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2. 사족의 향촌지배와 서원의 발달
  • 2) 서원의 증설과 역할의 증대

2) 서원의 증설과 역할의 증대

 중종 38년(1543) 주세붕에 의해 백운동서원이 창건되면서 처음 출현하였고, 명종 4년(1549) 이황에 의해 소수서원으로 사액을 받으면서 국가로부터 그 존재를 공인받아 사림의 양성을 위한 학교로서 정착되며, 다시 그와 그 문인들의 적극적인 노력에 의해 보급되었던 서원은, 사림 출신 관료의 정국주도가 실현되고 이를 배경으로 하여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향촌에서의 士林勢가 강화되어 향권주도가 가능하게 되자, 향안·향규·향약·동계 등 사족세력이 마련해 왔던 기존 향촌조직과 함께, 사족 내에서도 古道를 익히며 그것의 실천을 통해 三代至治의 재현을 추구하는 儒子집단인 사림만의 장수처이며 동시에 향촌에서의 그 활동기반으로서 본격적 발전을 보게 된다.

 그 발전의 구체적 양상은 양적·질적의 두 가지 측면에서 모두 찾아볼 수 있다. 우선 양적인 측면으로서 선조 이후 경종 때까지를 중심으로 서원과, 뒤에 가면 서원과 구별이 없어져 같이 섞어 부르게 되는 사우의 건립상황을 통계로 표시하면 다음의<표 1>,<표 2>와 같다.

 <표 1>에서 보듯이 서원은 선조대에 들어와 전국적으로 63개소가 건립되어 앞선 시기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증가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표 2>에서 알 수 있듯이 지역적으로도 명종대의 경상도 일변도에서 벗어나 강원도를 제외한 전국으로 확산되며 특히 충청·전라·경기·황해에는 각기 6개소 이상의 서원 설립을 보이고 있다. 인조 22년 경상감사 林土覃이 도내의 서원 실정을 보고하면서 “萬曆 이후 서원을 세우는 것이 해가 갈수록 많아져서 고을마다 서로 잇다을 정도가 되었다”0123)≪仁祖實錄≫권 45, 인조 22년 8월 기미.고 하여 선조 이후 서원이 증설되었다고 한 말이 정확한 지적임을 알 수 있다.

시 대 서원(사우) 연평균 건립 수
(사우 포함)
누 계
명종 이전 19(1) 0.83(0.04) 19(1)
선조 63(22) 1.58(2.1) 82(23)
광해군 29(9) 2.23(2.9) 111(32)
인조 28(25) 1.08(2.0) 139(57)
효종 27(10) 3.00(4.1) 166(67)
현종 46(23) 3.29(4.9) 212(90)
숙종 166(174) 3.69(7.6) 378(264)
경종 8(20) 2.67(9.3) 386(284)
영조 18(145) 0.35(3.2) 404(429)*
정조 이후 3(8)**    
미상 7(43)    

<표 1>조선 중기 서원(사우)의 시대별 건립 수

이 속에는 영조 17년의 서원훼철시 철거된 19개소의 서원과 154개소의 사우가 포함되어 있다.
** 정조 이후는 이른바 門中書院(祠宇)이 곳곳에 건립되었으나 국가에서 파악한 통계에는 들어가 있지 않으므로 통계가 갖는 의미가 적다.

  경 상 전 라 충 청 경 기 황 해 강 원 평 안 함 경
선조 25(3) 13(9) 7(3) 6 8(1)   3(4) 1(2) 63(22)
광해군 12(3) 5(4) 6(1) 2 1 2   1(1) 29(9)
인조 11(9) 6(7) 5(1) 2(2) (1) 2(2) 1(2) 1(1) 28(25)
효종 10(2) 5(3) 2(1) 4 3 2(3) 1 1(1) 27(10)
현종 14(6) 8(4) 8(3) 5(2) 2 (4) 4(1) 5(3) 46(23)
숙종 76(61) 27(40) 27(25) 19(8) 5(8) 4(8) 6(15) 2(9) 166(174)
경종 2(5) 3(4) 3(2)   (1) (2) (4) (2) 8(20)
150(89) 67(71) 58(36) 38(12) 19(11) 10(19) 15(26) 10(19) 367(283)

<표 2>조선 중기 서원(사우)의 시대별·지역별 건립 수

鄭萬祚,<17∼18세기 書院·祠宇에 대한 試論>(≪韓國史論≫2, 서울大, 1975), 263쪽에 의거하여 작성함.

 선조년간의 이러한 서원 증설은 말할 것도 없이 중앙정치 무대에서 사림계 관료가 정치적 우세를 확립하여 정국을 주도하게 된 정세변화의 결과라 할 것이다. 훈척세력 및 선조 초의 舊臣세력과의 오랜 기간에 걸친 정치적 투쟁에서 승리한 사림계는, 舊弊의 혁신과 함께 새로운 정치질서의 수립을 위한 방법 중의 하나로 道統說을 앞세워 사림계의 대표적 유학자들을 孔子를 제향하는 文廟에 入享시키고자 하였다. 이를 문묘종사운동이라 하거니와 이는 도학의 계승자로서 사림의 집권 명분을 확보하려는 정치적 목적과 함께 내외에 사림의 존재를 인정받으려는 의도를 가진 것이었다.0124)金鎔坤,≪朝鮮前期 道學政治思想 硏究≫(서울大 博士學位論文, 1994), 217∼254쪽. 이러한 경우 사림계 유학자를 제향하는 서원 건립 역시 문묘종사운동의 지방적 호응이라고 할 수 있다. 중앙에서의 정치적 우세를 배경으로 삼아 향촌의 사림들은 서원을 건립, 사림계 유학자를 제향함으로써 향촌사회에서 사림의 존재를 확립하는 한편, 이곳을 터전으로 講學과 藏修의 활동을 활발히 벌여 새로운 사림세력을 계속 양성, 배출함으로써 사림세의 확산을 꾀하였던 것이다. 율곡 李珥가 海州의 石潭에 은거하며 조광조와 이황을 제향하는 靜退書院(石潭서원)을 세워 사림을 양성한 데서부터0125)鄭萬祚,<17∼18세기의 書院·祠宇에 대한 試論>(≪韓國史論≫2, 서울大, 1975), 270쪽. 황해도 일대에 선조년간에만 8개소의 서원 건립을 보게 했던 것이 그 하나의 예라 하겠다.

