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1. 사족의 향촌지배조직 정비
  • 1) 난후의 향촌실정

1) 난후의 향촌실정

 임진왜란은 승패에 관계없이 조선왕조에 엄청난 피해를 주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막대한 인명과 재산의 손실로 요약될 수 있다. 왜적은 주요 거점을 장악하여 북상하면서 주위의 지역을 분탕하고 인명을 살상하고 창고를 약탈하며 관아와 각종 시설물을 불태워 막대한 피해를 주었다. 더욱이 전황이 교착되면서는 그들이 장악하고 있던 거점을 중심으로 먼 지역에 이르기까지 노략질하여 그 피해는 전라도 지역을 제외하고는 거의 전국적인 현상이었다.

 이러한 사정에서 오는 인명의 손실은 실로 막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인명의 손실은 왜적의 침략에 의한 직접적인 피해 못지않게 굶주림과 전염병으로 인한 것이기도 하였다. 난초부터 계속된 흉년으로 인한 기근과 선조 26년(1593) 초부터 크게 번진 전염병에 의해 영남의 경우 문경 이하부터 밀양에 이르기까지 수백 리가 텅비었다고 표현되기도 하였다.0066)柳成龍,≪懲毖錄≫, 辰巳錄.

 여기에 明軍의 주둔과 이에 따른 군량미의 공급, 그리고 이들의 침탈은 이러한 사정을 더욱 악화시켜 당시의 향촌사회를 극도로 피폐하게 하였다.0067)趙 靖,≪壬亂日記≫권 3, 계사 7월 28일·8월 23일. 이러한 사정에서 왜적의 직접적인 침략을 당하였던 지역뿐만 아니라 직접적인 피해를 입지 않았던 곳에서조차 난리를 당한 지역과 마찬가지 모습이었다.

 이러한 사정에서 생존의 문제는 사족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지만, 하층민에게 있어서는 더욱 심각한 문제였다. 하층민은 생존을 위하여 倭賊化하거나, 土賊이 되었다. 하층민은 난초부터 적의 嚮徒가 되거나 왜적화하여 지배층에 저항하고 있었다. 의병의 조직은 한편에서는 바로 이들에 대한 방어이기도 하였다. 토적은 왜적화한 백성들과는 달리 왜적이 물러가고 명군이 진주한 이후에 주로 그들의 생활거주지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이것은 명군의 침학과 이들에 대한 군량공급 문제의 심각성을 보여주는 것이며, 또한 이에 대한 민중적 저항이기도 하였다.

 명군의 침학과 그들에 대한 군량공급 문제는 심각하여 굶주려 죽는 자가 속출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의병 역시 지탱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0068)鄭震英,<壬亂前後 尙州地方 士族의 動向>(≪民族文化論叢≫8, 嶺南大, 1987). 의병에 가담하고 있던 많은 사람들은 이제 그들의 생계를 개별적인 차원에서 해결해야만 했다. 그러나 하층민의 경우에는 이것이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었다. 이러한 사정에서 의병에 참여하였던 많은 하층민은 토적으로 재편성되기도 하였다. 곧, “군량미가 없어서 군사가 한 번 흩어지면 강자는 敵中에 투신하고, 약자는 구렁에서 죽거나 아니면 흩어져 토적이 된다”0069)≪宣祖實錄≫권 59, 선조 28년 정월 정유. 거나, “토적은 의병활동을 하던 자가 기근을 이기지 못해서 된 것이다”0070)≪宣祖實錄≫권 59, 선조 28년 정월 을해.라는 것은 그 구체적인 예가 된다. 이러한 토적은 곳곳에서 봉기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이 극심하였다.

