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Ⅳ. 학문과 종교
  • 3. 서양문물의 전래와 반응
  • 2) 17세기 서양문물의 도입

2) 17세기 서양문물의 도입

 전통적 유교문화 세계이던 조선사회에 매우 단편적이기는 하나 최초로 서양사정에 관한 정보를 연경에서 들여온 공식적 기록은 중종 5년(1520) 말에 북경에 파송되었던 사대사행의 通事이던 李碩이었다. 그 기록은 그가 귀국한 후 국왕에 제출한 여행의 보고록이라 할 聞見別單이었다. 그는 서양의 ‘佛朗機國’이 명나라에 來貢해 왔으나, 명이 그 통교요청을 허가하지 않은 사실을 보고하고 있다. 문견별단의 불랑기국에 관한 보고 내용은 매우 간단했지만, 이 정보는 조선이 접한 서양의 대표적 국가에 관해 적은 최초의 기사였다.0603)≪中宗實錄≫권 41, 중종 15년 12월 무술.

 이러한 단편적인 서양에 대한 정보에 이어 인조 5년(1627)에 벨테브레 일행 3인이, 효종 4년(1653)에는 하멜 등 36인이 조선에 표착하여, 몇 개 지역에 분산 수용되는 일이 생겼다. 이제 서양은 단지 머리 속의 환상적 지식으로의 국가가 아니라, 눈으로 확인되는 이질적 지리세계로 현실화되었던 것이다.

 서양·서양인 그리고 서양문명을 이해시켜 줄 정보와 문물이 17세기 초부터 연행사행원들의 손을 통하여 꾸준히 조선사회로 흘러들게 되었다. 결국 이들 문물에 접하게 되는 전통적 지식인의 논평이 기록에 오르게 되었다. 단편적이나마 서양문물에 대한 논평기사가 생기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유용한 서양문물의 실용적 가치를 인식하게 되는 기술관료들에 의해 서학적 기술문명의 도입활동이 제한된 수준에서나마 과감하게 벌어지게 되었다.

 서양문물과의 의미있는 초기적 접촉과 도입의 세기라 할 17세기 전반기에 진전된 주목할 만한 사례를 살펴보자(<표>참조).

연 도 재래자 관 명 접속상대
서 양 인
접속
장소
재래문물 출전사료
선조 36
(1603)
李光庭
 
奏請使
 
  燕京
 
歐羅巴輿地圖
 
芝峰類說
宣祖實錄
선조 34
 
黃允中
 
聖節兼
謝恩使
  兩儀玄覽圖
 
於于野談
 
광해군 2
(1610)
許 筠
 
    偈十二章
世界地圖
仁祖實錄·國朝寶鑑
國朝寶鑑
인조 9
(1631)
鄭斗源
 
陳奏使
 
Rodoriquez
(陸若漢)
登萊
 
治曆綠起
天問略
仁祖實錄·國朝寶鑑
國朝寶鑑
利瑪竇天文書 仁祖實錄·國朝寶鑑
遠鏡說
千里鏡說
職方外紀
西洋國風俗說
西洋國所獻神
威大鏡疏
天文圖南北極
天文廣敎
萬國全圖
紅夷砲題本
西洋火砲
焰硝花 國朝寶鑑
千里鏡 仁祖實錄·國朝寶鑑
日晷觀
紫木花
自鳴鐘 國朝寶鑑
李榮俊
 
(鄭斗源一
行譯官)
Rodoriquez
(陸若漢)
  治曆綠起
 
與西洋國陸掌敎
若漢書
鄭孝吉

 
(鄭斗源一
行別牌將)
 
