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Ⅳ. 학문과 종교
  • 4. 실학의 태동
  • 1) 실학의 성립과 그 개념

1) 실학의 성립과 그 개념

 실학에 대한 관심과 연구는 1930년대 초반에 벌써 일어났다.0642)우리가 여기에서 말하는 ‘實學’은 흔히 古文獻에 보이는 ‘實學’이라는 용어 그 자체를 지칭하는 것은 아니고 조선 후기의 역사상에 등장했던 학문·사상운동으로서의 실학이다. ‘實學’용어의 어원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 참조.
全海宗,<釋實學>(≪震檀學報≫20, 1959).
朱七星,<실학의 개념과 그 변천>(≪실학파의 철학사상≫, 예문서원, 1996).
일제의 식민지 사상·문화정책에 대항하는 ‘朝鮮文化 復興運動‘ 혹은 ‘朝鮮學運動’의 발흥이 그것이었다. 항일 민족해방을 위한 문화·사상운동으로서 실학이 주목되었된 것이다.0643)千寬宇,<韓國實學思想史>(≪韓國文化史大系≫6, 고려대, 1970;<朝鮮後期 實學의 槪念 再論>으로 改題하여≪韓國史의 再發見≫(一潮閣, 1974)에 재수록, 989∼994쪽).
―――,<實學의 槪念是非>(≪近世朝鮮史硏究≫, 一潮閣, 1979), 381쪽.
전통은 해방 후에도 물론 계승되었다. 日帝의 식민지 지배논리를 극복하고 주체적·발전적인 民族史像을 수립하기 위한 문제의식과 연구주제를 실학의 테두리에서 찾으려는 노력이었다. 그리하여 실학은 근대 이전 한국의 사회·경제·정치·사상·문화 일반에 걸쳐서 다양한 내용을 포괄하는 학문, 즉 國學을 총괄하는 용어로 확대되었다. 최근에 국사·국문학·철학은 물론이고 인문·사회과학 일반, 심지어는 자연과학 분야에서도 실학과 관련한 논의나 연구가 일어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실학 용어의 개념, 실학의 성립 시기와 배경, 그 발전과정에 대해서는 아직도 충분하고 설득력있는 대답이 마련되어 있지 못한 형편이다. 실학의 내용이나 역사적 의의가 그 만큼 크고 중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태동기의 실학에서도 이러한 문제점에 유념해야 함은 물론이다. 그러므로 이제 비록 간략하게나마 실학연구의 역사를 살피는 일, 즉 실학의 연구사적인 검토를 통해서 과거의 연구성과를 돌아보고 그런 가운데서 되도록 실학의 정당한 개념과 의의에 접근해 보기로 한다.

 실학연구가 시작되던 초기에는 그것이 ‘조선 후기의 新學風’이라는 정도의 의미를 띄고 있었다.「실학」을 정의해보려는 시도는 그 후 꾸준히 전개되었는데 1950년대 말기의 실학논쟁은 이러한 학계 나름의 활동 성과가 구체화된 것으로 보아 좋을 것이다.0644)1958년 10월 초 歷史學會 주최로 ‘實學의 槪念’을 주제로 공동토론회가 열렸다. ‘實學’과 그 성격에 대한 관심은 해방 직전에 이미 제기되었는데(洪以燮,<實證學派의 社會性>,≪朝鮮科學史≫, 정음사, 1944), 본격화된 것은 1950년대 초 千寬宇의<磻溪 柳馨遠 硏究-實學 發生에서 본 李朝社會의 一斷面->(≪歷史學報≫2-3, 역사학회, 1952∼3;≪朝鮮近世史硏究≫, 一潮閣, 1979)을 통해서였다. 이 밖의 논자와 그 대표적 글은 다음과 같다.
韓㳓劤,<李朝「實學」의 槪念에 대하여>(≪震檀學報≫19, 1958;≪李朝後期의 社會와 思想≫, 을유문화사, 1961).
全海宗, 앞의 글;≪韓中關係史硏究≫(一潮閣, 1970)에<實學의 意義에 대하여>로 재수록.
金良善,<韓國實學發達史>(≪崇大學報≫5, 숭실대, 1955).
姜在彦,<朝鮮實事求是學派について>(≪歷史學硏究≫195, 東京, 1956).
李佑成,<實學派의 文學-朴燕巖의 경우->(≪국어국문학≫16, 1957).
李家源,<燕巖 朴趾源의 生涯와 思想>(≪思想界≫10월호, 사상계사, 1958).
이 때의 논자들 사이에서는 同異點과 강조점이 다소 차이가 나고 있었지만 우선 실학의 기본성격으로서, ‘자유성·과학성·현실성을 바탕으로 한 근대지향성과 민족의식’을 꼽고 그 학문적 계보나 유파는 유학=주자학에 대신하는 ‘改新儒學’이라고 규정하였다.0645)千寬宇, 앞의 글(1970) 참조.
이후 실학의 성격과 관련해서는, 실학이 유교·주자학의 修己治人을 바탕으로 하여 實事求是와 經世致用을 목표로 했다는 것, 실학 발생의 배경으로는 중국에서 전래한 서양의 천주교와 과학기술이나 명·청대의 陽明學과 考證學 등 특히 외래적인 요인이 중시되지만 그와 함께 임진왜란으로 인한 피해와 충격이 한 계기가 되며, 여기에 유통경제의 발달과 수취체계의 문란, 토지집중과 농민층의 영세화에 따른 농촌경제의 파탄, 당쟁적 정치운영의 폐해 등등 내부적인 조건을 빼놓을 수 없다는 것, 실학을 주도한 사람들은 대개 당쟁으로 권력에서 소외된 재야학자들이며 그들 사이에 학문적·사상적 친소·계승관계가 형성되었다는 것, 실학의 성립시기를 18세기에 한정하거나 고려 말 주자학 수용기까지 소급해 볼 측면도 있으나 대체로는 조선 후기를 특징지우는 학풍으로 본다는 것, 그리고 실학의 발전적인 과정이 인정되지만 19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쇠퇴·변형된다는 것 등에서 대체적인 견해의 접근이 이루어졌다.
특히 논자들은 실학이 내포하는 반봉건성, 근대지향성에 주목하고 이를 개혁사상·체제변혁론의 중심 논리로 부각시켰다.