 조정에서는 토적의 괴수를 잡는 자에게는 堂上·守令이면 嘉善을, 士人이면 6品敍用을, 雜人私賤에게도 禁軍을 제수하는 剿捕事目을 반포하는 등0071)≪宣祖實錄≫권 58, 선조 27년 12월 을사. 적극적인 대책을 마련하였으나, 토적은 날마다 끊이지 않아 감옥에 가득하여 백성들은 결국 왜적에 죽고, 질병에 죽고, 감옥에서 죽는 처참한 상황이었다. 柳成龍은 이러한 사정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서울과 지방을 막론하고 굶주림이 심하고 군량을 운반하는데 피곤하여 늙은 이는 쓰러져 죽고, 장정들은 도적이 되었으며, 더욱이 거듭되는 전염병으로 인하여 거의 다 죽어 없어졌다. 심지어 사람이 서로 잡아먹는 지경에 이르렀다(柳成龍,≪懲毖錄≫1593년 10월 車駕還都).

 이러한 임란 중의 사정은 말할 것도 없이 난 이후의 인구감소라는 현상을 필연적으로 초래할 수밖에 없었다. 난 직후에 편찬된≪咸州誌≫의 편찬자는 함안지역의 경우를 예로 들면서 “우리 고을은 비록 바다 모퉁이에 치우쳐져 있기는 하지만 인물이 풍성하였다. 우리 山翼 한 마을을 예로 들어 말하면 당시 호구에 등재된 자가 850여 명이나 되었는데 지금 한 사람도 돌아오는 자가 없다. 한 모퉁이가 이러니 전국을 알만하다”0072)≪咸州誌≫.라 하여 난 이후 인구이산의 실상을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사정에서 난 이후의 인구가 전국적인 규모에서는 난전의 6, 7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고도 하였다.0073)≪仁祖實錄≫권 13, 인조 4년 윤6월 정미.

 이런 상황에서 전답 또한 제대로 경작될 리 없었다. 이것은 전쟁이 끝난 10여 년 뒤 조사된 전국의 田結數에서도 확인된다. 곧 임란전 전결수는 1,608,000결이었던 것이 광해군 3년(1611)에는 541,000결에 불과하여 6, 70%나 감소하였다. 그 중에서도 경상도가 가장 극심하여 난전의 43만 결에서 7만 결로 격감하였고, 전란의 직접적인 피해를 입지 않았던 전라도 또한 75%나 감소하였다.0074)≪增補文獻備考≫권 148, 田賦考 8 (광해군 3년). 전라도의 경우는 전란의 직접적인 피해는 입지 않았지만 募兵과 군량의 독촉이 상대적으로 심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시 수백 명의 노비를 소유하였던 사족의 경우에도 난후 피난에서 돌아왔을 때는 집터에는 쑥대만 무성하고 노복은 모두 죽어 겨우 몇 명만이 살아남아 있을 뿐이었다.0075)趙 靖,≪壬亂日記≫권 3, 계사 8월 22일.

 수백 명의 노비 중 몇 명만이 남게 된 것은 물론 전란으로 인한 노비의 사망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한편에서는 노비의 도망에서 오는 것이었다. 16세기에 있어서도 노비들은 도망을 통해 소극적으로 저항하고 있었지만, 임란을 통해서 그들의 저항은 보다 적극적이고 광범한 것이어서 재지사족에게 심각한 경제적인 손실을 주고 있었다.

 재지사족은 이제 노비를 不忠·不勤한 존재로 표현하거나, 또는 믿을 수 없는 존재로 인식하기도 하였다. 토지 경영을 주로 노비노동에 의존하고 있던 재지사족에 있어서 노비의 사망·도망은 그들 소유의 토지에 대한 파악마져 어렵게 하였다. 이러한 사정은 임란 후에 작성된 사족가문의 分財記에 여실히 반영되고 있었다.

 난후 막대한 인명의 상실과 전답의 황폐화는 사족 또는 사족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이것은 결국 국가적인 문제였으나, 촌락을 단위로 한 공동체적인 삶을 오랫동안 영위하여 왔던 향촌사회에는 보다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그것은 공동체적인 삶 자체가 위협받는 것이었다.

辰巳(1592∼1593) 이후 인물이 소진하여 한 고을의 사람이 수 십 명도 채 되지 않으며, 한 마을의 사람 또한 2, 3인에 불과하여 외롭고 쓸쓸하기 그지 없다. 族親 중에 재력이 있다 하여도 이웃의 도움을 받지 않을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는가. 만약 疎遠함을 친밀하게 하고 마을을 합하여 한 洞으로 하여 서로 돕지 않는다면 외롭고 쓸쓸하여 살아서는 누구와 더불어 노래하며 죽어서는 어느 누가 곡하리오(徐思遠,≪樂齋先生文集≫권 7, 河東里社契約序).