 선조년간 서원의 역할은 위와 같이 강학과 장수를 통한 사림의 양성소로서 사림세력의 지방적 확산을 위한 거점이었다는데만 그치지 않았다.0126)이하의 서술은 鄭萬祚, 앞의 글(1989)에 주로 의거하였다. 이 시기 사림의 東人·西人으로의 분열은 어떤 형태로든 서원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었다. 임진왜란 후 북인 鄭仁弘이 남인으로서 영의정이던 유성룡을 主和誤國으로 탄핵할 때 그 영향력하에 있는 경상우도의 서원조직을 통해 士論을 규합했다는 혐의를 받는 것이 그 사례가 된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후대에서 보듯이 서원이 향촌사림의 여론을 수렴해 중앙정치의 갈등과 대립에 참여할 정도나, 더 나아가 아예 黨論의 소굴이 될 만큼 역할하지는 않았다.

 마찬가지로 향촌사회에서의 서원 역할 역시 사림의 취회소라는데 머물 뿐 사족의 향촌사회운영을 위한 조직으로까지 나아간 것 같지는 않다. 물론 율곡 이이가 서원을 향약 시행과 운영의 기반으로 삼아서 적극적으로 향촌기구로 활용하려는 구상을 한 적은 있다. 즉 율곡은<海州鄕約>에서 향약의 立案, 임원의 선출, 향약의 조직, 의식의 거행, 慶弔자금의 운영·관리 등을 모두 서원의 인적 자원과 시설을 활용하는 방안으로 구성하였다. 한마디로 향약으로 대변되고 있는 향촌 사림의 사회적 활동을 모두 서원을 기반으로 수행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위와 같이 율곡이 서원으로 하여금 단순한 사림 양성소로서의 학교에만 머물지 않고 留鄕所나 鄕會所·公會堂과 같은 사림의 향촌자치기구로서의 역할을 하도록 제안하였다고 해서 막상 그것이 실현에 옮겨졌다거나 널리 보급되었다고는 확실하게 답변할 수 없다.0127)渡部學 역시 서원에서의 향약실시를 규정한 해주향약이 汎身分的인 Community school의 건설을 목표로 하는 율곡의 이상론에서 나왔을 뿐 다른 곳에서는 그 예를 찾아볼 수는 없고 또 그의 학통을 잇는 서원에서도 보이지 않는다고 하였다(渡部學,<16세기 朝鮮朝 書院의 三類型>,≪제1회 한국학국제학술회의 논문집≫,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79, 1337쪽). 기본적으로 학교적 성격을 지닌 서원에 사림은 물론 鄕民까지 취합하여 鄕射·飮禮나 讀會를 개최하여 주위 환경을 소란스럽게 하는 것이 서원의 본질인 士子藏修에 크게 방해가 된 터임은 분명하므로 그 자체가 논란이 될 수 있고, 또 굳이 서원조직이나 건물을 활용하지 않아도 아직은 향사당이나 유향소·향안·향회 등의 자치조직이 제 기능를 발휘하고 있어 서원까지 전용해야 할 필요성이 적었기 때문이다.0128)鄭震英에 의하면 선조 36년의 경재소 혁파 후에도 안동에 있어서 사족의 향촌지배 중심 기구는 여전히 유향소였다고 한다(鄭震英, 앞의 글, 1985, 87∼88쪽). 이는 율곡 자신조차<坡州鄕約>이나<西原鄕約>등에서 서원과의 연관을 맺고 있지 않았던 데서도 확인된다. 생각건대 율곡은 같은 교화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취합을 위한 향사당 등의 기존 건물이 미비한 해주에 있어서, 이미 설립되어 있던 文憲書院의 건물과 인적 조직을 활용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여 그 하나의 시안으로써 해주향약의 내용을 제시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는 16세기 말의 선조일대는 물론 이후의 17세기에서도 서원과 향약조직과의 직접적인 긴밀한 연관관계가 쉽게 찾아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록 그렇다고는 해도 향촌사회에서의 사림 우세 속에 서원이 그 활동의 기반과 구심체적 존재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은 율곡의<해주향약>을 통하여 충분히 엿볼 수 있는 바라 하겠다.

 서원의 발전은 17세기에 들어와 현저해진다. 우선 양적으로 볼 때<표 1>에서 찾아지듯이, 광해군∼경종 때까지 무려 304개소를 헤아릴 수 있는데 조선시대에 건립되었다고 통계에 잡히는 서원이 417개소였음을 감안한다면, 거의 대부분(73%)이 이 시기에 세워졌다고 할만큼 엄청나게 증가하고 있다. 그리고 이 시기 후반기인 숙종 때 가면 서원 건립에 대한 禁令 때문에 규모나 운영을 서원과 꼭 같이 하면서도 명칭만 祠宇라고 해서 사실상 서원과 사우와의 구별이 없어졌다고 하는 만큼 사우까지 서원에 합해 본다면 그 숫자는 565개소에 이른다. 광해군에서 경종까지가 116년이므로 연평균 2.6개(사우포함 4.8개)가 새로 세워지는 셈이다.