 1970년대를 전후해서는 실학·실학자를 대상으로 한 연구가 비약적으로 증가하였다. 분야와 주제는 더욱 세분화되고 구체적인 내용이 다양하게 확인되었다. 늘어난 연구성과를 시기와 내용에 따라 분류하고 유형화하려는 시도가 나타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럴수록「實學」은 지나치게 포괄적이고 모호한 것으로 되어갔다.「실학」의 용례·개념이나 범주, 성립시기와 배경, 주요 계보와 발전단계, 그리고 사상의 성격·의의 등에 대하여 견해 차이가 좁혀지기 보다는 오히려 더 확대되는 인상마저 있었다.0646)여러 논자들의 연구사적인 정리를 통해서도 이 같은 사정이 쉽게 확인된다. 예컨대 최근에는 19세기의 北學思想만을 실학으로 인정하고 그 이전의 실학은 朝鮮性理學으로 불러야 옳다는 주장(池斗煥, 아래 글 참조)이 나오게 된 것은 이러한 실학 개념의 불확실성과 혼란상을 단적으로 반영하는 것이라 하겠다. 실학에 대해 연구사적으로 정리한 글들은 다음과 같다.
金容燮,<最近의 實學硏究에 對하여>(≪歷史敎育≫6, 역사교육연구회, 1962).
宮原兎一,<李朝後期の實學についての硏究動向>(≪朝鮮學報≫43, 天理大 朝鮮學會, 1967).
千寬宇, 앞의 글(1952∼3).
鄭求福,<實學>(≪韓國史硏究入門≫, 지식산업사, 1981).
鄭昌烈,<實學>(≪韓國學硏究入門≫, 지식산업사, 1981).
鄭在貞,<朝鮮後期 實學硏究의 동향과「국사」교과서 서술의 변천>(≪歷史敎育≫39, 1986).
池斗煥,<朝鮮後期 實學硏究의 問題點과 방향>(≪泰東古典硏究≫3, 한림대 태동고전연구소, 1987).
金炫榮,<實學硏究의 反省과 展望>(≪韓國中世社會 解體期의 諸問題≫上, 한울, 1987).
趙 珖,<朝鮮後期 實學思想의 硏究動向과 展望>(≪何石金昌洙敎授華甲紀念史學論叢≫, 범우사, 1992).
요컨대 한국사, 특히 조선 후기 역사에서 차지하는 실학의 비중이 매우 커지고, 실학이라는 이름의 연구열은 높아져 감에도 불구하고 실학의 본질 문제를 둘러싼 논자들의 견해는 더욱 多岐多樣해서 혼선이 더해 간다는 데에 문제의 어려움이 있다. 이러한 사정은 1990년대에 이르러서도 크게 달라졌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결국 역사연구의 수준과 문제의식에 대한 반성을 요구하는 사정으로 생각된다. 단순히 역사인식의 태도와 방법을 달리하는 데서 생겨나는 현상이 아닌 것이다. 또 분명한 사실은 개별 주제나 인물의 연구가 실학이라는 이름으로 축적되는 것만으로 진정「실학」의 성격과 의의가 드러나기 어렵다는 것이다. 돌이켜 보면 그 동안에는 ‘실학=조선 후기’라는 전제, 혹은 ‘실학을 통한 朝鮮後期像의 이해’라는 접근방식이 거의 일방적으로 통용되는 경향이 없지 않았다.

