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1. 예학의 발달
  • 1) 가례의 연구와 집성
  • (3)≪주가가례≫연구의 심화

(3)≪주가가례≫연구의 심화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전반에 걸쳐 일어났던 양란은 조선사회에 적지않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임진왜란은 사회경제적으로 많은 피해를 주었으며 병자호란은 사상적으로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그리하여 당시 학인들은 理氣心性論 등 철학적인 문제보다는 禮論이나 反淸論·北伐論 등 의리명분적인 면과 大同法·號牌法·戶布論·良役變通論 등 사회경제적인 면에 더 관심을 기울이면서 전란의 후유증을 극복해나가려고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는 사상적으로 뿐만 아니라 전란으로 인해 무너진 질서를 새로 회복하기 위한 실천적인 방도로서, 상품유통경제의 발달과 국제무역의 증가 등 사회경제적 변화로 인해 동요하는 사회에 대응해야 하는 필요성에서 이전 시기보다 더욱 강조되었다. 張顯光이 “禮治면 다스려지고 가르치는 것은 禮敎보다 앞서는 것이 없으며 학문은 禮學보다 간절한 것이 없다”고0329)張顯光,≪旅軒集≫권 10, 五先生禮說跋. 한 말은 바로 당시 예의 역할과 중요성을 잘 나타내준다고 할 수 있다. 17세기에 들어와 예서가 16세기보다 상대적으로 많이 저술되는 것도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16세기 예학의 흐름은≪국조오례의≫나 漢唐禮를 비판하고 고례와 주자가례의 내용을 중시하는 것이었으며, 예서 역시 주자가례의 체제를 기본으로 하면서 보완하거나 약간의 변화를 주는 것이었다. 당시 고례와 주자가례가 같이 강조된 것은 학자들의 예학에 대한 이해 수준이 높지 않아 양자의 내용을 구분하지 않고 거의 같은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즉 주자가례의 내용을 고례와 거의 같은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주자가례와 고례인 三禮에 대한 연구가 심화되고 경서비판의 과정을 거치면서 주자가례와 고례의 차이점이 점차 인식되고, 고례 속에서도≪예기≫와≪의례≫에 대한 차이가 인식되면서 그 속에서 어느 것을 더 중시하는가에 따라 학파나 학자들의 예설도 차이가 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한백겸처럼 고례와 六經에 기반한 예설을 강조하는 흐름이 새로이 나타나기 시작하였으며, 李恒福은≪예기≫를 四禮의 체제로 정리한≪四禮訓蒙≫을, 金尙憲은 禮記註釋書인≪讀禮隨鈔≫를 저술하기도 하였다. 또한 정구는 주자의≪의례경전통해≫를 모범으로 하고 고례를 참작하여 家·鄕·邦國·王朝禮를 복원한≪五先生禮說分類≫를 저술하였다.

 이는 서경덕·조식학파가 정권을 주도하며 사상적으로 주자성리학뿐만 아니라 양명학·노장사상·불교·북송유학적인 요소가 대두하여 다양한 사상풍토를 이루고 있었으며,0330)韓永愚,<李睟光의 學問과 思想>(≪韓國文化≫13, 1992). 私統을 강조하고 天子의 禮인 郊祭를 행하는 등 왕실전례를 적극적으로 행함으로써 왕실의 권위를 높이려고 했던 광해군대의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었다.0331)高英津,<17세기 초 禮學의 새로운 흐름-韓百謙과 鄭逑의 禮說을 중심으로->(≪韓國學報≫68, 일지사, 1992).

 예학의 새로운 흐름이 대두하는 가운데 주자가례에 대한 연구도 심화되었다. 이미 16세기 말 김장생과 신식에 의해 일차적으로 정리된 주자가례 연구는 17세기에 들어오면 기본 틀은 벗어나지 않으나 체제나 내용에서 조금씩 변화를 가져와 가례주석서나 언해서와 다른 家禮問答書 형태의 예서가 많이 저술되었다. 즉 문인들과 예에 관해 교환했던 서찰의 내용들을 주자가례의 체제·항목에 따라 편집한 경우로 김장생의≪疑禮問解≫, 姜碩期의≪疑禮問解≫, 金集의≪疑禮問解續≫, 金應祖의≪四禮問答≫등이 17세기 전반의 대표적인 가례문답서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의 예서를 참조하지 않고 문인들과의 서신 내용만 가지고 예서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에서 당시 대부분의 학인들이 예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서로 활발한 의견교환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0332)朴世采,≪南溪先生禮說≫ 序. 또한 서신에 체계없이 실려 있는 내용들을 검토하여 항목에 따라 분류해서 편찬할 수 있다는 것은 예학의 수준이 높아져 이제 예에 관한 것이면 어떠한 자료도 이해하여 체계화할 수 있음을 의미하였다.

