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Ⅳ. 학문과 종교
  • 1. 성리학의 발달
  • 2) 이기철학의 발달과 전승

2) 이기철학의 발달과 전승

 중종대 기묘사림의 성리학 진작에 힘입어 성리학이 이론적 차원에서 정리되기 시작한 것은 회재 이언적과 화담 서경덕에 와서이다. 이들은 여러 면에서 대비되는데, 학문적인 면에서만 말한다면 회재가 영남학파의 조종인 퇴계의 성리학에 영향을 미친데 반해 화담은 기호학파의 조종인 율곡의 성리학에 적지않은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다. 따라서 회재와 화담에 대한 퇴계와 율곡의 평가도 어긋나게 된다. 퇴계가 화담에 대해서 “(理의 의미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견해가 정밀하지 못하고 그 학설에 병통이 없는 부분이 없다”0526)李 滉,≪退溪全書≫권 25, 答鄭子中講目.고 하며 주자학적 입장에서 화담의 기일원론적 성리학을 폄하한 반면 율곡은 화담의 학설에 병통이 있기는 하나 스스로 탐구한 독창적인 학설로 理氣不相離라는 성리학의 묘처를 터득한 것이라고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런데 회재에 대해서는 율곡이 출처에 의심할 점이 있다 하며 문묘배향을 반대한 반면 퇴계는 회재가 異端邪說을 물리치고 유학의 본원을 천명한 入言垂後의 공이 있다고 칭송하고 회재를 金宏弼·鄭汝昌·趙光祖와 더불어 東方四賢에 넣고 있다. 이러한 퇴계와 율곡의 서로 상반된 평가만 보더라도 회재와 화담이 조선성리학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의 크기와 소위 主理, 主氣로 일컫는 조선성리학의 양대 조류가 전승되어간 경로를 대충은 짐작할 수 있겠다.

 화담 서경덕은 정도전, 김시습 이래 조선 전기 성리학에서 주로 불교비판을 위해 연구되었던 氣論을 정리하여 성리학적 우주론의 체계를 일단락지은 중기 성리학의 선구자이다. 화담은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처사로 지내면서 개성 화담에 은거하여 독서와 사색으로 일생을 보냈다. 특별한 사승관계는 없었고 학문적인 영향은 저술을 통하여 張橫渠와 邵康節을 사숙한 정도이다. 그래서 화담은 장횡거의 一氣長存說에 소강절의 先天說을 융합하여 나름대로의 우주론체계를 세웠다. 湛一淸虛, 淡然虛靜한 근원적 一氣가 존재하는 모든 것의 근원이며 현상세계의 생성변화는 氣의 聚散, 昇降, 浮沈, 動靜(이 모든 운동은 결국 음양의 운동에 귀착된다)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화담은 대체로 장횡거의 설을 취하고 있다. 여기서부터 화담의 독창적인 학설이 전개되는데 우선 화담은 본체로서의 기와 현상에서의 기를 先天과 後天으로 나누고 선천을 太極이 내재된 太虛의 기라고 했다.0527)정원재,≪서경덕과 그 학파의 선천학설≫(≪철학논구≫18, 서울대, 1990), 22쪽. 선천의 기는 사물의 본체인 동시에 만상에 일관해 있는 실재로 이 선천일기의 운동변화에 의해 후천의 현상세계가 전개되는데, 이 때 다른 어떤 원리나 실재가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선천일기에 내재된 힘에 의해 스스로 움직이므로 機自爾라고 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따라서 화담에 있어서의 理는 기가 스스로 움직일 때 그 바름을 잃지 않는 것, 즉 기에 내재된 기의 조리에 불과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생성된 현상세계의 존재자들은 기가 흩어짐으로 소멸되지만 흩어진 기는 다시 태허 즉 선천으로 돌아간다. 이로써 선천은 후천세계의 생성과 복귀의 근원으로 간주되는데 화담은 이 과정을 易의 원리와 부합시켜 설명하고 있다. 우주론에 있어서만이 아니라 인간의 삶과 죽음, 사후의 존재에 관해서도 기의 취산굴신으로 설명함으로써 도교의 무와 불교의 영혼불멸론을 극복했다고 자임하고 있다. 