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2. 사족의 향촌지배와 서원의 발달
  • 3) 서원정책의 추이

3) 서원정책의 추이

 서원은 기본적으로 향촌사림에 의해 건립되고 운영되는 사설학교 내지 향촌기구였다. 따라서 조선 중기에 서원이 수적으로 크게 늘어나고, 그 역할 역시 단순한 학교에만 머물지 않으면서 붕당정치와 향촌운영의 기반으로까지 확대된 것은 일차적으로 사림활동이 그만큼 활발했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서원 발전의 이면에는 그것을 가능하케 해준 국가의 서원 지원책이 있었음도 사실이다. 후기의 영조 때 대대적인 훼철을 수반한 국가의 서원억제책이 이후의 서원 쇠퇴를 가져왔던 데서 보듯이 서원의 발전이나 침체 여부는 국가 정책에 좌우되는 측면도 컸다. 그러므로 서원의 주체인 사림 내지 사족의 입장이나 활동과 함께 국가의 서원시책까지 살피는 것이 조선 중기 서원 발전의 실상을 바르게 이해하는 길이 되겠다. 여기서는 이런 면에 유의하면서 서원의 발생과정에서 파생되는 제반 문제점에 대한 대책론을 중심으로 다루기로 한다.0154)이하의 서술은 鄭萬祚, 앞의 글(1984)에 주로 의거하였다.

 서원이 본래 사림의 사설학교로 출발하였기 때문에, 서원과 관련된 제반사는 오로지 향촌사림의 자율에 맡겨져 있었다. 따라서 국가는 인재 양성과 右文政治라는 측면에서 혹은 사액하여 사림을 격려하고, 때로는 약간의 물질적 지원을 하는 소극적 장려책 이외에는 불관여의 입장을 고수하였다.

 서원에 대한 국가의 관여가 처음으로 논의되기는 17세기 중반인 인조 22년 慶尙監司 林土覃의 서원폐 상소를 계기로 하여서였다. 여기서 임담은 서원 제향자의 자격기준이 모호함에서 오는 濫享의 경향을 지적하고 良丁의 冒占으로 인한 良役弊의 유발을 서원폐단으로 거론, 적어도 그 건립에 관해서만은 국가가 파악해야 옳다(創建以聞)는 견해를 피력하였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예조판서 李植의 찬동을 얻어 일단 서원 건립 때 조정에 알려야 한다는 형태로 정책화하였다. 서원건립에 대한 국가의 간섭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創建以聞이란 이 규정은 그 이후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고 국가에서도 크게 이를 문제삼지 않았다.