 사실 실학은 조선 후기 역사상의 큰 특징이며 사회발전의 실상을 확인할 수 있는 많은 내용을 담고 있다. 그렇다고 그것이 조선 후기 사회·역사상의 전체는 아니다. 그래서 종래의 실학=조선 후기라는 발상에 내포된 논리적 문제점은 대개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하나는 개념·성격 자체가 확정되지 않은「실학」을 통해서 조선 후기를 설명하려 했다는 것이고, 이와 관련해서 다른 하나는「실학」이 역사활동의 산물임에도 그것을 산출해낸 사회·역사조건을 올바로 고려하려는 노력이 미흡했다는 것이다. 실학에 관련한 문제의식과 접근방법이 재고되어야 할 까닭이 여기에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실학의 성격을 파악하는 일과 역사적 산물로서 실학을 이해하는 일은 결국 실학의 형성·전개와 사회·역사적 배경, 즉 내재적 계기를 정확하게 이끌어내는 하나의 문제로 모아진다. 실학이 생겨나고 발전·이행하는 전체과정은 바로 사회·역사운동의 과정이며 그 가운데서 실학이 무슨 내용으로 어떻게 기능했는지를 밝혀내면 바로 여기에서 실학의 실체가 제대로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실학 태동의 內因, 즉 실학이 등장하는 시기의 사회 역사적 조건과 이에 관련한 사상·학문적 동향을 파악하는 일이야말로 실학의 개념과 의의를 밝히는 일이라는 것이다.

 종래 연구자들도 실학 형성의 배경=內·外因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이를테면 1950년대에는 외인, 즉 기독교와 서양과학을 실학의 기저로 전제하고 淸朝의 考證學과 北學을 그 매개고리로 보는 경향이 뚜렷하였다.0647)金良善, 앞의 글의 경우에서 특히 그러하다. 이는 서구적인 요소의 수용·확산에 주목하는 근대화·근대사회론의 관점을 일정하게 반영한 것이었다. 서양이나 중국이라는 외래적 영향을 중시하는 견해는 중국에 이미 실학의 용례와 학풍이 있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발상과도 연관이 깊었다.0648)全海宗, 앞의 글(1959) 참조. 그런가 하면 같은 무렵에, 유학 내부의 주자학 비판과 임진왜란의 위기 극복을 위한 사회·경제 정책을 내인으로, 燕京을 통한 서구문화와 중국 학술의 전래·수용를 외인으로 나누어 보는 내·외인 절충론도 등장했다.0649)千寬宇, 앞의 글(1952∼3). 그러나 내인에 더 주목하는 관점은 아직 분명하지 않았다.

 실학 성립의 내재적 계기를 강조하는 견해는 1960년대 초 실학문제에 관한 최초의 연구사적 정리에서 비로소 분명해졌다.0650)金容燮, 앞의 글. 즉, 실학은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을 타개하려는 학문적 노력이며 조선 전기부터 지배층 전체의 관심사였다는 것, 실학 역시 한·당 이래의 유교를 학문적 기반으로 하는 점에서는 程朱學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 정치적 유교주의가 봉건적 국가권력의 원리였던 만큼 실학사상이 그러한 유교주의와 어떻게 다른가를 밝혀야 한다는 것, 그리고 실학사상을 근대사상으로 규정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개혁이론과 당시의 역사적 현실과의 구체적인 관련 내용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 등이었다. 말하자면 종래의 유교·주자학 역시「실학」을 자처했을 뿐만 아니라 그 유교·주자학과 실학은 깊은 연관관계에 있었다는 것, 그러면서도 성격과 의의를 서로 달리하는 까닭은 그들이 처한 역사적 현실과 과제를 각각 다르게 인식하고 그 해결과 방법 역시 서로 달리했기 때문이라는 것, 그러므로 조선 후기 실학의 본질을 해명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역사적 배경, 특히 내재적 계기에 주목해야 한다는 지적이었다.