    天問略
紅夷砲操作法
習得

仁祖實錄
 
인조 14 金 堉 進賀使   燕京 自鳴鐘 潛谷筆談
인조 22
 
昭 顯
世 子
  Adam Shall
(湯若望)
算學관계
서적
正敎奉褒
 
天文관계
서적
 
聖敎正道의
서적
 
天球儀  
인조 23
(1645)
韓興一 鳳林大君
護行宰臣
  燕京 天主像  
改界圖 仁祖實錄
七政曆比例
인조 24
 
金 堉 謝恩兼
陳奏副使
    曆書
인조 24
 
李景奭
 
謝恩使
 
Adam Shall(湯若望)로부터 曆法書
140∼150권 구입토록 李奇英에 하명
인조 26

 
宋仁龍

 
日 官

 
Adam Shall
에게서 역법
학습
  縷子草
星 圖
효종 2
(1651)
金尙范
 
日 官
 
欽天監에서
역법 학습
   
효종 6
 
  日 官
 
    日躔表
月離表

<표>17세기 전반기의 서양문물 재래사례 일람

※ 1653년 하멜 일행 36명 표착. 1666년 16명 조선탈출.
※ 도입시기가 확실치 않으나 17세기 초 중국으로부터 연행사신에 의해 조선으로 도입된 것으로≪天主實義≫·≪交友論≫등의 漢譯西學書가 있다.

 이상 17세기 전반 연경으로부터 조선 사행원들의 손에 의해 조선으로 재래된 서양문물은 크게 西洋機器類와 지도 그리고 漢譯된 서학서로 나눌 수 있다.

 도입된 기기류는 自鳴鐘·日晷觀·千里鏡과 天球儀 등 천문 관계와 西洋砲·焰硝花 등의 화기 관계 그리고 紫木花 등이었다.

 ‘漢譯西學世界地圖’는 예수회 선교사들이 그들이 전교활동을 펴게 된 새로운 무대인 중국사회의 ‘中華世界意識’의 미몽을 깨우쳐 주기 위한 목적에서, 또는 황실의 요청이나 지식인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중국을 중앙에 위치케 한 세계지도이며 지명과 그 밖에 필요한 기사를 한문으로 적은 세계지도를 일컫는다.

 한역서학세계지도 가운데 가장 먼저 조선으로 도입된 것은 중국 최초의 한역서학 세계지도인<坤輿萬國全圖>이다(마테오 릿치 제작, 1602년 판각). 선조 36년(1603) 사대사행원 李光庭이 북경에서 재래한 이 지도를 열람할 수 있었던 李睟光의 寸評文이 그의 저서≪芝峰類說≫에 수록되었음은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0604)李睟光의≪芝峰類說≫에는 ‘歐羅巴輿地圖-件六幅’으로 나온다. 마테오 릿치는 1583년 廣東省肇慶府에서 중국사대부들을 위하여 중국을 가운데 위치케 한 세계지도를 한문으로 제작하였다. 이것이 1584년 王洋에 의해 刻版되었고, 1600년 북경에서 吳中明이 增補改正하여<山海輿地圖>의 이름으로 版行하였고, 1602년 李之藻가 다시 吳中明本을 증보하여 6폭의 屛風圖로 각판하였다. 이것이<坤輿萬國全圖>이다.<곤여만국전도>는 당시 중국사회의 수요에 의해 수천 부가 인쇄·반포되었다 하나, 그래도 그 수요를 채우지 못할만큼 인기가 있자 판토쟈(Pantoja;龐迪我)는 마테오 릿치의 세계지도를 확대 보완하여<兩儀玄覽圖>라는 한역서학지도를 제작한 바 있다. 이 지도도 북경사행원이던 黃允中에 의해 판각된 다음해에 재빨리 조선사회로 도입되었다.0605)<兩儀玄覽圖>는<坤輿萬國全圖>를 대본으로 중국 士大夫奉敎人의 한 사람인 李應試가 1603년 북경에서 8폭으로 刻行한 漢譯 세계지도이다.
金良善,<明末淸初耶蘇會士들이 制作한 世界地圖>(≪梅山國學散稿≫, 崇田大博物館, 1972), 187쪽.

 다음에 조선 후기사회에 도입된 한역서학세계지도는 서양의 敎學제도와 人文활동을 소개하기 위해 제작된 한역서학서인≪職方外紀≫와 같이 인조 8년(1630) 陳奏使 鄭斗源을 수행했던 역관 李榮俊에 의해 도입된 지도인 <萬國全圖>였다고 연구자들이 추정하고 있다.0606)<萬國全圖 五幅>을 J. Alleni(艾儒略)의≪職方外紀≫에 삽입되어 있는 권수의 萬國全圖와 각 권의 4大洲別地圖로 보는 연구자도 있으나(金良善, 위의 책, 233쪽), Rodoriquez(陸若漢)의 서한에 의하면 마테오 릿치의 세계지도로 밝혀지고 있다(姜在彦, 앞의 책, 77쪽 註 10). 한편 이 지도를 조선으로 도입한 역관을 李榮後로 적은 연구도 있다(姜在彦, 위의 책, 73쪽 및 山口正之,≪朝鮮西敎史≫, 45쪽 참조). 그러나 그 이름이 보이는 草書資料인 安鼎福의≪雜同雜異≫를 면밀히 검토해 보면 後가 아니라 俊이어야 한다.