 효종은 즉위한 직후 金集을 영수로 한 山林세력을 조정에 불러들였으며, 金堉을 필두로 한 일반관료0155)여기서 일반관료란 말은 명분을 중시하는 산림세력(山黨)에 비해 집권자로서 현실의 정책을 중시하는 漢黨系나 그들과 정치적 입장을 같이하는 인물을 가리킨다.에게 정권을 맡기면서도 이들 산림을 언관직에 포진시켜 상호 견제를 유지하도록 하는 권력구조를 취하였다. 따라서 효종대의 정책은 이들 관료세력과 산림계 사이의 절충에 의해 결정되었던 것이며 서원시책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즉 산림이 처음 벼슬길에 나오던 효종 초 그들은 李珥·成渾의 文廟從祀를 청하는 한편 趙光祖·이이·성혼·金長生의 4인을 제향하는 각처의 서원에 대한 사액을 요청, 이를 실현시켰다.0156)≪書院謄錄≫권 1, 효종 원년 5월 30일. 이는 산림계의 學的 淵源과 조광조→이이·성혼→김장생으로 연결지은 이른바 기호학통의 천명을 통해 일반관료에 대한 도덕적 우월성과, 특히 영남학파에 대항하여 도학적 정통성의 확립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일반관료의 반발 또한 만만치 않았다. 후일 현종 때 송시열의 義理無實을 비난했다가 큰 物議를 빚었던 徐必遠은, 충청감사로 있던 효종 8년(1657) 도내 서원의 실상을 상소하면서 濫設의 경향을 우려하고, 그 폐단을 鄕校衰退·保奴(良丁冒占)·傷風敗俗·官給祭需라는 4가지 측면에서 신랄하게 공격했으며, 이어 서원에 대한 정리의 필요성을 역설, 특히 疊設에 대해서는 훼철까지 요구하며 앞으로의 서원건립은 반드시 국가의 사전 승인을 받도록 하는 등의 통제책의 실시를 청하였다. 도학을 내세워 첩설에도 불구하고 사액을 요구한 산림계의 주장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는 것이었다. 서필원의 이러한 요청은 역시 관료계의 인물이었던 예조판서 蔡裕後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아 한때는 정책으로 결정되기까지 하였으나 뒤이어 玉堂에 있던 산림계 李正英·閔鼎重의 맹렬한 반대에 직면하게 된다. 이때 산림계의 서원 통제 반대는 퇴계 이황의 유명한 서원론에 기초한 것으로, 서원은 사림의 藏修處로서 존재할 뿐이지 祀賢의 기능은 부차적인 것이므로 애초부터 첩설이 문제될 것은 아니며, 또 첩설 자체가 그 제향 인물에 대한 후학의 존경이 성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폐단시할 필요는 전혀 없고 不合祭享者는 黜享하면 될 것이지 굳이 良民冒占과 같은 사소한 폐를 같이 들먹여 毁院하라는 것은 斯文을 망하게 하려는 저의 때문이라고 극론하여 서필원과 그에 동조한 채유후의 파직을 요구하였다. 민생문제를 앞세우는 현실론적 입장과 大義名分의 토대인 도학 진흥을 우선하는 이상론적 정치자세 사이의 현실을 보는 시각의 차이가, 서원정책 결정을 놓고 날카롭게 대립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서필원의 서원통제론을 둘러싼 일반관료와 산림세력의 이러한 논쟁은 결과적으로 서원의 존재를 朝紳 사이에 재인식시키고 향후 서원정책이 보호와 장려의 측면에서 적극적으로 추진되도록 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그 영향으로 현종대에 들어와 향촌사림의 請額운동을 촉발시켜 請額疏가 폭주하였다. 따라서 사액이 남발될까 우려한 현종은 스스로 첩설처에 대한 사액의 제한을 예조에 신칙하였으며,0157)≪書院謄錄≫권 1, 현종 원년 2월 19일. 이에 따라 예조는 지방에서 올라오는 청액소에 대해 일률적으로 勿施라는 부정적 품의와 防啓로 일관, 적어도 사액에 관한한 외면상으로는 통제를 가하는 정책을 취하였다. 그러나 현종 대에는 청액하였다가 거부된 경우는 모두 26개소이지만 그보다도 사액된 숫자는 훨씬 많은 42개소(서원명 31, 사우명 11)였다. 4개(인조) 내지 11개소(효종)에 그쳤던 전대에 비하여 엄청난 증가라고 할 수 있다. 결국 현종대의 서원시책은 사액에 신중을 기한다는 뜻에서 약간의 제한 조항을 둔 것일 뿐 기본적으로 서원 통제가 아닌 장려의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효종과 현종대의 서원장려책은 산림이 애초부터 그렇게 할 것을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다분히 서인 편향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효종대에도 그러하지만 특히 현종대에 들어와 왕으로부터 사액을 받은 서원을 당색별로 구분할 때 서인계 서원이 남인계에 비해 4배에 이르는 압도적 다수(12개소 : 3개소, 나머지 16개소는 당색 무관)를 점하고 있는 통계가 이를 말해주고 있다. 이는 비록 갈등을 보이고 있기는 하더라도 집권세력인 漢黨系나 산림계가 당색에 있어 근본적으로는 서인에 속하였으며, 그렇기 때문에 첩설처라 하여 일단 거부된 사액요구가 서인계 서원의 경우는 바로 이들 서인관료의 特請에 의하여 대부분 특례로 사액내리게 되는 구제의 기회를 가졌기 때문이었다. 영남학파에 대항하여 기호학통을 수립하고자 서원건립과 사액 실현에 주력하던 서인계 산림들로부터 남인의 학통천명을 강화해 줄 남인계 서원에 어떤 도움을 기대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사액과정에서 보이는, 한편으로는 통제하라는 왕명에 쫓아 防啓를 하면서도 자기당파 계통에는 서원장려의 필요성을 들어 사액을 종용하는, 이러한 당파적 편파성의 요소는 이후 서원정책이 집권세력의 이해관계에 따라 좌우되게 하는 선례를 남겼다. 숙종대에 보이는 첩설금지령의 잦은 신칙 속에서도 서원의 엄청난 수적 증가가 올 수 있었던 첩설의 단초는 이미 여기서 마련되고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와 같은 제향인물 위주의 사액경향은 서원으로 하여금 특정 인물을 드러내기 위한 제향 중심으로 변모하게 하는 계기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숙종대에 들어와 서원문제가 논의되기는 원년 9월에 호조판서 吳挺緯가 국가의 승인을 받지 아니한 채 서원의 私建이 성행하고 있음과 院屬 및 保奴의 폐단을 들어, 이에 대한 대책의 강구를 요구함에서 비롯되었다.0158)≪書院謄錄≫권 1, 숙종 원년 9월 28일. 이 때 그는 각 지역의 서원에 대한 조사를 거쳐 필요한 경우 훼철까지 수반된 강력한 통제책의 수립을 희망하였으나, 비변사의 보고는 기왕의 것은 불문에 붙이고 앞서 효종 8년(1657) 서필원의 요청으로 결정되었던 丁酉成命, 즉 “서원건립 때는 반드시 조정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조항을 착실히 시행케 하자는 정도에 그치고 있었다. 당시의 집권세력인 남인으로서도 훼철에 따른 사림의 반발을 감당할 자신이 없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러나 이 때에도 현종대의 서인정권에서와 마찬가지로 沮喪된 士氣를 높이고 사림의 나아갈 바를 바로잡게 해야 한다는 許穆 등 儒臣系의 주장으로 特爲賜額의 형태로 사액이 빈번하였다.