이러한 화담의 우주론과 인간관은 기의 운동으로 일관되게 설명되고 있어 그 자체만 보면 가치가 배제된 기계론적 우주론이 되겠지만 화담은 선천일기의 성격에 도덕성을 부여함으로써 다른 성리학자들과 마찬가지로 도덕적 우주론을 지향한다. 화담은 “그 자연진실함을 誠이라 하고 그것이 약동하여 유행함을 道라고 한다”0528)徐敬德,≪花潭集≫, 原理氣.라고 하여 선천에 성, 후천에 도라는 유가의 전통적 덕목을 부과하고 있다. 이렇게 선천의 기에 가치를 부과함으로써 수기의 형이상학적 근거를 마련하기는 했으나 기에 선과 악의 근거가 동시에 주어지는 이론적 난점과 선천의 본래성인 허정에 복귀함으로써 인간의 내면에 도덕성을 확보한다는 수기론은 정적주의로 흐를 가능성을 지니게 된다. 이러한 경향은 화담의 학설을 이어받은 이구·남언경·박순에서 두드러지는데, 이들은 본체를 절대화함으로써 기의 현상적 성격을 제거하고 도덕의 근거를 확보하고자 했다. 화담학파의 학설이 지닌 이러한 이론적 실천적 약점으로 인하여 일상에서의 도덕적 실천을 중시하여 敬을 내세우고 理를 별개의 존재로 상정하여 도덕적 근거를 확보하는 퇴계 등에 의하여 비판받게 되고 이후 조선성리학의 주류에서 제외되었다.

 거의 독학으로 나름대로의 독자적 세계관을 구축했던 화담과는 달리 회재 이언적은 기묘사림의 학문적 성과를 직접 계승하여0529)이언적은 佔畢齋 金宗直의 문인이었던 외숙 愚齋 孫仲暾에게 수학했다. 성리학 연구의 차원을≪小學≫에서≪大學≫으로 높이고 성리학의 현실적 과제가 도덕성의 이론적 확보라는 점을 직시하여 理를 근본으로 하는 성리학체계를 제시함으로써 이후 조선성리학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다 하겠다. 회재가 활동을 시작할 무렵이던 중종대에는 기묘사림들에 의해≪소학≫,≪성리대전≫과 더불어≪근사록≫이 중시되었는데 특히 그 첫머리에 있는<太極圖說>은 천지만물의 이치와 도덕의 근본이 구비된 것으로 중시되어 많은 학자들이 이에 대해 논하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회재도 忘齋 孫叔暾과 忘機堂 曺漢輔 사이의 無極太極論辯에 개입하여 망재의 설은 陸象山의 설에서 나온 것이고 망기당의 설은 비록 周濂溪에 근거하고 있지만 上達과 頓悟를 중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선학의 영향이 많다고 비판하고 理에 입각한 성리설을 본격적으로 천명하고 있다. 회재는 無極寂滅과 存心上達을 표방한 망기당설에 대하여 “이 주장은 전적으로 氣化를 가지고 理의 유무를 설명한 것으로 잘못이다. … 至無한 중에 至有가 있으므로 ‘無極而太極’이라고 설명했고 理가 있은 후에 기가 있으므로 ‘太極生兩儀’라고 했다. 그러므로 비록 이가 기를 떠나지는 못하나 실제는 기와 섞이지는 않는다”0530)李彦迪,≪晦齊集≫권 5, 答忘機堂書 1.고 하여 무극의 본체에 중점을 두고 태극도설을 해석한 망기당의 설을 비판하였다. 그리고 “유가의 虛는 비었으나 有이고 이단의 허는 비었으며 無이다. 유가의 寂은 고요하되 感하나 이단의 적은 고요하되 滅한다. 그러므로 비고 고요함은 같으나 그 귀착점은 전혀 다른 것이다. … 人事를 下學하면 자연히 天理에 上達할 수 있으나 하학공부를 하지 않고 상달하려는 것은 불교의 돈오설이다. … 사람의 형이 있으면 반드시 사람된 근거로서의 理가 있다. 형기를 버리고 도만을 구한다면 도가 있을 수 없다. 적멸의 가르침은 공허한 이론이므로 違天滅理의 잘못을 범한다”0531)李彦迪,≪晦齋集≫권 5, 答忘機堂書 2·3.고 하여 돈오상달을 주장하는 망기당의 수양론을 비판하고 있다. 이와 같은 회재의 망기당 비판을 통한 이학의 천명은 조선성리학 초유의 철학적 논쟁이라는 점에서 의미를 지닐 뿐 아니라 조선학자들의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성숙되었음을 알리는 신호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의의를 갖는다.