 가례문답서의 저자는 대부분 당시 학계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0333)이러한 특징은 17세기 후반에 저술되는 가례문답서인 宋時烈의≪尤庵經禮問答≫과≪尤庵先生禮說≫, 朴世采의≪南溪先生禮說≫, 尹拯의≪明齋先生疑禮問答≫등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는 학파에 따라 예학이 정리되기 시작하였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그리하여 이 시기에 오면 예학이 학파와 밀접한 연관을 가지게 되면서 같은 주자가례를 연구하면서도 다른 학파의 예설이나 예서를 배제하는 경향도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安㺬의≪家禮附贅≫의 경우 주자가례를 주석하면서 중국의 예서·예설을 제외하면 安璐의≪竹溪雜儀≫, 安餘慶의≪玉川先生禮說≫, 이황의≪퇴계상제례답문≫등의 예서와 정구·曺好益·金就礪 등 주로 이황 계통의 학자들의 예설을 인용하였다.0334)고영진, 앞의 책, 300∼308쪽.

 나아가 김응조의≪사례문답≫은 주자·이황·유성룡·정구·장현광의 서찰에서 예에 관련있는 부분을 四禮의 체제로 다시 편집하여 완성한 것으로, 근본적인 목적은 서신에 산만하게 널려있는 이황학파 학자들의 예설을 하나의 체제 속에 체계적으로 정리하려는 것이었다.0335)高英津,<17세기 전반 남인학자의 사상-정경세·김응조를 중심으로->(≪역사와 현실≫8, 한국역사연구회, 1992), 107∼111쪽. 이이학파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학파에 따른 예학의 차이는 17세기 전례논쟁에서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元宗追崇을 둘러싼 인조대 전례논쟁은 선조·광해군대의 전례논쟁을 계승하고 그 대립구조 역시 비슷하였으나 이전보다 훨씬 논리적이고 수준이 높았다. 이는 기본적으로는 王統과 私統이 일치되지 않은 상황에서 王禮에 私禮를 적용하려는 데서 일어난 대립이었다. 그리고 구체적인 대립은 종법에 대한 견해와 경서비판에서였다.

 崔鳴吉·朴知誡 등 추숭론자들은 사통을 강조하는 입장에서 稱考論과 3년설을 주장하면서 원종추숭에 찬성한 반면, 이황학파의 鄭經世와 趙翼·許穆 등은 왕통과 사통을 같이 중시하는 입장에서 稱考論과 不杖期說을 주장하면서 추숭에 반대하였으며, 이이학파의 김장생 등은 종법의 철저한 실현을 추구하고 왕통을 사통에 우선하는 입장에서 稱叔論과 부장기설을 주장하며 역시 추숭에 반대하였다. 한편 경서비판의 측면을 보면 추숭반대론자들은 주자가례와≪의례≫·≪綱目≫등에 의거하여 王士同禮를 주장하였으며, 추숭론자들은 박지계같은 예외도 있지만 주로 漢唐 이후의 例와≪예기≫에 의거해서 王士不同禮를 주장하였다.0336)기존의 연구에서는 대부분 天下同禮·王士庶同禮, 王者禮不同士庶·王士庶不同禮라는 개념을 사용하였는데 이는 전근대사회에서의 예학의 계급적 한계, 나아가 사상적 한계를 모호하게 하는 문제가 있다. 전근대사회에서의 예학은 기본적으로 왕실과 사족을 중심으로 하는 것으로 평민·천인까지 대상으로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는 王士同禮·不同禮가 당시의 사실을 더 정확하게 반영한다고 생각되어 사용하였다.