 특히 이 시기에 첩설에도 불구하고 사액의 특전을 받았던 대표적 서원은 이황과 鄭逑를 제향하는 곳이었다. 이황의 도학자적 공덕은 자타가 인정하는 바이지만 특히 정구의 경우는 숙종 초 집권파였던 기호남인의 학적 연원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기호남인의 집권명분을 위한 도학적 정통성 수립이란 측면에서 그 존재의 顯揚이 필요하였던 것이다.0159)이는 마치 효종, 현종대의 서인정권하에서 서인학통의 연원으로서 이이·성혼이, 집권세력의 학파로서 김장생이 추존되었던 것과 같은 양상이다. 즉 서원정책이 국가적 차원의 공정성과 객관적 기준 위에서 집행되지 못하고 점차 당파적 이해관계에 의해 좌우되는 현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경신출척과 기사환국, 그리고 다시 갑술환국으로 이어지는 잦은 정변 속에 더욱 심화되게 마련이었다. 우선 경신출척으로 다시 정계에 복귀한 서인은, 서원이 너무 과다한데다 장수의 실효는 없고 오히려 수령권을 위협하며 유생들이 群居遊談하거나 酒食餔餟하여 폐단만 낳는 장소로 전락되었다는 大司成 金萬重의 서원폐 상소0160)≪肅宗實錄≫권 11, 숙종 7년 6월 계미.를 계기로 서원 신설금지와 일체의 사액을 불허한다는 정책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이 기간 동안에 서인계는 금령에 저촉되지 않으면서도 실제적인 건립의 효과를 얻을 수 있는 기존 서원에 대한 추향에 주력하였다. 즉 이이가 황해도 지역에 다수 분포한 서원에, 송준길이 김장생이나 宋麟壽의 서원에 추향되는 것이 그 예이다. 그리고 서원건립금지령도 철저히 시행되지는 않았다.≪俎豆錄≫의 통계는 이 기간 모두 23개처의 서원이 건립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서원금지령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은 이 시기에 사우의 수가 현저하게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숫자는 모두 21개소로서 서원의 그것에 육박하고 있다. 이는 금령을 피하여 비슷한 효과를 거둘 수 있는 사우를 건립한데서 온 현상이었다. 따라서 건원금지령은 사실상 효력을 상실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뿐만 아니라 사액도 열군데 정도가 거부되었지만 그것은 첩설처의 경우였고 李恒福·黃愼·尹煌·李恒·朴尙衷·李之菡·李穡 등 서인계 내지 서인이 존봉하는 인물에 대해서는 첩설처가 아니라 하여 사액이 내려지고 있어서 그 숫자는 모두 19개소(사우 포함)에 달하였다. 첩설불허의 정책으로 인하여 점차 사액을 받는 서원 제향자의 범위가 확대되는 것이 새로운 현상으로 지적될 수 있겠다.