 이러한 화담과 회재의 성리학 이해를 바탕으로 해서 조선성리학의 독자적 체계를 세운 학자는 퇴계와 율곡이다. 퇴계와 율곡 모두가 주자학에 근본하고 있으면서도 그 해석에서 미묘한 차이를 보이는 것은 앞서 살펴본 회재에 대한 퇴계와 율곡의 평가가 엇갈리고 있는 점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퇴계는 주자를 깊이 연구하고 신봉하여 주자학을 조선성리학의 기준으로 삼고자 했다. 그래서 주자의 설에서 조금이라도 어긋난다고 생각되는 것에 대해서는 이단사설이라고 가차없는 비판을 가했다. 기를 본원으로 삼고 이가 기에 내재되어 있다고 한 서경덕과 明의 羅欽順에 대해서는<非理氣爲一物辨證>을 지어 그들의 학문이 결국에는 선학의 정적주의에 귀착됨을 비판했고 명의 王陽明에 대해서도<陽明傳習錄辨>을 지어 양명학의 心卽理說과 知行合一說이 불교의 설과 같음을 비판하고 있다. 성리학내의 불교적 요소, 즉 비주자학적 요소를 비판하고 있다는 점에서 퇴계의 이단비판은 차원을 달리하고 있으며 동시에 퇴계 당시 주자 중심의 성리학이 조선사회에서 이미 보편적 사상으로서의 지위를 획득해 가고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太極이 理이며 이가 氣에 앞선다고 하는 점에서는 퇴계는 대체로 주자의 설을 따르지만 도덕성의 근원이기도 한 이가 단순한 관념적 존재 혹은 원리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운동성, 자발성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는 점에서 퇴계의 주자해석은 나름대로의 특징과 독자성을 지닌다 하겠다. 주자가 “기는 능히 응결하고 조작하나 理는 情意와 조작이 없다”고 한 데 반해, 퇴계는 “태극에 동정이 있는 것은 태극이 스스로 동정하는 것이고 천명이 유행하는 것은 천명이 스스로 유행하는 것이니 어찌 다시 그렇게 시키는 것이 있겠는가”0532)李 滉,≪退溪全書≫권 13, 答李達李天機.하여 태극, 즉 理의 운동성이 없으면 태극을 움직이는 보다 근원적 존재가 필요하게 되는 논리적 모순이 생김을 지적하고 “정의와 조작이 없는 것은 理의 본연한 體이고 경우에 따라 발현하지 않음이 없는 것은 理의 지극히 신묘한 用이다”0533)李 滉,≪退溪全書≫권 18, 答奇明彦別紙.고 하여 체용론으로 이의 운동성을 설명하고 있다. 퇴계가 이렇게 이의 자발성, 이의 독자성을 강조하는 것은 기묘사화 이후 무너진 성리학적 공도를 확고히 하여야만 유교적 이상정치를 실현할 수 있다는 당시의 시대적 과제를 이론적으로 실현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퇴계는 우주론보다는 도덕수양의 이론적 근거가 되는 심성론의 정립에 더욱 심혈을 기울였는데 이기론에서 理氣不相雜, 理氣二物, 理先氣後를 강조하는 것도 결국은 심성론에서 도덕의 절대성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존재론에서 이기불상잡, 이기이물을 강조한 퇴계의 주자해석은 심성론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퇴계도 주자학의 일반론에 따라 인간의 마음(心)을 본성(性)과 성의 현실적 구현인 