 뿐만 아니라 이 시기에 이르면 사림의 뿌리가 깊고 그 숫자가 많다는 三南지역은 물론 강원도·함경도 등 평소 사림의 활동이 별로 눈에 띄지 않는 지역에까지 서원의 숫자가 늘고 있어 전국적인 분포를 보이고 있으며,≪서원등록≫에 보면 숙종 때 영남지방에는 하나의 고을에 서원이 7∼8개처나 된다는 지적까지 나오고 있다.0129)≪書院謄錄≫권 5, 숙종 43년 11월 9일. 17세기 말에 해당하는 숙종년간에 서원의 남설이 큰 폐단으로 사회문제화 되었던 사정은 위의 통계로서 확인되는 것이다. 남설이 문제가 될 정도의 이러한 서원의 수적 증가는 이 시기를 특징짓는 붕당정치와 특히 사족 중심의 향촌운영 및 同姓村落의 성장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선조대의 동인·서인의 분당에서 비롯된 붕당정치가 17세기에 들어와 점차 본 궤도에 오르면서 성리학적 이념과 밀접히 연관되는 명분과 의리 중심의 논쟁으로 전개되자, 향촌사림의 여론이 정치의 향방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따라서 각 정파는 이런 여론을 자기 당에 유리하게 이끌어 정치적 입장을 강화할 필요가 있었다. 이를 위해 각 정파는 자기 파를 지지하는 사림세력을 지방별로 확보해야 하였고, 이런 경우 향촌 사림의 聚會所이며 특정 인물을 제향하는 서원이 그런 목적에 알맞는 매개체였다. 여기서 각 정파는 자파계의 유학자를 제향하는 서원을 지방별로 직접 건립, 사림을 불러들여 이곳을 중심으로 자기파 지지세력의 거점을 구축하려 하였던 것이다. 광해군 때 북인정권이 지지세력을 심기 위해 그 학문적 연원인 南冥 曺植을 제향하는 서원을 서울 삼각산 아래와 전라도 강진에 세우려다가 물의를 일으킨 것이나, 숙종 20년 이후 불과 26년 사이에 노론의 영수인 송시열을 제향하는 서원이 30여 개소를 넘을 정도로 도처에 세워지고, 이를 놓고 당시의 예조판서 閔鎭厚가 “하물며 논의가 갈라진 후에는 각기 존경하는 인물을 높이기 위해 경쟁적으로 서원을 세우고 있다”0130)≪書院謄錄≫권 5, 숙종 43년 11월 3일.고 말한 것이 그런 예라고 할 것이다.

 향촌 사림의 지지를 획득하려는 각 정파의 시도는 직접적인 서원 건립으로만 나타나지 않았다. 특히 집권세력은 자기파 집권의 명분 합리화와 주장에 대한 공감대의 확산을 기하기 위해 기존의 서원을 향해 물질적·행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 지원의 형태는 여러 가지로 나타날 수 있지만 가장 대표적인 것이 賜額이었다. 사액은 단순히 懸板과 함께 노비와 서적 약간을 지급하는 정도의 의미만 가진 것이 아니다. 사액을 받은 서원으로 볼 때 그것은 향촌에서의 그 존재에 대한 국가적 공인이었으며, 동시에 그 서원을 기반으로 하는 향촌 사림의 활동에 대한 보장책이기도 하였다. 향안·향약·동계·향회 등의 사족세력의 향촌지배를 가능하게 하는 수단이 있기는 하였지만, 농민 통제를 비롯한 제반 향촌 문제를 놓고 아무래도 수령권으로부터 견제를 받고 갈등 관계에 들게 마련인 사족들에게 그들이 세웠고 운영하는 서원이 임금으로부터 공인을 받았다는 사실은 그 활동에 큰 힘을 실어주었다. 그러기에 모든 서원마다 사액을 열망하였으며 때로는 막대한 경비를 쓰면서까지 이를 관철하려 하였다.0131)숙종년간 건립된 울산의 鷗江書院의 경우 사액을 받기 위해 5만여 냥의 경비를 사용하였다고 한다(李樹煥,<蔚山 鷗江書院의 설립과 賜額과정>,≪大丘史學≫49, 1995). 따라서 집권세력의 의도에 좌우되기 마련인 사액은 향촌사림의 지지를 획득하는 유력한 수단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서원과 중앙정파와의 관련이 이와 같이 밀접하게 된 결과 본래 山林學者가 하게 마련인 서원 院長職을 중앙의 고관이 역임하게 되며, 또 서원의 유생이 하기 마련인 有司職에 鄕有司와 縉紳有司의 구별을 따로 두어 향유사는 유생이 하고 진신유사는 중앙의 堂上 이상의 고급 관료에게 위촉되었다.0132)鄭萬祚,<朝鮮後期의 對書院施策>(≪第3回 韓國學國際學術會議論文集≫,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84), 262쪽 참조. 이러한 경우 해당 서원으로서는 서원유지에 따른 행정적·물질적 지원을 관료들로부터 기대할 수 있고, 또 이러한 조직이 향촌사림과 중앙관료의 연결을 맺게 해주어 그들의 정치적 진출에 階梯를 마련해 주는 이점이 있으며,0133)≪書院謄錄≫권 6, 경종 4년 4월 28일, 全羅右道暗行御史李眞淳書啓. 중앙관인의 입장에서는 서원을 통하여 자파의 정론에 대한 향촌사림의 지지를 확득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서원과 중앙관인과의 연결조직을 반드시 당론적 상관관계에서만 파악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그것은 향촌사림의 公論과 특정 사안에 대한 여론을 서원을 통하여 집약, 중앙관인에게 전달함으로써 사림공론을 수렴하는 창구적인 역할을 서원이 수행하였다고 보는 면이 보다 합리적인 해석이라도 할 수 있다. 그러한 대표적인 예는 현종 때의 服制論爭을 통하여 찾을 수 있다. 주지하듯이 복제논쟁은 孝宗喪에 慈懿大妃의 복제를 宋時烈은 朞年說, 尹鑴는 삼년설을 주장함으로써 비롯되었는데 처음의 논란은 國制時王之制를 쫓아 현종이 기년설을 결정함으로써 일단락되었었다.