 숙종 15년(1689) 기사환국 후 남인정권하에서의 서원정책도 이러한 면에서는 이전과 다를 바가 없어지만, 단 앞서 경신출척 때 서인의 공격으로 적지않은 被禍者를 내었기 때문에 이제 그들을 신원하고 표창한다는 뜻에서 서원건립이 이루어지고, 또 서인에 의해 거부되었던 남인계 서원에 대한 사액이 첩설불허라는 금령과 관계없이 다시 주어지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남인계의 산림으로 일컬어지며 경신년에 관작이 박탈되었던 허목을 제향하는 서원이 2∼3년 사이에 4개처나 건립과 동시에 사액되고 尹善道나 洪宇遠과 같이 유학자라고 보기는 어려운 인물이 禮訟 때 죄를 입었다는 사실로 입향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첩설처 사액불허라는 금령에 저촉되지 않기 위해 제향 대상의 범위를 확대시킨 데서 초래된 것이지만, 결과적으로 도학자여야 한다는 제향기준을 무너뜨려 후일 서원의 질적 저하를 유발하고 사우와의 구별을 모호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남인세력의 몰락과 서인 장기집권의 기반이 되었던 숙종 20년(1694) 갑술환국 이후의 조정의 대서원시책도 역시 마찬가지로, 환국에 따르는 집권명분 확립과 피화자의 신원이란 면에서 한편으로는 서원장려책이 진행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첩설과 남설, 그리고 서원폐에 대한 통제책의 마련이라는 일견 상반된 과정을 밟고 있었다. 전대 이래의 첩설금지책이 여전히 발효중임에도 불구하고 노론의 영수이고 학자이던 송시열을 제향하는 서원이 환국 후 1∼2년 사이에 이미 4개소나 창건되고 추향은 9여개소에 이르고 있으며, 숙종 말년까지는 26년간에 걸쳐 무려 20개소, 14개소가 각기 건립, 추배되고 있었다.0161)≪俎豆錄≫및≪列邑院宇事蹟≫에서 摘出. 송시열에 대한 제향이 이렇게 성행한 것은 물론 그 자신의 유학자로서의 위치도 있겠지만, 노론의 영수로서 기사년에 피화된 사실이 이 때 와서 신원의 의미를 지니고 나타난 것이 아닌가 하며, 물론 그 자체가 노론정권의 집권명분을 강화해주고 있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집권당의 정치적 이해를 반영한 조정의 이와 같은 특정 인물이나 執權黨系 피화인의 서원에 대한 우대와 장려책은 결과적으로 국가의 서원사건금령이나 첩설처 사액불허라는 통제책을 국가 스스로 무효화하고 동일 인물에 대한 첩설과 자격부족자까지도 입향케하는 남설(猥享) 현상을 유발, 결국 숙종 일대에 사액처만 131개소(사우 포함, 서원 명칭은 105개소), 창건처는 300여 개소(사우 포함, 숙종 45년에 상당수가 훼철되었으나 분명한 숫자를 알 수 없기에 개략적으로 표시함)라는 비정상적인 서원의 격증현상을 초래했다.