情으로 나누고 다시 心의 體인 性을 本然之性과 氣質之性으로, 심의 用인 정을 四端과 七情으로 나누어 본연지성과 사단은 순수히 선한 반면 기질지성과 칠정은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일반론을 전개하는 가운데 퇴계는 본연지성과 사단은 理에서 근원하고 기질지성과 칠정은 氣에서 근원한다는 理氣互發說을 내세워 도덕적 본성의 절대성과 독자성을 강조하는 심성론체계를 수립하여 이기론에서의 理動說과 더불어 일관된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퇴계의 심성론은 고봉 기대승의 호발설에 대한 의문제기로 야기된 고봉과의 7년에 걸친 사단칠정논변을 통해 더욱 정밀한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퇴계와 고봉간의 사단칠정논변은 퇴계가 慕齋 金安國의 문인 秋巒 鄭之雲이 지은 천명도중의 ‘사단은 이에서 발하고 칠정은 기에서 발한다(四端發於理 七情發於氣)’라는 구절이 이기의 능동성을 보여주지 못한다고 하여 “사단은 이가 움직인 결과이고 칠정은 기가 움직인 결과이다(四端理之發 七情氣之發)”0534)李 滉,≪退溪全書≫권 41, 雜著 天命圖說後序.로 고친데서 발단된다. 고봉은 이러한 퇴계의 견해가 이기, 사단칠정의 본래 개념규정과 어긋난다고 보고<非四端七情分理氣辯>을 지어 첫째, 사단과 칠정은 모두 정에 속하므로 칠정외에 별도의 사단이 있을 수 없고 둘째, 사단과 칠정을 각각 이기에 분속시키면 이기가 분리된 두 실체가 되므로 이는 理氣不相離라는 성리학의 근본원리에 위배되는 견해가 아닌가 하고 질의했다.0535)李 滉,≪退溪全書≫권 16, 附奇明彦四端七情分理氣辯. 이러한 고봉의 의문에 대하여 퇴계는 첫째, 이기가 떨어져 있는 것은 아니나 구분이 없을 수는 없으니≪주자어류≫에도 ‘四端是理之發 七情是氣之發’이란 문구가 있음을 지적하고 둘째, 사단과 칠정이 모두 情의 범주에 들지만 성을 본연과 기품으로 구분하여 말할 수 있다면 정도 그 연유하는 바의 비중에 따라 이기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답하여 자신의 이기호발설이 성리학의 근본원리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0536)李 滉,≪退溪全書≫권 18, 答奇明彦四端七情一書. 이후 몇 차례의 논변 끝에 고봉이 자신의 견해에 미흡한 점이 있었다는 점을 인정함으로써 결론을 지었으나 고봉이 완전히 설복한 것은 아니었다. 퇴계도 후에 “사단은 이가 발하여 기가 따르는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하여 이가 타는 것이다(四端理發而氣隨之 七情氣發而理乘之)”0537)李 滉,≪退溪全書≫권 7, 聖學十圖 心統性情圖.라고 하여 자신의 설을 약간 수정하기는 했으나 사단칠정이 이기호발이라는 점에서는 변함이 없었다. 퇴계는 이러한 이기심성론이 단순히 이론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敬의 마음가짐과 도덕적 실천을 통해 체득함으로써 비로소 완성된다고 하고 자신은 수기의 방법과 방향을 제시했을 뿐이라고 하여 당시의 사회에서 자신의 성리학체계가 지니는 의미를 분명히 하고 있다.