 그런데 이 기간 이후 安東을 중심으로 한 영남의 유림세력은 의례에 대한 상세한 변정과 고증작업을 진행시키고, 거기서 나온 결론을 상호 검토하였으며 列邑에 通文을 돌려 禮說에 관한 의견을 수렴·조정하여 드디어 현종 7년(1666) 柳世哲을 疏首로 한 영남유생 천여 명의 聯疏를 올렸다.0134)이에 관해서는 주로 李樹健,<正祖朝의 嶺南萬人疏>(≪嶠南史學≫1, 1985), 10∼12쪽 참조. 현종 15년의 甲寅禮訟 때 남인설이 승리하고 이로 인해 송시열계의 서인이 실각, 남인이 집권할 수 있는 토대는 바로 이 유세철 등 영남유생 천여 명의 연소에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바로 嶺儒의 禮論 자체가 영남내의 향교와 서원조직을 통하여 연구되고 상호간의 의견교환과 논란을 거쳤으며, 書院通文에 의하여 도내 유림의 여론을 계도·수렴함으로써 연소가 작성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볼 때 이 연소를 올리게 되는 취회소는 향교가 되지만 처음 논의가 이루어지고 의견이 발의·수렴되며, 통문이 오고 가는 거점은 바로 서원이었다. 다시 말해 향내에 있는 각각의 서원마다 개별적으로 일차 여론이 수렴·조정된 후 향교로 다시 취합되며 이것이 한 곳에 개설된 疏廳에 전달되어 도내의 통일된 의논으로 결정되는 것이니 이를테면 여론수렴 과정이 개별유생→서원→향교→소청(도)의 단계를 밟았다고 할 것이다. 서원은 바로 향촌여론의 발의와 수렴의 일차 거점이었으니 조선시대의 정치, 특히 명분론과 학설 위주의 붕당정치에 있어서 서원이 갖는 정치적 역할이 여기서 드러나는 것이다.

 물론 향촌유림이 중앙정치의 모든 면에 대하여 이와 같이 의논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었고, 또 설사 의논을 모은다고 하여서 반드시 서원조직을 활용하였다고 만은 할 수 없다. 향촌에는 서원 이외에도 향사당·향교같은 공공건물이나 정자 등이 있어 취회하는 장소 마련은 어렵지 않았다. 그러므로 유생의 藏修處라는 서원에서 조정의 일반 정사를 논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적어도 서원에서 논의할 수 있으려면 사안이 국가의 운명과 직결되던가 아니면 斯文이나 聖門 및 국가통치이념 등 사림과 직결되는 것이어야 하였다. 상기한 예론은 국가의 통치이념이나 사문에 바로 연결되는 문제였다. 이렇게 본다면 서원이 향촌여론 수렴의 거점이라는 것은 상기한 범위에 포함되는 사안에 한정된다고 할 것이다. 다만 효종 이후 붕당정치가 성리학이나 통치이념과 보다 깊이 관련되는 명분과 의리론 위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그만큼 서원이 여론의 거점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잦았던 것이라고 하겠다.

 명분론 위주의 붕당정치는 자칫 열기가 더해지면 과격한 방향으로 흐르게 마련이었다. 숙종 초부터 그런 기미는 벌써 나타나고 있었지만 庚申大黜陟으로 재집권한 서인이 남인관료를 逆으로 몰아 대거 살육하게 되면서부터, 그리고 다시 己巳換局 당시 남인의 서인에 대한 보복, 甲戌換局으로 서인이 남인에게 다시 보복하는 악순환이 되풀이되었다. 이러한 보복의 악순환 속에서 사림의 공론이란 사실상 노론·소론·남인 삼당을 지지하는 鄕村士子의 당론적 성격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게 되며, 따라서 이 시기 이후 서원은 겉으로는 사림공론의 수렴처를 표방하면서도 실제로는 私黨政治의 소굴, 곧 당론의 연수라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서원으로 하여금 당인 피차간의 혈전의 쟁투장으로 화하게끔 이끌어 갔다. 영조 14년(1738) 안동에 노론 감사와 부사의 지원을 받은 安宅駿 등 일부 노론계 인물이 金尙憲書院을 세우고 이를 발판으로 안동향권을 장악하며, 안동내 노론세력 진출의 발판으로 삼으려 하다가, 남인 사족의 맹렬한 반대와 훼철하는 실력저지로 한때 一道가 떠들석하고, 조정에서마저 노론계와 남인측을 각기 변호하고 공척하는 노·소론 사이의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어 정국이 불안하였던 사례는,0135)鄭萬祚,<英祖 14年의 安東金尙憲書院 建立是非>(≪韓國學硏究≫1, 同德女大, 1982) 참조. 서원이 이제 향권장악의 기반이 될 뿐 아니라 당인의 집결지요, 당론의 소굴로 변모하였음을 단적으로 나타내어 주는 것이었다.