 한편 향촌 사림은 점차 벌열성과 폐쇄적 경향을 보이고0162)이는 숙종 초 이후 외척세의 대두가 현저하고 송시열 등의 산림이 이들과 결합해가는 과정에서 빚어진 현상이었다고 생각되며 특히 이에 대한 비판에서 少論黨의 성립이 비롯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鄭萬祚,<영조대 초반의 蕩平策과 蕩平波의 활동>,≪震檀學報≫56, 1983, 29·50쪽 참조). 있는 중앙의 권력구조와 연관을 맺어 출세와 향촌사회에서의 특전을 부여받고 사회적 지위의 향상을 꾀하고자 하였다. 이를테면 중앙관인의 정치적 욕구와 향촌 사림의 현실적 이익추구라는 이해관계가 서원이란 매개체를 통하여 일치하고 실현될 수 있었던 것이고 바로 그것이 첩설과 남설, 그리고 사액의 남발을 가져오게 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사적 이해관계에 의해 건립·운영되는 서원이 그 본래의 士子藏修라는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리라는 것은 기대할 수 없었다. 이제 서원은 祀賢의 기능만 남게 되었고 따라서 처음부터 향사를 목적으로 하였던 사우와 별다른 구별이 주어지지 않게 되었다. 숙종 20년(1694) 이후 서원장려책이 추진되면서도 전례 없이 조정에서의 서원대책 논의가 활발해지게 되는 것은 이제 서원문제가 더 이상 방치할 수만은 없는 심각한 단계에 접어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갑술환국 직후 좌의정 朴世采는 文廟從祀人과 大名賢을 제외하고는 일체 첩설을 불허할 것을 건의하였고, 이듬해 논의에서는 좌의정 柳尙運과 영의정 南九萬의 건의에 따라 조정의 허락을 받지 않은 私建書院에 대해서는 훼철할 것과, 이를 어기는 지방관은 논죄하기로 방침을 정하고 첩설처는 사액치 말 것을 정책으로 결정하였다.0163)≪書院謄錄≫권 3, 숙종 21년 6월 3일. 이후에도 때때로 첩설금령은 계속 신칙되었으나 종국적으로 유교를 폐기할 수 없는 한 서원 자체를 부정할 수 없다는 명분론을 앞세운 노론측의 송시열 서원건립운동 앞에 毁院까지 포함된 금령의 강력한 집행은 유명무실화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지금까지 장려책을 주장하던 노론계 일각에서 이에 동조하게 되는 숙종 29년 이후 비로소 적극성을 띠게 되었다. 즉 戚族으로 명망이 있던 閔鎭遠이 서원폐를 들어 私建時의 지방관에 대한 논죄와 수창유생에 대한 停擧를 요청했고 뒤이어 그의 형인 閔鎭厚가 예조판서가 됨에 첩설폐를 극론하고 請額疏를 받지 말 것을 건의하였다. 이어 숙종 33년 사헌부가 서원폐 근절 방법의 하나로 제시한 一處合享事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이는 난점이 많다고 하여 폐기하면서 그 대신 금지령을 어기고 사사로이 세운 곳에 대한 훼철을 다시 결정하고 말썽많은 피역문제와 관련, 院生에 대한 정례적인 考講을 시행토록 하였다. 그러나 이 때 결정된 훼철책이 실제로 집행되기 시작한 것은 7, 8년 지난 숙종 39년에 왕이 스스로 一切之法이 없기 때문에 첩설이 온다고 첩설금지를 하명(이를 癸巳受敎라 한다)하고 예조판서 민진후가 서원문제를 전담하면서부터였다. 이 때 그는 서원의 私建時의 논죄사항에 대해 이를 막지 못한 감사는 推考, 수령은 파직하며 수창유생은 3년간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게 하고, 일단 앞서 민진원이 사건에 대한 통제를 요구했던 숙종 29년(癸未)을 기준연도로 하여 이 해 이후의 不禀朝廷 私自創建한 곳의 조사를 각 도 감사에게 하명토록 건의,0164)≪承政院日記≫479책, 숙종 39년 7월 30일 을해. 