 퇴계와 더불어 조선에 성리학을 확고히 정착시킨 또 한 명의 학자는 栗谷 李珥(1536∼1584)이다. 율곡은 퇴계의 학문하는 태도를 존숭하기는 하였지만 퇴계의 학설을 그대로 따르지는 않았다. 율곡은 퇴계의 성리설이 주자에 지나치게 의지하고 있고 또 퇴계의 주자해석은 근본적인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고 나름대로 진단한 후 명의 羅整菴과 화담의 성리설이 지닌 독창성을 상대적으로 높이 평가하였다.0538)李 珥,≪栗谷全書≫권 12, 答成浩原(六). 이러한 평가는 그의 성리설 전개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율곡의 성리학이 주자학에 근본하고 있고 또 화담의 선천일기설이나 정암의 이기일물설을 비판하고 이의 기에 대한 선차성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퇴계와 비슷하지만 몇 가지 점에서 퇴계의 성리학과 미묘하고도 중대한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이는 율곡이 화담과 정암의 영향을 일부 받은 결과일 것이다. 아마 율곡은 나름대로 화담·퇴계·고봉 등의 조선성리학의 성과와 나정암 등 당시 중국성리학의 새로운 경향을 절충하여 집대성하려 한게 아닌가 한다. 율곡의 성리설은 퇴계의 입장을 옹호하는 그의 지우 우계 성혼과의 왕복 서간에 잘 드러나 있다. 여기서 율곡은 정암의 성리설이 이기를 하나로 보는 병통이 있고 화담의 선천일기설은 기를 이로 본 잘못이 있다고 비판하는 동시에 퇴계의 이기이물설은 이기불상리의 측면을 간과한 결과라고 비판하면서 자신의 성리설을 전개하였다. 율곡은 “理란 氣의 主宰요 기는 이의 타는 것이니 이가 아니면 기가 근저할 수 없고 기가 아니면 이가 의착할 수 없는 것이다. 一物이 아닌 까닭에 一而二요 二物이 아닌 까닭에 二而一이다”0539)李 珥,≪栗谷全書≫권 9, 答成浩原 壬申.라고 하여 理氣不相雜의 측면보다 不相離의 측면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율곡에 있어서의 이는 곧 태극으로 모든 존재의 근원이 되지만 철저히 형이상, 무위, 무변으로 규정되고 있어 理發이란 있을 수 없고 형이하, 유위, 유변으로 규정된 기가 운동하는 所以로서만 성립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율곡의 성리설에서는 이 즉 태극의 운동이란 있을 수 없고 “음이 정하고 양이 동하는 것이 기가 스스로 그러한 것일 뿐이다”0540)李 珥,≪栗谷全書≫권 10, 答成浩原.라는 화담의 영향을 느끼게 하는 말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이기관계를 율곡은 불교의 영향이 느껴지는 ‘理通氣局’이라는 말로 표현하여 理는 사물의 보편성을 가능하게 하는 관념적 존재 혹은 원리이고 기는 구체적 사물로 드러나는 질료적 존재로 규정짓는다. 이동을 부정하고 이통기국을 내세우는 율곡의 이기설은 심성론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율곡은 “천지간에 만일 氣化者 理化者가 있다면 내 마음에도 마땅히 理發者氣發者가 있겠지만 천지에 이미 이화, 기화의 구분이 없거늘 내 마음에 어찌 이발 기발의 차이가 있겠는가”0541)위와 같음.라고 말하여 퇴계의 호발설이 지닌 논리적 모순을 지적하고 고봉의 “칠정이 사단을 포함한다”는 견해에 대해 “논리가 분명 直截하여 대를 쪼개는 것 같다”고 찬사를 보내며 전적인 동감을 표시한다. 율곡은 본연지성, 사단, 도심과 기질지성, 칠정, 인심을 각기 이기에 분속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둘이라고 하는 것과 같으므로 옳지 않다고 보고 그의 이기론에 따라 본연지성과 사단이 별도로 있는 것이 아니라 본연지성은 기질지성 가운데 理만을 지칭하는 개념일 뿐이고 사단은 칠정 가운데 순수히 선한 감정만을 지칭하는 것이라 하여 본연지성은 기질지성에 포함시키고 칠정은 사단에 포함시켜 버린다. 이렇게 본연지성과 사단의 독자성이 부정됨으로써 심성론에서 理發氣隨는 인정되지 않고 氣發理乘一途만 인정되며 여기서 비로소 心性情意一路가 설명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율곡의 이기설과 심성론은 퇴계의 성리설을 논리적으로 보완한 것으로 이후 율곡학파의 학자들에게 전승되어 퇴계의 성리학과 더불어 조선성리학의 양대 산맥을 이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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