 인조대 전례논쟁에서 드러난 학파에 따른 예론의 차이는 17세기 중·후반에 일어나는 1·2차 禮訟에서 더욱 뚜렸이 나타났다. 1659년 죽은 효종에 대해서 인조의 계비였던 慈懿大妃가 어떤 상복을 입을 것인가를 둘러싸고 대립하였던 예송에서 서경덕·조식학파 계통의 허목·尹鑴·尹善道 등은 六經과≪예기≫에 입각해서 왕가의 특수성과 왕사부동례를 강조하며 3년설을 주장하고 여기에 洪汝河 등 영남 이황학파가 동조하였다.0337)현종 7년(1666) 영남유생 柳世哲 등 1000여 인이 올린 服制上疏는 홍여하가 대신 써준 것이다(洪汝河,≪木齋集≫권 4, 議禮疏 丙午代本道儒生作). 이이학파의 宋時烈·宋浚吉 등은 주자가례와≪의례≫에 입각하여 종법의 철저한 구현과 왕사동례를 강조하여 期年說을 주장하였다.

 예송 과정에서 양파가 주로≪의례≫의 註疏 내용을 근거로 논쟁을 벌였으나 강조하는 내용은 달랐다. 그것은≪의례≫가 王禮를 강조하는 면과 士禮를 강조하는 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1674년에 죽은 효종비 仁宣王后에 대해서 역시 자의대비가 어떤 상복을 입을 것인가가 쟁점이 되었던 2차 예송에서도 金錫冑 등이 개입하지만 전체적인 대립구도와 성격은 마찬가지였다.

 1·2차 예송은 조선 중기 전례논쟁의 정점이었다. 예송은 기본적으로 이전 시기의 전례논쟁을 계승하는 것이기도 하였으나 그 성격은 달랐다. 성리학과 예학의 심화, 친가·적장자 중심의 가족제도로의 변화, 학파와 붕당간의 연관, 臣權의 성장, 국가재건의 방법 차이 등 당시 정치·사상적인 면뿐만 아니라 사회 모든 분야의 요인들이 종합적으로 결합되어 왕실의 전례문제를 매개로 하여 표출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송을 권력투쟁0338)李成茂,<17世紀 禮論과 黨爭>(≪朝鮮後期 黨爭의 綜合的 檢討≫,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92). 또는 이념논쟁0339)池斗煥,<朝鮮後期 禮訟硏究>(≪釜大史學≫11, 1987). 일변도로 보거나 학파·붕당과 상관없는 것으로 보는 데에는0340)李迎春,<第一次禮訟과 尹善道의 禮論>(≪淸溪史學≫6, 1989).
―――,<服制禮訟과 政局變動-第二次禮訟을 中心으로-)(≪國史館論叢≫22, 1991).
문제가 없지 않다. 예송은 결국 17세기 사회에서 각 학파 내지 붕당들이 나름대로의 학문적 기반 위에서 자신들이 주장하는 정책이나 노선의 정당성을 주장한 전형적인 ‘정치형태로서의 전례논쟁’이었던 것이다.0341)고영진,<17세기후반 근기남인학자의 사상-윤휴·허목·허적을 중심으로->(≪역사와 현실≫13, 1994), 173∼178쪽.
최근에 이봉규는 죽은 사람과 喪主 사이의 사회적 관계에서 혈연적 또는 신분적 관계들을 어떻게 규정해야 하는지를 두고 벌인 논쟁으로 이해하고 예론과 이기론이 직접적으로 상관관계가 없음을 주장하였다(이봉규,<예송의 철학적 분석에 대한 재검토>,≪大東文化硏究≫31, 성균관대, 1996, 참조).
예송에서의 사상적 차이는 결국 중세사회체제에 대한 관점의 차이로 연결되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예송은 조선 후기 사회체제가 변화해가는 상황에서 반드시 겪어야만 했던 하나의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예학의 심화에 힘입어 발달하였던 이 시기의 전례논쟁은 역으로 예학연구에도 영향을 미쳤다. 현안으로 대두되었던 왕실전례문제에 대해 각 학파나 학인들은 자신들의 학문적 입장을 정리하여야 했으며 자신들의 예학체계 속에서 국가전례를 다루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므로 당시 학인들의 문집에는 대부분 전례문제에 대한 글들이 들어있었으며 김장생은 전례논쟁에 대해 학자들과 서로 주고받은 서신과 자신의 주장을 담은≪典禮問答≫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또한 직접 전례논쟁을 다루지 않더라도 예서를 저술하는 데 王禮와 士禮를 하나의 체제 속에서 다루려는 경향도 나타났다. 兪棨는 가례주석서인≪家禮源流≫를 저술하면서 天子·諸侯禮를 四禮의 체제로 정리하여 주석을 단≪家禮源流續錄≫을 편말에 덧붙여 저술하였으며, 김집은 王禮인≪국조오례의≫와 古禮이면서 士禮의 성격이 강한≪의례≫를 비교한≪古今喪禮異同議≫를,0342)韓基範,≪沙溪 金長生과 愼獨齋 金集의 禮思想硏究≫(忠南大 博士學位論文, 1991). 朴世采는≪오선생예설분류≫의 체제를 계승·발전시켜 天子禮와 士大夫禮를 각각 관례·혼례·상례·제례·鄕禮·相見禮·雜禮 등으로 나누어 설명한≪六禮疑輯≫을 저술하였으며, 박세채의 문인인 金榦이 편집한≪南溪先生禮說≫은 四禮를 중심으로 하면서 書院과 王朝禮를 첨가하여 다루고 있다.0343)박세채는 이외에도 가례주석서인≪家禮要解≫와 관·혼·제례의 시행에 필요한 내용들을 주로 담은≪三禮儀≫등을 저술하였다. 尹拯과 그의 문인들이 주고받은 서신을 편집한≪明齋先生禮說≫에서도 王家禮 항목을 넣어 다루고 있다.