왕이 이를 따름으로써 비로소 서원정리의 첫발을 내딪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듬해인 숙종 40년 평안도의 조사보고서가 올라 왔을때, 처음 민진후는 유보하자는 입장이었으나 좌의정 金昌集 등의 毁院 찬성에 따라 하나하나 심의, 金昌集과 민진후가 재고를 요청한 箕子書院 등 3개소만 남기고 일체 훼철케 하였다0165)≪肅宗實錄≫권 55, 숙종 40년 7월 경술·을묘.(이를 甲午定式이라 하며 영조 17년의 훼철시 기준연도가 됨). 이후 丙申處分으로 조정이 혼란함으로 인해 조사는 한때 중단되었다가 숙종 43년(1717) 역시 예조판서 민진후의 재촉0166)≪書院謄錄≫권 6, 숙종 43년 10월 10일.으로 甲午定式이 재천명되면서 각 도의 私建書院의 명단이 보고되고, 주로 왕과 민진후 사이의 심의에 따라 毁置가 결정되었다. 이 때 훼철이 결정된 수가 얼마나 되는지 분명치는 않으나 慶尙左道暗行御史別單에 보고된 것만 80여개이고 그 중 일부인 16개소에 대한 심의 결과, 민진후의 특청에 따라 거제와 長鬐의 송시열 서원 등 7개처는 남겨두고 나머지 안동의 金涌·權宇 등의 서원 등 9개소는 훼철토록 판정된 것을 보면 전국적으로 상당수에 달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이 때 毁置의 심사기준이 첩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제향자의 인물여하에 있었고, 그것도 공개적이 아닌 왕과 민진후 사이에서만 이루어졌던 관계상 객관적이고 공정하였다고 말하기 어려웠다. 수십 개소에 달하는 송시열을 제향하는 서원이 여전히 훼철대상에서 제외되고 있는 것은 이 때의 훼철책이 당파적 색채를 완전히 배제할 수 없었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경종대에 들어와 취하여진 서원정책은 辛丑獄으로 정권이 소론에게로 넘어가자 서원건립과 청액운동이 다시 고개를 들게 되어 국가의 毁院 대책은 원점으로 돌아가는 듯 하였다. 즉 우선 숙종 때 훼철되었던 李惟泰 서원의 재건과 사액을 요구하는 상소가 처음 나온 이래 崔錫鼎·李景奭·尹宣擧·尹拯·李世龜 등 소론계 인물을 제향하는 서원의 건립 허용과 사액을 청하는 향촌 유생의 상소가 산적하고 또 소론 내에서도 이들 인물을 포증해야 한다는 소리가 높아지게 된 것이다. 소론계 서원에 대한 장려가 있기에 앞서 당시의 소론 당로자들은 미결인채 남아 있는 숙종 때의 甲午定式에 대해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그 때 훼철이 결정되고서 아직 그 집행을 못한 곳도 있고, 또 禁令年度에 저촉되면서도 송시열 서원같이 제외되고 있는가 하면, 윤선거·윤증과 같이 소론계에서 존봉하는 인물의 서원은 훼철의 대상에 포함되고 있어, 소론으로서는 승복 못할 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일부 소론계에서는 차라리 훼철령의 보다 철저한 시행을 통해 금령을 어겼음에도 불구하고 특별한 예외조치로 제외되었던 노론계 서원까지 이 기회에 모두 훼철시키는 것이 낫지 않느냐는 방향으로 논의를 전개시켜 나가게 된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서원통제론자는 李明彦과 李眞儒였다. 숙종 말 嶺南暗行御史로서 사사로이 세운 서원을 조사하였던 이명언은, 경종 2년(1722) 동부승지로 입시한 자리에서 서원이 祀賢 위주로 성격이 변함에 따라 사우와 구별이 없어지게 되었다고 지적, 이런 결과를 초래한 요인으로 첩설과 남설의 폐단을 비난하였으며 求請이 금지되어야만 이런 폐단이 없어질 것0167)≪承政院日記≫544책, 경종 2년 9월 5일.이라고 하였다. 이어서 지금의 첩설처로는 송시열서원이 가장 많은데 그 인물이 적절치 않으니 이것부터 먼저 훼철할 것을 요구, 훼철론의 목표를 분명히 하였다. 이와 같은 정치적 목적을 지닌 노론계 서원 탄압책은 그러나 우의정 李光佐 등의 반대로 실현되지는 못하고 단지 副司果 李眞洙가 절충론으로 제시한 사액현판의 회수(撤額)로 낙착되어서 송시열서원은 華陽洞書院만 제외하고는 건립시기에 관계없이 모두 撤額되고 말았다.