 17세기에 들어오면서 향촌사회의 당면한 일차적 과제는 임진왜란으로 붕괴된 향촌사회의 재건과 경제력의 복구에 있었다. 그것은 재향사족세력과 농민의 노력에 의해 수행되었으며 그러는 과정에서 향안·향규·향약·향회 등 난전에 사족세력이 마련하였던 향촌조직이 복구되었고, 그 결과 사족 중심의 향촌운영이 가능하게 되었음은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 있다.

 서원 또한 다른 향촌조직과 마찬가지로 임진왜란에서 입은 피해로부터 이 시기에 대개 복구되었고, 또 앞의 통계표에서 보듯이 신설된 곳도 점차 늘어났다. 그러나 서원이 중건되거나 신설된 것은 사실이지만 여타의 향안·향약 등의 향촌조직과 마찬가지로 사족세력의 향촌지배에 직접적으로 활용되었다거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는 사례는 쉽게 찾아지지 않는다. 앞서 선조년간 율곡 이이가<海州鄕約>에서 서원을 향약의 조직과 운영의 토대로 삼고자 하였던 구상은 아직껏 구체화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물론 이 시기의 서원에서<朱子鄕約>의 讀約이 행하여졌다는 예는 적지 않게 나타난다. 그러나 이 독약은 그것이 주자의 교화관을 담고 있다는 면에서 白鹿洞學規와 마찬가지로 유생이면 누구나 다 알고 있어야 하며, 그 유생이 서원을 떠나 향촌사족으로 있을 때 향약의 내용을 스스로 실천함으로써 凡民의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뜻에서, 유생의 자기수련의 한 과정으로 서원의 유생이 함께 모여 강독한다는 뜻이지 향약의 제반 절차가 鄕中諸人의 모인 속에 서원에서 진행되었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만약 향약이 서원을 구심점이나 거점으로 하여 행하여졌다면 율곡이 규정한 바와 같은 서원의 인적 조직의 활용이나 향약이 서원에서 행하여지기 위한 구체적인 절차가 명시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알려진 바로는 향약의 시행은 유향소의 조직이나 향회소와 같이 서원과 관계없는 별도의 기구와 장소를 터전으로 삼고 있었다.0136)金仁杰,<朝鮮後期 鄕權의 추이와 支配層의 動向>(≪韓國文化≫2, 1981), 175쪽.

 따라서 이 시기의 서원은 향약과는 별반 큰 관계를 갖지 않았다고 하겠으며 서원의 사회적 역할은 다른 면으로 찾아야 할 것이다. 이 시기의 서원의 사회적 역할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사건은 인조 4년(1626) 5월에 발생한 陶山書院 院長 李有道(李滉의 형 李瀣의 손자)의 杖斃로 인한 안동유림들의 경상감사 배척운동이었다.0137)≪仁祖實錄≫권 12, 인조 4년 5월 무신·기사 및 권 13, 인조 4년 윤6월 병오·기유·경술. 즉 경상감사 元鐸이 詞訟을 처리하는 도중에 사건에 관련된 이유도를 소환 심문하다가, 이유도의 답변이 공손하지 못함으로 道主를 능멸한다고 하여 곤장을 가한 것이 바로 치사함으로써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이유도의 아들 崶·岩 등이 그의 부친의 억울함을 호소하며 族人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였고 도산서원에서는 각 고을에 통문을 보내어 감사가 함부로 사족을 죽였다 하여 감사배척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지방민이 王人(감사)을 함부로 몰아내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하여 통문발송을 주장한 李弘重 등을 체포하였다. 그러자 鄭經世 등의 在京 남인관료들은 집권 서인세력의 이러한 유생탄압에 반대하여 그들을 옹호함으로서 이 문제는 서·남인간의 정치논쟁화할 조짐까지 보였다. 결국은 남인의 의견을 받아들인 인조의 온건수습책으로 首唱儒生들은 용서되고 元鐸은 파직되었다. 이상의 서술로 볼 때 적어도 도산서원의 경우 서원에 관계하는 인물의 보호에 서원조직이 총력을 기울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앞서 선조년간 율곡 이이가 유향소 중심으로 실시하려 했던<海州一鄕約束>에서 鄕員(鄕案入錄者)의 억울한 죄에 대해서 향원들이 함께 구한다고 한 규정이,0138)李 珥,≪栗谷全書≫권 16, 雜著 3, 海州一鄕約束. 여기서 실제로 행하여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서원이 16세기 무렵까지 유향소가 수행하던 역할을 이 시기에 이르러 대신하고 있는 예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에 서원의 이러한 역할이 보편화되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위의 이유도 사건은 퇴계의 종손이며 도산서원의 원장을 지낸 인물이었기에 크게 문제가 되었을 뿐이었다. 위에서 말한 서원의 사회적 역할이 보편화되게 되는 것은 宗法制의 정착에 의한 상속제·가족제의 변화에 따라, 종래의 同姓異姓雜居 형태의 同族村落이 同姓同本이 한 마을에 집단적으로 거주하는 同姓村落으로 변모하고, 또 그런 동성촌락이 발전하게 되는 17세기 후반 이후였다.0139)李樹健, 앞의 책(1995), 435∼442쪽.

 그런데 동성촌락이 형성될 수 있는 족적 기반의 바탕은 族契에 있었다. 족계란 혈연적 유대가 강한 개인끼리 거주지인 동리를 중심으로 친족간의 상호부조와 祖先奉祀를 목적으로 조직된 契會인데 친족내의 인간관계 유지를 위하여 향약의 윤리조항을 원용하고 또 향약의 자치조직을 도입함으로써 이를테면 동성촌락내에서의 향약의 시행과 같은 성격을 지녔다.0140)金武鎭,<조선중기 士族層의 동향과 鄕約의 성격>(≪韓國史硏究≫55, 1986), 19쪽. 그러므로 흔히 거주지를 같이 하는 동성간의 자치를 위한 약속이라 하여 洞約이라고도 불린다. 이러한 족계는 이미 16세기의 퇴계나 그 문인 黃俊良·琴蘭秀 등의 동족촌에서부터 찾아지고 있다. 그러나 역시 족계가 성행한 것은 임란 후 향촌의 재건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였다.

