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Ⅳ. 학문과 종교
  • 2. 양명학의 전래와 연구
  • 2) 양명학의 비판과 수용의 문제

2) 양명학의 비판과 수용의 문제

 퇴계는 만년에<傳習錄論辯>을 통해 정통 주자학의 입장에서 양명학을 禪學으로 지칭하여 이를 변척하였고, 그 후 한국 양명학은 조선 말기에 이르기까지 異端邪說로 배척을 받게 되었다.0569)이 점에 대해 구한말 독립운동가인 朴殷植은 “吾國儒林의 思想으로 言하면 諸老先生이 모두 朱學을 崇尙하고 篤信하여 唯一無二한 法門이 됨에 감히 一言一字라도 朱學과 異同이 되면 斯文亂賊의 律을 加하고 王學에 至하여는 異端邪說로 排斥하여 學界의 容跡을 許치 아니하였으니”라고 당시 思想界의 상황을 말하고 있다(≪朴殷植全書≫하권, 197쪽). 그는≪전습록≫의 내용을 각 조목으로 나누어 비판하였는데,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양명의 ‘親民說’을 비판하였다. 양명은 주자가 백성을 대상으로 하여 가르치고 깨우치게 한다는 의미로 이해한 ‘新民說’을 반대하고, 백성을 주체로 인식하여,≪大學古本≫의 字義대로 親民의 의미를 ‘친애하고 기른다’는 뜻으로 해석하였다. 이에 대해 퇴계는 주자학의 입장에서 明明德이란 學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德을 밝히는 것이요, 新民이란 자기의 學을 미루어 백성의 德을 새롭게 하는 것이라 주장하고 있다.

 둘째, 양명의 ‘心卽理說’을 비판하였다. 양명은 심즉리설을 통해 당시의 중요한 실천덕목인 忠·孝의 객관적 규범을 거부하고, 마음으로부터 충·효의 실천윤리가 발생한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퇴계는 양명이 窮理공부와 실천功效를 혼동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셋째, 양명이 정주의 객관적 규범과 형식을 비판하고, 事事物物을 모두 本心에 끌어들임으로써 마음만을 내세우는 불교의 禪學에 빠졌다고 비판하였다.

 넷째, ‘知行合一說’을 비판하였다. 양명은 주자가 사람들이 참답게 알기를 기다려 행하는 先知後行의 공부를 함으로써 마침내 종신토록 알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못하게 되었다고 하며 이를 반대하고 지와 행이 일체가 되는 지행합일설을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퇴계는 마음의 움직임이 形氣에서 나온 경우라면 양명의 지행합일의 논리가 가능하지만 마음의 움직임이 의리에서 나온 경우에는 知와 行이 분변되어야 한다는 점을 들어 양명이 감성의 세계에 치중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그런데 퇴계가 양명학을 그처럼 변척한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이 문제는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 하나는 양명학이 주자학을 비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정통 주자학자인 퇴계가 자신의 학문을 비판하는 양명학을 부정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당시의 역사적 상황과 관련하여 이해하는 것이다.

 조선 건국 후 거의 100년간은 새 왕조의 창업기로서, 鄭道傳(1348∼1398), 權近(1352∼1409) 등은 주자학의 闢異端論에 근거하여 불교를 배척함으로써 유교의 정통성을 확보하였으나,0570)金忠烈,≪高麗儒學史≫(高麗大 出版部, 1984), 210∼248쪽. 그 내용은 인간의 도덕성을 함양하는 입장이라기보다는 새로운 국가를 다지는데 필요한 문물제도의 확립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었다.0571)姜在彦,≪韓國의 開化思想≫(비봉출판사, 1989), 28쪽. 그러나 그 후 세조의 왕위찬탈사건을 위시하여 계속되는 士禍 등으로 통치자의 도덕성 문제가 학자들에 의해 제기되었고, 이에 따라 주자학은 이러한 문제를 학문의 중요한 과제로 인식하게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퇴계의 학문적 성과는 치자의 도덕성을 바탕으로 하는 정치, 이른바 道學政治의 제도적 정착에 커다란 공헌을 하게 되었다.0572)박충석,≪조선조의 정치사상≫(평화출판사, 1987), 32쪽.

 중국에 있어서 주자학의 역사적 한계성을 비판하고 대두한 양명학이 조선에 전래되어 수용되기 시작한 시점은 이처럼 주자학의 학문적 성과가 두드러지는 시기였다. 따라서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할 때, 퇴계가 양명학을 배척한 것은 학문적으로 주자학의 정통성을 확보하는 의미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 주자학을 바탕으로 하는 체제옹호적인 성격이 강하게 드러나는 것이라 하겠다.

 결과적으로 퇴계의 양명학 변척 의도는 성공적으로 받아들여졌고, 이 후 양명학은 이단사설로 배척받게 되었다. 萬曆 원년(선조 6년;1573) 정월에 眉巖 柳希春은 퇴계의 변척 논리에 근거해 경연석상에서 “신이 듣건대 중국의 謝廷傑이 王守仁을 문묘에 배향하고자 하여 주자와 육구연이 同道라는 설에 이르러 흑백을 변란시켰으니 이것은 심각한 邪說입니다”0573)柳希春,≪眉巖日記草≫계유 정월 21일.
李丙燾,≪韓國儒學史≫(아세아문화사, 1987), 359∼360쪽.
라 하여 양명학을 배척하였으며,0574)한국에서 양명학이 이처럼 배척일로를 걷고 있었던 반면 중국은 이미 만력 12년에 양명을 문묘에 종사하고 누차에 걸친 사신왕래를 통해 조선에서도 양명학을 적극 수용하기를 요청해 왔다. 또한 荷谷 許封(1551∼1588) 및 重峰 趙憲(1544∼1592) 등은 명에 사신으로 왕복하며 쓴≪朝天日記≫에서 중국 쪽의 양명학 긍정에 대해 끝까지 반대의 입장을 표명하였다.0575)許荷谷은 書狀官, 趙重峰은 質正官으로 중국 요양의 正學書院에서 양명을 비호하는 4인의 원생과 더불어 주자학 一尊의 견해를 피력하였고, 8월 2일에 노상에서 國子監生 葉本과의 토론에서도 양명을 釋氏에서 나온 이단으로 주장하였다(李丙燾, 앞의 책, 355∼356쪽). 그 후 임진왜란 당시 명의 원병으로 왔던 宋應昌·袁黃 등은 우리 나라에서의 양명학 공인을 요청하였으며, 萬世德은 조선의 조정에서도 중국을 따라 陸王을 文廟에 종사하도록 요구하였으나 우리 나라 조정에서는 끝내 이를 거부하였다.0576)李丙燾, 위의 책, 359∼362쪽.

 이처럼 중국에서 문묘에 종사되기까지 적극 수용된 양명학이 우리 나라에서 퇴계의 변척을 기점으로 하여 역사적으로 한결같이 배척된 까닭은 주자학의 학문적 정통성을 확보하려는 점에서 뿐만 아니라 16세기 조선의 역사적 상황이 중국과는 달리 주자학의 학문적 성과, 즉 도학정치를 바탕으로 한 체제옹호적인 성격이 함께 작용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