 경종대의 서원시책은 이와 같이 노론계 서원에 대한 탄압을 목적으로 통제책이 강구되었지만 그러는 과정에서 첩설과 남설의 폐단이 여지없이 비판되었다. 특히 화양동서원에서부터 비롯된 지방관의 토지 획급과 경내의 大村을 점거하여(이를 書院村이라 함) 사실상 지배하다시피 하고 있는 비리 등, 지금까지 드러나고 있지 않던 서원의 병폐가 폭로되어 서원문제에 대한 일대 시정책이 요망된다는 여론의 공감대를 조성, 이것이 영조대에 들어가 대대적인 서원훼철을 단행케 하는 명분을 제공해 주었다는 데서 의의가 있다.

 이러한 서원시책은 영조대에 들어와서도 그 초기는 선대의 전철을 그대로 답습하였다. 乙巳換局으로 노론의 집권과 함께 앞서 경종대에 黜享된 노론계 인물이 모두 復享되며 철거되었던 현판도 다시 걸리고 송시열·權尙夏 등의 서원에 사액이 내려지게 되며 특히, 辛壬獄으로 피화하였던 노론 대신에 대한 신원과 함께 四忠書院이 세워지고 사액되었다. 그러나 이러는 과정에서도 앞서 경종대 드러난 서원폐단을 의식하여 첩설은 억제되고 그 시정책으로서 書院位田免稅에 관한 경종 초의 결정을 법제화하는 조처가 뒤따랐다. 그런데 영조대에 들어와 특이한 현상은 집권당인 노론의 소론계 서원에 대한 탄압 요구를 왕이 여러 가지 구실로 거부하고 있으며, 壬寅獄에 연루되어 죽임을 당한 노론계 인물의 사우를 세우려는 요구에 대해서도 신원이 꼭 享祀로만 나타날 필요는 없다고 물리치고, 상기한 老論四臣의 서원도 첩설을 비난하는 자리에서 왕의 발의로 한 곳에만 合享케 된 것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왕이 서원시책을 적극적으로 주도하고 있다는 사실이며 이는 전대에서 볼 수 없었던 현상이었다. 이것은 서원정책이 탕평책의 일환으로 운영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서원훼철에 대한 영조의 관심이 주어지기는 동왕 3년(1727) 修撰 趙鎭禧가 서원이 藏修의 실효는 없으면서 양민을 冒入, 逋逃之藪(良役弊 誘發要因)가 되어 민폐만 끼치고 있다고 서원폐를 지적하며 첩설처에 대해 조사를 청한 데서부터였다.0168)≪承政院日記≫651책, 영조 3년 12월 11일. 이에 왕은 文勝의 폐를 경계하면서 조사되는 대로 훼철하도록 하명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5월 경연에서 參贊官 趙德隣과 檢討官 申致謹이, 서원 첩설이 당론의 격화 때문에 온 현상임을 지적, 서원이 장수처로서의 기능은 이미 상실하고 편론의 쟁투장으로 변해버렸으며, 그러다보니 권세있는 집안이 그 선조를 드러내고, 향촌士子의 拔身하는 도구로 이용될 뿐이라고 극론하자 왕도 이를 긍정하고 앞으로 어떤 請額도 일체 이를 받아들이지 말도록 신칙하였다. 조진희와 신치근이 거론한 서원폐, 즉 逋逃之藪요, 당론의 소굴이라는 지적은 대체로 서원문제에 관한 소론의 공통된 의견이었는데, 이것은 영조 5년(1729)부터 경연에 입시하여 영조의 時務觀에 큰 영향을 주었던 梁得中의 書院虛僞說과 함께 영조의 서원관을 부정적으로 이끄는데 결정적인 방향을 미쳤던 것으로 생각된다.

 영조의 탕평책은 동왕 5년에 들어와 趙文命·宋寅明·趙顯命 등의 탕평파가 형성되고 여기에 洪致中·李台佐·李土集·金在魯 등 노·소론의 緩論者가 가담, 소위 탕평정권을 형성하면서 본 궤도에 오르는데, 그 특징은 정치의 안정을 위해 노·소론간의 시비의 초점이던 辛壬獄에 대한 충역 문제를 절충하여 老·少合仕를 유지하는 한편, 이를 깨트릴 일체의 분쟁적 요소를 미연에 방지하는데 주력하자는 것이었다. 탕평파의 이러한 입장에서 볼 때 각 당파의 집권명분과 신원의 의미를 지닌, 도학자나 피화인의 제향처로서의 서원은, 그 만큼 각 당파의 인물시비를 야기할 위험을 지닌 요소였고, 또 이는 숙종·경종대의 정치적 분쟁을 통해 사실로 이미 증명된 바였다. 그러므로 탕평파의 경우 서원문제가 분쟁적 요소로 확대되는 것을 극히 경계하였다. 영조 5년에 앞서 조진희의 건의에 따라 하명되었던 각도 서원의 疊設處에 대한 보고가 올라오자, 일체 훼철론을 펴는 왕에게 분쟁의 우려를 들어 撤額이란 완화책을 건의하고, 또 송시열·윤증 서원 등 노·소의 이해가 상충하는 서원은 거기에서도 제외시킨 것은 바로 이러한 의도에서 였다.