 이 족계는 단순히 친족 사이의 친목이나 상부상조·조선봉사만 목적으로 한 것은 아니었다. 진주의 晋陽鄭氏 족계인 上寺里洞約을 보자.

제군들에게 바라노라. 부질없이 친구들과 만나서 술마시고 이야기하며 풍류찾기를 일삼지는 말라. 자제를 가르칠 때는 小學을 근본으로 삼도록 하되 詩·書·子·史를 가르쳐 立身揚名의 바탕으로 삼도록 하라. 우리 동네의 인재가 예전에는 부족하지 않았으니 지금이라고 하여 어찌 그렇지 않으랴. 아! 우리 후학들은 더욱 힘쓰도록 하라(成汝信 編,≪晋陽志≫권 1, 各里 東面 上寺里).

 이처럼 상사리동약은 孝弟를 중심으로 한 자제교육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자제교육의 강조는 향촌내의 다른 구성원에 대한 배타성을 갖는 족적 결합임을 의미함과 동시에 契員이 향촌지배층으로서의 위치를 재생산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여서 대부분의 족계는 자제교육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하여 동성촌락 안에서는 대개 족계의 기금으로 운영되는 서당을 갖게 마련이었으니 17세기 이후 서당이 성행하게 되는 하나의 배경이 되기도 하였다.0141)渡部學,<鄕村書堂成立의 樣相>(≪近世朝鮮敎育史硏究≫, 東京, 雄山閣, 1969).
丁淳佑,≪18世紀 書堂硏究≫(韓國情神文化硏究院 博士學位論文, 1985) 참조.
조상제사를 목적으로 하는 족계가 이와 같이 자제교육을 위한 교육기구로서 서당을 가졌다는 사실은 이 시기의 향촌사회에서 서원이 수행하던 역할과 관련하여 대단히 주목된다. 특정 유학자를 제향하여 사림의 본보기로 삼고 겸하여 사림의 藏修·講學處로서의 기능을 가진 서원이 이러한 경우 비록 그 본래의 제도에서는 벗어났다고 하더라도, 족적 기반 내에서 위의 조상제사와 자제교육을 겸하여 수행할 수 있는 적절한 기구로 변모할 가능성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능성은 17세기 후반에 들어가 현실로 나타난다.

 붕당정치의 名分論爭이 격화되고 정쟁희생자에 대한 신원의 의미를 지닌 서원의 건립이 성행하여 서원의 성격이 講學·藏修 중심에서 제향 위주로 전환되면서, 제향인물의 선정기준이 또한 반드시 道學者나 儒賢이 아니라도, 예컨대 鄕賢이나 高官, 심지어는 行誼있는 士子나 효자까지도 포함될 수 있다는 선으로까지 확대되자,0142)≪書院謄錄≫권 4, 숙종 26년 11월 5일. 각 동성집단들은 자기집단의 顯祖나 入鄕祖를 제향하는 祠廟를 세우고 여기에 자제교육을 위한 童蒙齋나 養正齋 따위의 건물이나 아예 서당을 함께 부설하였다가 기회를 보아 서원으로 확장시키는 경향이 점차 두드러지게 된다. 이와 같이 붕당정치의 당론격화의 결과로 빚어진 서원의 남설은 향촌사회에 있어서 족계에 바탕을 둔 동성집단으로 하여금 그 족적 기반의 중심기구로서 족적 성격을 강하게 지니는 서원의 건립을 유발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鄕案·鄕約·鄕射堂 등의 향촌자치조직이 붕괴되기 시작하는 18세기에 들어가 그에 대신하여, 族譜와 같은 예에서 보듯이, 족적 결속에 의한 보장을 도모하는 방식으로 변모하면서 더욱 노골화하게 된다. 그러면 이와 같이 동성촌락에 세워진 서원이 갖는 역할은 실제적으로 어떠하였을까. 우선 일차적으로 생각될 수 있는 것은 이들 서원이 동성촌락 구성원들의 사회적 지위를 높이고 유지하게 하는데 기반 역할을 하였다는 점이다. 그것의 건립은 후손들 중에서도 주로 문중 중추세력들의 발의와 주도에 의하였던 만큼 활동도 주로 이들이 하였다. 이들은 서원을 발판으로 鄕中의 다른 문중 집단과 지속적인 유대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이런 경우 일족을 대표한 문중 중추세력이 다른 문중과 유대관계를 맺고 유지하는 계기를 마련하여 주는 것이 바로 서원이었다. 물론 서원 외에도 향교·향사당·향청 등이 있었지만 그 대부분은 17세기 후반 이래 점차 사족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고, 樓亭이 있었지만, 이는 그야말로 풍류를 통해 지면을 익히는 곳이지, 사림의 世誼를 나눌 곳은 아니어서 오직 서원 밖에는 다른 것이 없었다. 따라서 일문의 중추세력들은 자기 문중을 대표하여 다른 문중의 서원에 참여, 문중간의 연결을 도모할 수 있었다.0143)鄭勝謨,<書院·祠宇 및 鄕校組織과 地域社會體系>(上)(≪泰東古典硏究≫3, 1987).