 위의 세계지도들이 여러 쌍으로 되어 있는 屛風地圖인데 대하여, 이와는 판이한 斷裂圖法에 의해 제작된 세계지도인<地球十二長圓形地圖>가 조선으로 도입되었다. 이 지도는 아담 샬(Adam Schall;湯若望)이 제작한 것으로 地球儀 제작에 쓰이는 세계지도였다. 이 地球儀用舟型圖는 淸의 入關 후 북경에 자리잡은 청국 황제의 요청으로 역법 개정에 종사하던 아담 샬이≪渾天儀說≫이라는 한역서학서를 저술하였을 때 그 책에 수록한 것이었다. 이 異型의 한역서학지도는 인조 22년에 정치적 인질로서의 억류생활을 끝내고 본국으로 돌아오게 된 소현세자가 아담 샬로부터 받은 여러 가지 서양문물 가운데 하나로 조선에 도입되었다.0607)盧禎植,<西歐式地圖의 受容과 抵抗>(≪大邱敎育大學論文集≫20, 1884), 89∼113쪽.

 한편 연행사신의 손에 의해 조선에 도입된 서양관계 서적은 예수회 소속의 선교사들이 문화주의적 전교방침에 따라 漢文으로 저술하거나 번각한 이른바 ‘漢譯西學書’들이었다.0608)‘漢譯西學書’는 연구자에 따라 東傳漢文西學書(金玉姬), 漢文西學書(琴章泰), 西學關係漢文書(崔韶子), 漢譯西洋書(姜在彦) 등으로도 표기되고 있다. 이들 한역서학서는 서양의 종교·윤리 등 정신문명에 관계되는 이른바 ‘理’篇에 속하는 것과, 과학·기술 분야 즉 물질문명에 관계되는 ‘器’篇 관계의 서적으로 구분지을 수 있다. 17세기 조선으로 도입된 각종 한역서학서를 분류적으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0609)漢譯西學書를 理·器로 분화함은 中國西學者 李之藻가≪天學部函≫이라는 이름으로 漢譯西學書選集을 彙集할 때 처음 사용한 분류이다.

 이편에 속하는 도입서로는≪天主實義≫·≪交友論≫이 대표적이다.

 1603년에 연경에서 발행 후 아시아 한자문화권의 여러 나라에 급속히 전파된≪천주실의≫나 이수광이 열람한≪교우론≫은 마테오 릿치가 제술한 20편에 가까운 한역서학서 가운데서 대표적인 것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기편에 속하는 도입서로는 천문역산 관계와 군사 관계 그리고 지리·풍속 관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① 天文曆算書 …≪治曆緣起≫,≪天問略≫,≪算學關係書≫,≪利瑪竇天文書≫, 改界圖, 天文圖南北極,≪天文廣敎≫, 七政曆比例, 星圖, 縷子圖, 日躔表, 月離表. ② 機器書 …≪遠鏡書≫,≪千里鏡書≫, 西洋國所獻神威大鏡疏, 紅夷砲題本. ③ 地理書 …≪職方外紀≫,≪西洋國風俗說≫

 이상 17세기 전반기에 연행사행원들에 의해 조선사회로 재래된 서양문물 가운데 자명종·천리경·일구관 등은 마테오 릿치가 1601년 연경에 소개한 서양과학기기였다. 천문역산서 가운데의 ‘利瑪竇天文書’는 구체적으로 어떠한 책인지 그 이름이 명시되어 있지 않으나 마테오 릿치에 의해 제작된≪渾蓋通憲圖說≫과 같은 서양천문 관계 서적으로 파악되고 있다.