 이러한 사정에서 洞里간의 合洞이 자연스럽게 진행되었고, 경우에 따라서는 군현이 통폐합되기도 하였다. 가령 진주의 경우에는 난전 112개 里坊이 난후에 53개 리방으로 통폐합되었으며,0076)李海濬,<17世紀初 晉州地方 里坊再編과 士族>(≪奎章閣≫6, 1982). 단성현의 경우에는 산청에 합속되기도 하였다.

 임란은 이렇듯 인구의 감소와 전답의 황폐화뿐만 아니라 향촌지배세력인 재지사족에게는 또다른 문제를 안겨주었다. 즉, 향촌사회의 피폐와 함께 그들의 향촌지배 근간이었던 留鄕所(鄕廳)와 鄕案이 임란의 와중에 소실되었던 것이다. 여기에 사족 역시 생명의 보존조차 어려웠던 상황은 그들의 향촌지배의 기반을 일시에 와해시킬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임란의 극복은 도리어 재지사족의 영향력을 향촌사회에서 증대시키는 과정이기도 하였다. 임란으로 인한 피폐는 전국적인 현상이었고, 재지사족 또한 그 참화를 모면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보다 결정적인 타격을 입은 것은 전국적인 범위에 토지와 노비를 소유하고 있던 중앙관료였다. 토지의 황폐화와 노비의 사망 또는 도망에서 오는 경제적인 몰락은 더 이상 그들을 정치주도세력으로 존재할 수 없게 하였다. 재지사족 역시 이러한 사정은 마찬가지였지만, 난중에는 의병활동을 난후에는 신속한 복구작업을 통하여 그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

 임란 의병의 활동은 거의 전국적인 것이었고, 의병을 주도하였던 것은 다름 아닌 재지사족이었다. 의병은 재지사족이 그들의 난전 향촌지배조직과 상호간의 혈연적·지연적 연대를 바탕으로 官兵과 일반농민, 弓手 등 하층민과 연합함으로써 가능한 것이었다. 재지사족은 의병활동을 통하여 그들의 경제적 기반을 어느 정도 보호할 수 있었으며, 나아가서는 향촌사회 하층민을 직접 지배함과 아울러 중앙권력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시킬 수 있었다. 재지사족의 이러한 영향력의 확대는 곧바로 관직의 제수라는 형태로 현실화하고 있었다.

 의병의 활동이 활발하던 시기인 선조 25년(1592) 10월에는 군공이 많아서 軍器侍正 30, 副正 50, 舍正·判官·主簿 각 80, 禮賓侍直長·奉事·參奉 각 100 등 일거에 620여 職宦이 가설되고 있었고,0077)≪宣祖實錄≫권 32, 선조 25년 11월 경신. 난후의 宣武原從功臣錄의 9,000여 명에 달하는 숫자 중 상당수는 재지사족에 대한 논공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구체적인 내용은 이후에 작성되는 각 읍지의 인물조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아무튼 임란을 통해 지방 사족은 자기성장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이며, 이것은 결국 난후의 향촌질서를 그들 중심으로 재확립할 수 있게 한 배경이 되었다.0078)정진영,<16, 17세기 재지사족의 향촌지배와 그 성격>(≪역사와 현실≫3, 1990).

 임란을 경과한 향촌사회는 막대한 인명의 손실, 전답의 상실, 토적의 봉기, 노비의 도망 등에서 온 사회·경제적 혼란에 대한 전후 복구와 향촌질서의 재확립이 절실한 문제였고, 그리고 새로운 향촌질서의 확립은 향촌지배라는 차원에서 재지사족이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이러한 구체적인 움직임은 향사당·향안의 중수, 동계·동약의 실시 등 난전 재지사족의 향촌지배조직의 정비와 서원의 건립 등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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