 뿐만 아니라 이렇게 하여 유대의 범위를 확대시켜 나가게 되면 자연적으로 향촌의 사족이 주도하는 향권 대열에 참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중 중추세력들의 서원을 기반으로 한 향촌활동은 결과적으로 자신이 소속된 문중내 구성원들의 사회적 지위를 격상시키는 데 중개 역할을 하는 셈이었다. 그런데 이 시기의 향촌에서는 班格이라는 것이 있어 같은 양반가문이라도 벼슬관계나 학적 기반·경제력 등 여러 가지 요소에 의하여 그 사회적 지위에 차등이 있었다.0144)江守五夫·崔龍基編,≪韓國兩班同族制의 硏究≫(第一書房, 1982), 119∼122쪽 참조. 예컨대 이황의 후손들은 이황 문인들의 후손에 대하여 그 선대의 사제관계에 영향을 받아 향촌에서 보다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향촌마다 그 향촌 나름대로의 각 문중 사이에 어느 정도의 반격의 질서가 있게 마련인데 이 질서가 동요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것이 이른바 鄕戰이었다. 향전의 계기나 그 나타난 양상은 다양한 것으로 말해지지만,0145)李樹健, 앞의 책(1995), 576쪽. 17세기 말 18세기 초에 들어오면서는 서원의 건립·配享·追享 및 位次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씨족·문중·학파간의 대립과 선조의 학통과 師友淵源문제·文字是非를 두고 후학·후손 사이에 생겨나는 분쟁이 중심이 된다고 한다. 이러한 분쟁을 놓고 흔히 서원향전으로 불렀던 만큼 이 시기는 서원을 중심으로 향전이 전개되었던 것이요, 그 만큼 서원이 향촌사회에서 갖는 사회적 역할의 비중이 높았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동성촌락는 대개 그 入鄕祖가 처음으로 자리잡게 되면서부터 3∼4대를 지나야 인원수도 늘고 경제력도 집적할 수 있어 집단으로서의 형태를 갖추게 된다고 할 수 있다. 조선 후기의 동성촌락이 대체로 임란을 전후한 시기에 入鄕하는 경향을 보이므로0146)일제시대에 행하여진 전국의 集姓村(同族部落으로 표시) 분포조사에 따르면 저명한 동족부락 1,685개소에서 정착연대 미상 458개소를 제외한 1,227개 가운데 500년 전에 자리잡은 것이 207개소, 300년 정도의 것, 즉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의 것이 646개소, 300년 미만이 74개소라 한다(朝鮮總督府,≪朝鮮의 聚落≫후편, 1935, 217쪽). 여기서부터 3∼4대를 따진다면 대략 17세기 말이나 18세기 전반에 해당하는바 후손에 의한 문중서원의 簇出이나 부계 중심의 족보 출현0147)崔在錫,<朝鮮時代의 族譜와 同族組織>(≪歷史學報≫81, 1979).과 거의 일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제 18세기 이후 서원은 점차 族黨基盤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는 것이다.

 위에서 살핀 서원의 발전에 덧붙여 이 시기 서원의 재정기반에 관해 간단히 언급하고자 한다.

 서원의 유지와 존립에는 상당한 규모의 재정이 필요하였다. 서원에 머물며 講學藏修하는 유생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供饋비용과, 봄 가을로 지내는 享祀에 드는 비용 등의 기본 경비 외에도, 서원을 찾는 외부 인사에 대한 접대, 다른 서원의 건립이나 斯文과 관련된 행사에의 扶助, 서원건물의 관리와 수리에 필요한 경비 등이 있으며, 기타 서원 유지에 드는 소소한 비용도 적지 않았다.

 이러한 소요경비를 충당하려면 서원재정이 반드시 확보되어야만 하였다. 그래서 마련된 것이 토지로서의 書院田과, 인적 자원 내지 稅源인 奴婢·院屬·額外院生·除役村이며, 이외에 지방관으로부터의 현물지원이 별도로 있었다.0148)閔丙河,<조선서원의 경제구조>(≪大東文化硏究≫5, 성균관대, 1968).

 그 중 서원전은 말할 것도 없이 서원재정의 가장 기본이 되는 토지였다. 현존하는 서원의 고문서를 보면 이 서원전에는 屬公田·寺社位田·免役田·願納田·買得田 등의 명목이 보이고 이외에도 免稅田이 나오고 있다.0149)崔元奎,<조선후기 書院田의 구조와 경영>(≪孫寶基博士停年紀念 韓國史學論叢≫, 1988). 속공전이란 여러 가지 사정으로 지방관청에 귀속된 토지를 말하는데 이것을 서원에 획급해 준 것이다. 그러나 소유권의 완전한 양여가 아니어서 수령에 따라서는 전임자가 획급해 준 것을 환수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면역전은 力役의 면제를 원하는 자가 投屬한 토지이며, 원납전은 외부로부터 기증된 토지이고 매득전은 서원의 재력으로 직접 사들인 토지이다. 한편 사사위전은 사찰소유의 토지인데 抑佛策 속에서 여러 곳으로부터 침해를 받는 사찰에서는 아예 유력한 서원의 屬寺로 편입되어 이를 피하고자 했으며, 이런 경우 사사위전의 수세권을 서원에서 행사하게 된다. 끝으로 면세전은 서원소유의 토지에 대한 면세를 말하는데 후일 경종 때 3結에 한해 면세되도록 법제화되었다. 이렇게 볼 때 완전한 서원소유의 토지라면 면역전·원납전·매득전이라 할 수 있고 그 중에서도 매득전이 서원전의 주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대체로 보아 서원이 보급되던 초창기는 지방관의 관심도 크고 지원도 많아서 속공전·사사위전이 서원전에서 높은 비중을 지녔으나, 서원의 수적 증가가 심화되어 한 고을에 7∼8개소가 될 지경에 이르게 되면 이는 줄어들고, 점차 서원 자체의 경비로 마련하는 매득전이 주류가 되다가 門中서원이 발달하는 18세기 이후는 문중재산인 族産의 성격을 지녀가면서 문중인사에 의한 원납전이 크게 늘게된다.