 이와는 달리 서경덕·조식 계통의 허목은 이황·이이학파에서는 漢代의 저술로 의심한≪예기≫를 古經으로 보고 고례인 三禮 중에서 1,000여 조를 채록하여≪經禮類纂≫을 저술하였으며,0344)鄭玉子,<眉叟 許穆 硏究>(≪韓國史論≫5, 서울大, 1979), 204∼212쪽. 윤휴도≪주례≫와≪예기≫에 관한 글을 저술하면서 특히≪주례≫를 강조하였으며 아울러 순자의 예설을 받아들이고 있다.0345)鄭仁在,<尹白湖의 禮論과 倫理思想>(≪現代社會와 倫理≫,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연구총서 82-4, 1982).
고영진, 앞의 글(1994), 175∼176쪽.
박세채의 문인이었던 崔錫鼎은 예기주석서인≪禮記類篇≫을 저술하였으나 주자의 해석과 다른 점이 많다고 하여 노론의 공격을 받기도 하였다.

 전체적으로 이이 계통의 서인·노론과 성혼·김상헌 계통의 소론학자들은≪의례≫와 주자가례를 모범으로 삼으면서 가·향·방국·왕조례를 복원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노론은 주로 士禮의 입장에서 王禮를 흡수하여 왕사동례를 주장하였으며 소론은 사례와 왕례를 균형있게 보면서 왕사부동례를 주장하는 경향이 더 강하였다. 이에 반하여 서경덕·조식 계통의 기호남인들과 최석정 등 일부 소론들은≪주례≫·≪예기≫ 등 고례를 기반으로 하여 왕사부동례를 강조하였다. 이는 결국 17세기 중·후반 고례와 주자가례에 대한 이해가 더욱 심화되었음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조선 중기 예학의 발달과 예론의 활발함은 성리학의 보편적 원리인 천리를 사회에 구현하고 인욕을 제거한다는 면에서는 역사적으로 긍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예는 지배층 내부의 권력투쟁과 대민지배로서 기능하는 면이 없지 않으며, 구체적으로 민의 삶을 향상시키는 것과는 연관이 적었다는 한계점도 동시에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예 서 저 자 저술년도 권:책 도서번호 문 집
소 재
현존
유무
기 타
祭禮 李賢輔
(1467-1555)
1547 4쪽   聾巖集 ≪酒禮≫속에 附
奉先雜儀 李彦迪
(1491-1553)
1550 1책 奎)3073    
家禮考誤 金麟厚
(1510-1560)
1550년대 2쪽   河西集  
(?)未詳 李仲虎
(1521-1554)
1550년대
(?)
       
退溪喪祭
禮答問
李 滉
(1501-1570)
1560년대 2책 奎)4318   李滉 사후 趙振에
의해 편집
疑問 金就礪(?) 1560년대
(?)
       
士喪禮節
曺 植
(1501-1572)
1560년대
(?)
       