 천문역산서 가운데≪治曆緣起≫는 청말 徐光啓와 랑고바르드(Langobard;龍華民) 신부가 찬술한 서양역법에 의한 중국에서의 治曆事業의 연혁을 기록한 것으로,≪崇禎曆書≫의 일부로 편입된 한역서학서였다.≪天問略≫은 그리스의 천문학자 프톨레마이오스의 天動說을 중심으로 한 지구 중심의 天體觀을 크리스트적으로 해설한 천문서이며, 디아즈(Diaz;陽瑪諾) 신부가 엮은 것이었다. 그 밖의 각종 천문서와 천문도는 거의가 아담 샬과 서광계가 추진한 치력사업의 결과를 다섯 차례에 걸쳐 황제에 올린≪崇禎曆書(新法曆書)≫가운데 포함되어 있는 漢譯西學天文曆算書들이었다. ‘天文圖南北極 兩幅’은 조선에 들어온 최초의 서양식 천문도였다. 그것은 아담 샬이 제작한 赤圖南北總星圖였다.≪千里鏡說≫은 아담 샬이 당시 중국에서 사용되던 서양 儀器 가운데 가장 대표적 기기인 망원경의 제조법과 그 실용가치를 설명한 것으로 1626년에 연경에서 간행된 것이다.≪紅夷砲題本≫은 1636년에 명나라가 아담 샬에게 명하여 鑄砲廠을 설치하고 대포를 제작케 했을 때 그 곳에서 제작한 紅夷砲의 주조와 조작법을 설명한 책자로 알려져 있다.

 ≪職方外紀≫는 뒷날 1672년에 페르비스트(Verbiest;南懷仁) 신부가 서술한≪坤與圖說≫과 같이 漢譯西學地理書의 二大 걸작으로 알려져 있는 세계지리서로, 알레니(Julius Aleni;艾儒略) 신부가 1623년 杭州에서 간행한 한역지리서이다. 중국 지식인 사회에서는 물론 조선에 도입된 후 조선의 실학 지식인들의 세계관 확대에 지대한 공헌을 하게 되는 지리서였다.0610)한역서학서에 대한 간략한 解題文獻으로는 各書의 略解·序文·版文·小引과 저자의 약력이 소개되어 있는 徐宗澤 編著,≪明淸間耶蘇會士 譯著提要≫(台灣, 中華書局, 1958)이 유용하다.

 이상 17세기 전반기 연행사행원들에 의해 조선으로 재래된 서양문물은 명말 청초에 걸쳐 북경에서 천주교 포교에 종사하면서 명·청의 어용학자·기능인으로 활동하던 예수회선교사인 신부들과 천주교신앙을 받아들였던 청말 석학이나 고관들의 협력으로 이루어진 노작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중국의 이른바 ‘奉敎士人’으로는 楊廷筠·徐光啓·李之藻·李天經 등이 유명하다. 이들의 협력을 통해 명말청초의 동북아시아사의 대전환기의 혼란 속에서도, 북경 일각에서 ‘中國西學’이 자라고 있었으며, 그 성과의 일부가 연경사행원들에 의해 조선사회로 계속 도입되었던 것이다. 다만 소현세자와 아담 샬 간의 일은 연행사행과 관계없는 예외적인 서양문물 조선도입의 경우였다.

 중국의 漢譯西學文明(淸歐文明)은 이와 같이 17세기 초부터 연경사행원들에 의해 계속적으로 조용하게 조선사회로 도입되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종류와 수량이 점차 늘어나 18세기에 들어서는 실학적 지식인들의 학문적 호기심의 대상으로 주목받게 되었으며, 마침내 학문적으로 이들 서양문물을 연구하게 되어 ‘朝鮮西學’의 학문활동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18세기 중엽 당시의 학자들의 한역서학서 閱讀이 일종의 유행이었다는 安鼎福이나 丁若鏞의 기록을 통해 17세기 초부터 조선에 유입된 한역서학서가 18세기 중엽 이후 학자들 사이에서 광범위하게 읽히고 검토되었으며,0611)安鼎福,≪順菴集≫권 17, 天學考.
≪正祖實錄≫권 46, 정조 21년 6월 경인.
그 결과가 극히 한정적인 것이기는 하였으나 한국문화의 역사적 변성을 소리없이 촉진하는 酵素로 작용하게 되었던 것이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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