 다음 인적 자원으로서 노비는 서원 내의 사역이나 서원전의 경작에 부려지는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은 身貢노비로서 서원전과 함께 서원재산의 근간을 이루었다.0150)尹熙勉,<朝鮮後期 書院의 經濟基盤>(≪東亞硏究≫2, 西江大, 1983). 서원 관련 고문서의 상당수가 도망간 노비의 추쇄를 요청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던가, 노비의 저항이 심해지는 후기로 가면서 아예 노비를 팔아 서원전을 사들이고 있는 것에서 노비가 재산으로 간주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반면에 院直人·保率 등으로 불리기도 하는 원속은 본래 서원 부근에 살고 있는 良民으로서 잡역을 면제받는 대신 서원에 예속되어 서원 내의 제반잡사를 맡아 처리하는 존재였고, 액외원생은 정원 이외의 서원 소속 유생을 말하는데 실은 軍役을 피하기 위해 양민 자제가 일정한 대가를 내고 원생을 모칭하는 것이므로 혹은 納物院生이라고도 한다.0151)위와 같음. 이들로 인해 서원에 출입하는 실제의 유생까지 원생이란 칭호를 기피하게 되자 마침내 원생은 모두 피역자로 채워지게 되며, 이것이 군역폐의 하나의 요인으로 손꼽히면서 마침내 숙종 37년(1711) 大賢書院 30명, 사액서원 20명, 미사액 서원 15명으로 숫자를 제한하는 조처가 법제화된다.

 한편 書院村이란 숙종 후반기인 18세기 초부터 성행한 것인데 유력한 서원이 소재지 인근의 大村을 지정하여 서원에 예속시키고 烟戶잡역과 군역징발로부터 보호해 주면서 그 대신 서원에서 필요한 제반 물자나 비용을 징수하는 것인데 募入洞 또는 除役村이라고도 부른다.0152)위와 같음.

 세번째의 현물지원이란 지방관이 서원에 대하여 祭需나 柴炭, 饌品 및 기타 雜物들을 증여하는 것을 말하는데 초창기는 지방관의 선심에 의해 자발적으로 이루어졌으나, 숙종년간부터 이른바 求請이라 하여 高官의 지위에 있는 京院長의 명의로 인근 수령들에게 반강제적으로 부조를 요구하는 폐단을 일으킴으로써 비난의 표적이 되기도 하였다.

 이상이 서원재정의 기초가 되는 재원이었는데 서원 초창기인 16세기까지는 숫자가 얼마 되지도 않고 또 興學의 차원에서 서원 보급에 의욕을 보인 뜻 있는 수령들의 대폭적인 지원이 뒤따라서 속공전이나 屯田의 획급, 屬寺의 배정, 海稅 등의 현물공여 및 원속의 배정 등이 서원재정의 주류였다.

 17세기의 서원재정도 기본적으로는 16세기와 동일하지만 단 전란의 뒤끝이라서 물력이 부족한데다가 서원 수의 증가로 한 고을에 3∼4개의 서원이 들어선 상황에서는 지방관의 지원이 부실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일부 집권세력과 연결된 서원을 제외하고는 속공전의 지급이나 현물지원은 현저히 감소하고 범위도 축소되었다. 관의 지원이 줄었다는 것은 서원 운영자인 사림의 재정부담이 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사림들은 개인적인 희사나 공동기금을 조성하여 서원재정을 확보하려 하였고 부족한 재원 충당을 위해 양민을 원속·원생 등으로 끌어들이(冒入)게 됨으로써 서원재정에서 이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높아지게 되나 이른바 서원의 폐가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서원의 수가 격증하고 남설이 문제가 되던 숙종 이후 즉 17세기말∼18세기초에 이르게 되면 서원의 전반적인 재정상태는 크게 악화되었다. 서원 명목만으로도 400여 개소가 넘고 더욱이 이 시기에는 서원보다 더 많은 사우까지 서원과 구별이 없어지게 되어 거의 천 개소에 육박하게 됨으로써 집권세력의 비호를 받는 유력한 서원이나 陶山書院 같이 大賢을 제향하여 온 저명한 서원을 제외하고는 더 이상 관의 지원은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더구나 서원의 폐단이 사회문제화되면서 국가가 서원 건립을 위시한 운영에 통제를 가하게 되는 분위기는 그 재원 확보를 갈수록 어렵게 만들었다. 특히 앞에서 본 바대로 이 시기에 들어오면 사족의 향촌주도가 사실상 무너지고 사족마저 분열함으로써, 사족의 공동체적 향촌조직으로서 서원의 효능 역시 크게 저하됨에 따라 향촌사족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게 된 것도 재정악화의 큰 요인이 되었다. 이러한 난관의 탈출로는 그 당시 향촌조직에 대신하여 족적 결속의 강화를 도모하는 문중조직이 성장하면서 확산되기 시작하는 문중서원의0153)李海濬.<조선후기 門中書院 발달의 추이>(≪擇窩許善道先生停年紀念 韓國史學論叢≫, 一潮閣, 1992). 예에 따라 서원재정을 제향자의 후손에게로 넘기는데서 마련되었다. 신설이나 기존의 곳을 막론하고 서원의 문중적 성향은 강화되었으며 이런 과정에서 후손이나 문중의 族産的 성격으로서 기증(願納)에 의한 서원전과 서원노비의 확보가 가능하게 된다. 따라서 문중서원이 발달하게 되는 18세기 이후 서원의 경제기반은 華陽洞서원이나 도산서원 같은 유력서원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서원전과 서원노비를 주력으로 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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