종 15년(1415) 성격이 비슷한 申明色을 설치하였다.0040)≪太宗實錄≫권 29, 태종 15년 4월 병술. 신명색은 관찰사가 임명하고 수령보좌의 임무를 맡기는 등 유향소에 비해 관의 주도적 성격이 좀더 강화된 것이었다. 이는 재지품관들을 반관제화시키면서 한편에서는 그들의 향촌에서의 지위를 인정하려는 구상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신명색은 명칭만 바뀐 것 뿐이지 재지품관에 의해 이루어지는 조직이라는 점에서 유향소의 후신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관제적 성격이 강했던 신명색마저도 국초의 유향소와 마찬가지로 토호적 성향 때문에 태종 17년 11월에는 혁파되기에 이르렀다.0041)≪太宗實錄≫권 34, 태종 17년 11월 무인.

 세종대에 이르면 이러한 지방통제책은 더욱 강화되어 부민고소금지법·수령구임법에 뒤이어 수령을 고소하는 군현의 강등조치(세종 11년;1429)0042)≪世宗實錄≫권 44, 세종 11년 5월 병진.가 마련됨으로써 수령권 강화정책은 더욱 강력하게 추진된다. 더구나 세종 17년에는 경재소 제도의 정비를 통해 연고지의 유향소를 장악하도록 함으로써,0043)≪世宗實錄≫권 69, 세종 17년 9월 기사. 유향품관으로 대표되는 재지사족의 지위와 지배력을 위축시켰고, 그 결과 재지사족들은 점차 자기보호의 수단으로 수령권과 타협하거나 결탁하는 경향도 보이게 된다. 세조 말에 행하여진 2차 유향소 혁파 이유가 국초의 수령능멸과는 반대로 수령과 유향소의 결탁에 의한 부민침학에 있었던 것은 바로 그러한 현상을 반증하는 것이었다.