朱門問禮 辛應時
(1532-1585)
1570        
家禮註解 李德弘
(1541-1596)
1570년
전후(?)
1:1   艮齋集  
家禮講錄 金 隆
(1549-1594)
1570 1:1   勿巖集  
家禮輯覽
補註
鄭 逑
(1543-1620)
1573        
冠昏撮要 朴而章
(1547-1622)
1576        
祭儀鈔 李 珥
(1536-1584)
1577 13쪽   栗谷
全書
≪擊蒙要訣≫에 附
昏儀 鄭 逑 1579        
家禮考證 邊以中
(1546-1611)
1579 4권      
禮解 朴汝龍
(1541-1611)
1579        
行祀儀節 宋麒壽
(1507-1581)
1570년대
(?)
3쪽   秋坡集 ‘祭禮遺敎’와 같이
구성
家儀 宋 寅
(1516-1584)
1570년대
(?)
      ‘家令’을 의미하는
것 같음
喪禮問答 具鳳齡
(1526-1586)
1570년대
(?)
4쪽   栢潭集  
四禮集說 朴枝華
(1513-1592)
1570년대
(?)
       
追遠雜儀 柳雲龍
(1539-1601)
1580년
전후(?)
8쪽   謙菴集  
冠儀 鄭 逑 1582        
家禮疑義 趙 穆
(1524-1606)
1580년대
(?)
2쪽   月川集 임진왜란으로 대부
분 散失
雜儀輯錄 權好文
(1532-1587)
1580년대
(?)
1권   松巖集  
疑禮問答 金宇顒
(1540-1604)
1570·80
년대(?)
       
四禮要解 姜 濂
(1544-1606)
1580년대
(?)
      임진왜란으로 산실
喪禮考證 金誠一
(1538-1593)
1581 1:1   鶴峯先
生逸稿
 
講禮答問 禹伏龍
(1547-1613)
1582        
喪禮抄 劉希慶
(1545-1635)
1580년대
(?)
       
喪禮備要
申義慶
(1557-1647)
1580년대
(?)
1책 藏)1-118    
喪禮備要 申義慶 1583 2책 奎)1258 沙溪
全書
 
  金長生
(1548-1631)
           
喪禮抄 李廷馣
(1541-1600)
1584(?)        
禮經要語 安餘慶
(1538-1592)
1580년대
(?)
1책   玉川
文集
≪玉川先生禮說≫이
異名
奉先諸規 金誠一 1587 3쪽   鶴峯集  
家禮箚錄 李愼儀
(1551-1627)
1587 1권   石灘集  
禮說總論 申 渚
(1544-1589)
1580년대
(?)
       
儀禮刪註 許 封
(1551-1588)
1580년대
(?)
       
喪祭雜儀 沈守慶
(1516-1599)
1580·90
년대(?)
       
喪祭禮 安 璐
(?)
선조대(?)       安處謙(1486-1521)
의 아들
竹溪雜儀 安 璐 선조대(?)        
表祭雜儀 安 璐 선조대(?)        
家禮註說 宋翼弼
(1534-1599)
1590년대
(?)
3:2 奎)4076 龜峯集  
家禮諺解 申 湜
(1551-1623)
1590년대
(?)
10:4 가람)古181.1-Si
62gy-v. 1,2,3,4
 
家禮輯覽 金長生 1599 10:6 奎)6913 沙溪
全集
 
冠儀 張顯光
(1554-1637)
1590년대
(?)
13쪽   旅軒集  
婚儀 張顯光 1590년대
(?)
11쪽   旅軒集  
喪禮考證 柳成龍
(1542-1607)
1602 3:1 奎)11717   하권의 祥 이하
부분은 散失
喪葬質疑 柳成龍 1600년대
전후(?)
7쪽   西厓集  
五先生禮
說分類
鄭 逑 1603 12:7 奎)969 寒岡
全集
 
居喪大節 趙任道
(1585-1664)
1607        
深衣說 韓百謙
(1552-1615)
1610년
전후(?)
13쪽   久菴
遺稿
深衣圖도 포함
家禮僭疑 權得己
(1570-1622)
1610 1권 奎)5531 晩悔集  
家禮考證 曹好益
(1545-1609)
1609 7:3 奎)717   7권(喪禮成服 이하)
은 문인들이 1646년
에 정리·완성함
家禮考義 裵龍吉
(1556-1609)
1600년
전후(?)
    琴易
堂集
 
深衣製造
鄭 逑 1610 11쪽   寒岡集  
聱漢孫先
生禮解
孫起陽
(1559-1617)
1610년
전후(?)
       