 영조 14년 일부의 안동사람들이 노론계의 지원을 받아 金尙憲書院을 세우려다, 이를 방해하고 끝내 毁院하여 버린 남인과 충돌한 사건은 서원문제에 대한 경각심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이에 대해 탕평파는 훼원에 가담한 자를 처벌함과 동시에 재건을 불허하는 兩治兩解의 방법을 건의하였고, 왕 또한 이를 계기로 자신의 治世 원년(乙巳年) 이후 그 때까지 창건된 서원에 관한 조사를 각 도에 분부, 창건 당시의 지방관과 수창유생에 대한 처벌을 시도하였다.

 영조 17년에 단행된 私建서원에 대한 일체의 훼철책은 한 해 전인 영조 16년에 단행된 庚申處分이라는 정치적 사건을 배경으로 하였던 데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 때 왕은 그 때까지 逆으로 단정하던 壬寅獄을 誣獄으로 판정, 被罪者를 신원시켜 노론측 명분에 승리를 안겨주면서도 정치적 보복은 일체 용인하지 않고, 그 때까지 취해오던 탕평책도 변함없이 추구되어야 할 것임을 재강조하였다. 이러던 차에 함경도 북청의 李恒福 제향서원에 李光佐追配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광좌는 소론의 영수로서 노론은 그를 戊申亂의 逆魁로까지 몰아 공격하였던 만큼, 그가 비록 그 先祖의 서원이라 하더라도 사액이 내려진 서원에 조정의 승인을 받지 않고 제향되었다는 사실은 노론의 배척을 불러일으키기에 족하였다. 실제로도 追配사실이 알려진 직후 노론계인 예조판서 徐宗伋이 맨 먼저 이를 맹렬히 비난하고 나와 장차 노·소론간에 이광좌 인물시비를 놓고 분쟁이 크게 일어날 조짐이 보였다. 이에 왕은 金在魯·宋寅明·趙顯命 등 탕평파의 건의를 받아들여 숙종 40년(1714)의 甲午定式 이후 그 때까지 사건된 모든 서원·사우에 대한 일체 훼철을 하명하였다. 훼철의 동기가 당쟁적 요소를 미연에 방지하는데 있었으니 만큼, 훼철에 임해서도 편파적인 혐의를 받지 않기 위하여 일체의 예외조항을 두지 않고 중앙에서 훼원감독자까지 파견하여 대상이 되는 것은 모두 훼철하였다. 이 때 훼철된 것은 대개 170여개소로 말해지고 있으며 지방관에 대한 유배까지 규정한 벌칙을 강화, 향후 私建의 여지를 남겨 놓지 않았다. 결국 이러한 조처로 서원의 첩설과 남설이란 큰 폐단은 일단 가라앉았다.

 그렇지만 이 훼철조치는 서원이 불러일으키는 사회적 병폐까지를 척결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유교이념을 폐기할 수 없는 한 서원이 부정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을 뿐 아니라, 당쟁적 요소의 제거가 애초의 목적이었으니만큼 거기까지는 힘이 미칠 수 없었던 것으로, 영조 탕평책의 성과와 한계를 이 곳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서원의 사회적 병폐는 여전하였고 이제는 정치적 요소가 제거된 대신 후손의 서원관여가 현저해져 猥享은 물론이고 향촌민에게 미치는 사회적 폐단은 전일에 비할 바가 아니었으며, 이것이 19세기 이후의 세도정치하에서 더욱 조장됨으로써 결국은 대원군에 의한 대대적인 서원철폐를 맞이하게 된다고 볼 수 있다.

<鄭萬祚>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