 한편 지방 각 고을의 유향소를 감독하는 조직인 경재소도 유향소와 마찬가지로 언제 설치되었는지는 기록상 확인할 수가 없다.0044)≪太宗實錄≫권 33, 태종 17년 2월 경진. 경재소제도가 확립되는 것은 세종 17년 9월이었는데, 각 고을의 경재소에서 좌수 1員, 참상별감 2원, 참외별감 2원을 두어 향중의 공무를 관장하도록 하되 본향의 수령정치에는 관여할 수 없도록 하였던 것이다.0045)≪世宗實錄≫권 69, 세종 17년 9월 기사. 아울러 이러한 경재소 임원의 정원을 확보하기 위한 조치로 경재소 겸임의 범위를 확대하여 2품 이상은 父의 內·外鄕, 祖의 외향, 曾祖의 외향, 母의 내·외향, 妻의 내·외향 등 8향을 겸하도록 하고, 6품 이상은 처향을 제외한 6향, 참외는 조와 증조의 외향을 제외한 4향, 무직의 의관자제는 부모외향을 제외한 2향(부모내향)의 연고지 경재소를 겸임하도록 하였다. 이처럼 고려의 사심관이 1∼3향만을 겸임한데 비해 경재소가 2∼8향을 겸임하게 한 것도 중앙집권화 정책의 일종으로, 경재소 조직을 정비·강화함으로써 유향품관의 발호를 중앙에서 통제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중앙집권화 정책은 자체결속력을 강화해 가는 재지세력의 반발에 의해 한계성을 노정하게 된다. 특히 향촌질서에 새로운 변화가 초래된 성종대 이후에는, 경재소마저 설치의 원래 의도와는 달리 유향소와 결탁하여 관권을 침해하고 人吏를 침학하는 등 작폐를 자행하게 된다. 이는 성종 19년(1488)에 유향소가 복립되면서 경재소에서 유향소 품관을 택정하고, 만일 유향소가 작폐하는 경우에는 수령과 함께 경재소에서 이를 규제하도록 한 조치와 연관되는 것으로 보인다. 즉 유향소의 인사권이 경재소에 주어짐으로써 훈구세력이 경재소를 장악, 복립된 유향소를 지배할 수 있는 길이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성종 23년에 편집된≪大典續錄≫에서 확인되는 복립된 유향소의 조직은 다소 축소되어 있다.≪대전속록≫을 보면 유향소 색장의 인원은 府 이상이 4인, 郡은 3인, 縣은 2인으로 나타나고 있다.0046)≪大典續錄≫권 3, 禮典 雜令. 또한 이 시기의 유향소 청사는 흔히 鄕射堂이라고 불리고 있는데, 이 시기에 향사당이라는 용어가 일반화된 것은 성종대에 복립된 유향소가 사림세력들에 의해 이곳에서 향사례·향음주례를 주관·실시토록 장려되었던 때문으로 여겨진다. 이것은 전통적인 향촌지배조직이었던 유향소에 주자학적 이념이 강하게 반영되어 있음을 나타낸다. 당시의 사림세력은 주례의 향사례·향음주례 속에서 재지세력 중심의 향촌지배논리를 발견하고, 이를 통해 자신의 위치를 합리화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성종대에 사림세력이 유향소를 통해 실시하고자 했던 향사례·향음주례 보급운동은 중종대에 이르면 향약보급운동으로 바뀌게 된다. 그런데 사림파에 의하여 주장된 여씨향약 보급운동은 본질적으로 경재소·유향소 체제 아래 빚어지고 있는 지방사회의 여러 가지 모순을 지양하는 방안으로 제시된 것이었으므로, 그 시행의 논의과정에서 자연히 경재소·유향소의 혁파 문제가 함께 논의될 수밖에 없었다.0047)≪中宗實錄≫권 31, 중종 12년 12월 무오·권 36, 중종 14년 6월 을해. 성종대에 복립된 유향소의 주도권을 훈구세력에 빼앗긴 사림파들은 향약으로써 유향소의 기능을 대신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유향소가 그 전래의 권한을 통제받고 경재소에 의해 장악되자 유향품관들은 자기 보호를 위해서 점차 관권에 타협·순종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는 결과적으로 수령의 불법을 조장하는 부작용을 낳았다. 그리하여 유향소는 2차의 혁파를 당하게 되는데 충주 유향소의 사례가 그 대표적이다. 부민들의 수령에 대한 고소가 사실상 허용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세조 말에 충주민이 그 고을 수령의 비행을 고소하자 충주 유향소는 수령과 결탁하여 그 백성들을 침학하였다. 이 일이 빌미가 되어 유향소는 이 때에 성종대와는 달리 전면적으로 혁파되었다.0048)李泰鎭, 앞의 글(1986).

 한편 중종대에 사림파에 의해 경재소·유향소의 혁파 건의가 있었음에도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음으로써 경재소의 폐단은 이후 여전히 확대되었다. 즉 경재소는 원래의 설치의도인 향풍의 糾正과 유향소의 작폐 감독을 소홀히 하고 향촌에서의 경제적 이권을 노려 人吏를 침학하기에 급급하였다. 이에 선조 원년(1568) 5월에 장령 李憲國은 경연에서 이러한 경재소의 폐단을 지적하면서 혁파를 청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경재소의 혁파는 그 폐단이 인정되고 있었음에도 유향소와의 관계 등 상황논리에 의하여 지연되고, 한편으로는 유향소와 경재소에 대한 감찰을 강화하여 그 폐단을 보완하면서 유지하는 것이 적절하다는 견해도 제시되었다.0049)≪眉巖日記抄≫무진 5월 11일. 경재소는 그 후 왜란을 거치면서 그 불법부패로 유해무익함이 거론되다가 선조 36년 정월에 혁파되었다.0050)≪宣祖實錄≫권 158, 선조 36년 정월 갑신. 이와 함께 유향소의 임원을 수령이 택정하게 됨으로써 조선 초기에 수령까지 규제하던 유향소가 이제 조선 후기에는 수령의 보좌역으로까지 격하되게 되었다.0051)金龍德,<京在所論>(≪韓國制度史硏究≫, 一潮閣,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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