四禮訓蒙 李恒福
(1556-1618)
1614 1책 國)한-29-78    
禮記喪禮
分類
鄭 逑 1615        
五服沿革
鄭 逑 1617 1책 奎11634    
讀禮隨鈔 金尙憲
(1570-1652)
1618 4:4 奎)4265    
疑禮問解 李厚慶
(1558-1630)
1618 2권   畏齋集  
疑禮考證 申 湜 1600·10년
대(?)
       
家禮剝解 李 芬
(1566-1619)
1610년대
(?)
       
邦禮類編 李 芬 1610년대
(?)
       
奉先抄儀 趙任道 1621        
家禮附贅 安 㺬
(1569-1648)
1628 8:4 奎)5569    
  安鼎福
(1712-1791)
1758 6:1 國)한-29-18   ≪家禮附贅≫의 교정
·보완
儀禮考覽 申 渫
(1560-1631)
1610·20년
대(?)
       
喪禮通載 申 渫 1610·20년
대(?)
       
五服通考 申 渫 1610·20년
대(?)
       
禮說 李得胤
(1553-1630)
1610·20년
대(?)
9쪽   西溪集  
疑禮問解 金長生 1620년대
(?)
4:4 奎)4117 沙溪
全集
 
典禮問答 金長生 1620·30년
대(?)
2:1   沙溪
全書
 
疑禮問解 姜碩期
(1580-1643)
1638 1책 藏)1-91 月塘集  
家禮源流 兪 棨
(1607-1664)
1638 14:8 奎)1633    
家禮源流 尹宣擧
(1610-1669)
1642 18:10 國)한-29-55   ≪家禮源流本末≫이
부록
疑禮問解
金 集
(1574-1656)
1643 1책 奎)5731 愼獨齋
遺稿
 
家禮源流
續錄
兪 棨 1643 2:1 奎)1634    
家禮鄕宜 趙 翼
(1579-1655)
1644 7:2 國)한-29-34    
四禮問答 金應祖
(1587-1667)
1645 4:2 國)한-29-46    
古今喪禮
異同議
金 集 1649 4:2 奎)5371 愼獨齋
遺稿
 
經禮類纂 許 穆
(1595-1682)
1649 5:4 奎)12300    
家禮補解 沈光洙
(1598-1662)
1654        
儀禮經傳
喪服考證
洪汝河
(1628-1682)
1666 1책   木齋集  
四禮纂說 李 爀(?) 1660년대 8:4 奎)4418    
尤庵經禮
問答
宋時烈
(1609-1689)
1670·80년
대(?)
11:5 藏)1-82 尤庵先
生文集
 
尤庵先生
禮說
宋時烈 1670·80년
대(?)
1책 想白)古181.254
-So58
 
四禮笏記 李維泰
(1607-1684)
1670년대
(?)
1책 古)1170-1 草蘆
全集
 
家禮要解 朴世采
(1631-1695)
1683 7:1 國)고-159-7    
六禮疑輯 朴世采 1680년대
(?)
33:14 奎)1162    
三禮儀 朴世采 1689 3:1 奎)6991   ≪改葬儀≫가 부록
南溪先生
禮說
朴世采 1680·90년
대(?)
20:10 國)한-29-23   死後 문인 金榦이
편집
禮記類編 崔錫鼎
(1646-1715)
1693 18:5 古)1325-27    
明齋先生
疑禮問答
尹 拯
(1629-1714)
1690·
1700년대(?)
8:4 奎)4718    
寒水齋先
生禮說
權尙夏
(1641-1721)
1700·10년
대(?)
1책 藏)1-99    
禮說 張 瑠
(1649-1724)
1700·10년
대(?)
1권   安齋集  
四禮策題 張 瑠 1700·10년
대(?)
1권   安齋集  
祭儀 張 瑠 1700·10년
대(?)
1권   安齋集  
儀禮集說 張 瑠 1700·10년
대(?)
       
喪禮要覽 張 瑠 1721        

<부표>조선 중기 예서 목록(16세기 중반∼17세기)

<高英津>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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