 이렇게 보면 실학의 배경에 대한 관점이 대체로 외인 중시에서 점차 내인 중심의 시각으로 옮겨간 것이었다. 그런데 이는 역사발전의 주체적·내재적 계기에 주목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볼 때 1930년대 순수하게 ‘朝鮮學’이라는 이름으로 실학운동을 표방했던 국학자들의 인식수준에 도달한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아무튼 내인론이 확립되기 위해서는 실학문제 자체의 추구과정에서 뿐만 아니라 먼저 ‘한국사의 내재적·주체적 발전상’이 확인되어야 했다. 그리고 1960년대 이후 農業史를 중심으로 한 조선 후기 사회의 구조적·발전적 실상을 구체적으로 밝히는 연구가 축적되면서 이러한 과제는 점차 해소되었다.0651)金容燮,≪增補版 朝鮮後期農業史硏究≫Ⅰ(지식산업사, 1995), Ⅱ(一潮閣, 1990).
―――,≪增補版 韓國近代農業史硏究≫上, 下(一潮閣, 1984).
―――,≪朝鮮後期 農學史硏究≫(一潮閣, 1988).
―――,≪韓國近現代農業史硏究≫(一潮閣, 1992).
劉元東,≪韓國近代經濟史硏究≫(일지사, 1977).
姜萬吉,≪朝鮮後期商業資本의 發達≫(高麗大 出版部, 1973).
―――,≪朝鮮時代商工業史硏究≫(한길사, 1981).
宋贊植,≪李朝後期 手工業에 관한 硏究≫(서울大 出版部, 1973).
鄭奭鍾,≪朝鮮後期社會變動硏究≫(一潮閣, 1983).

 그리하여 이 무렵에는 실학의 내재적 동인을 찾으려는 노력이 여러 방면에서 기울여졌고 이를 크게 보면 두 가지 방향으로 모아지는 것이었다. 하나는 조선 후기 주자학의 經學觀·理氣人性說에 대한 회의와 비판을 확인하여 이것을 주자학으로부터 실학의 분리, 실학의 철학기반 형성으로 이어가려는 시도이고, 다른 하나는 역사발전의 내재적·일차적 동인이 실학의 배경이 되어야 할 것으로 보고 이 시기의 사회·경제적 성격과 그 변동에 주목하는 관점, 즉 사회경제사 연구의 확대였다.

 전자의 경우, 실학자들은 유교 경전을 연구하는 經學에 큰 관심을 가지고, 程朱·陸王을 포함한 여러 학설의 장단점을 취사하여 이를 종합 확대해가거나, 孔孟의 원시유학(洙泗學)에 회귀하여 경전의 독자적인 해석을 모색함으로써 朱子 경학에 대해 비판을 제기하고 새로운 修己治人의 학문을 추구했다고 강조했다.0652)李乙浩,≪茶山經學思想硏究≫(을유문화사, 1966).
―――,≪韓國改新儒學史試論≫(박영사, 1979).
韓㳓劤,≪星湖李瀷硏究≫(서울大 出版部, 1980).
―――,<白湖 尹鑴 硏究>(≪歷史學報≫15·16, 19, 1961, 1962).
李丙燾,<朴西溪의 反朱子學的 思想>(≪大東文化硏究≫3, 成均館大, 1966).
그리고 이러한 경학의 지향은 오직 朱子註를 無謬의 진리로 인정하려는 정통주자학의 경학체계·經典註釋을 거부하는 것으로서, 말하자면 反朱子 경학의 성립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또 우주 자연법칙을 설명하는 理氣說에 대해서 실학자들이 크게 주목하지는 않았지만 대개 主氣說을 선호하거나 그 경향으로 이행했다든가,0653)尹絲淳,<朝鮮後期實學>(≪韓國儒學論究≫, 현암사, 1980) 참조. 주자학의 학문 사상이 의리를 숭상하는 것임에 대해서 실학자들은 그러한 윤리·도덕학의 폐단을 비판하고 實事·實用을 중시하는 功利論을 발전시켰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하였다.0654)琴章泰,<朝鮮後期의 實學思想>(≪韓國哲學史≫下, 한국철학회, 1987). 이들 논의의 공통된 특징의 하나는 실학을 일단 定型의 범주로 인정하는 위에서 실학과 주자학의 차별성을 철학적 측면에서 확인해 내는데 치중하는 것이었다. 반면에 그러한 차별성과 철학적 기반이 가능했던 사회적 조건에 대해서는 별로 고려하지 않았다.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었지만 한편에서는 실학과 주자학의 관련을 고려하면서 실학자들의 개혁적 사상경향을 그 사상의 갈래와 연구 방법에 따라 계보적으로 정리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이를테면 실학을 주자학의 이념과 방법을 극복해서 실용·실증을 지향한 18세기의 전형적인 新學風으로 규정하고 이를 다시 토지제도를 포함한 법제개혁에 중점을 두었던 經世致用學派, 商工業을 위시한 생산·기술의 개발 이용에 주력했던 利用厚生學派, 그리고 典故·金石 등 고증적 연구방법을 중시하는 實事求是學派로 나누어 설명하는 방법이 그것이었다.0655)李佑成,<18세기 서울의 都市的 樣相-實學派 특히 利用厚生學派의 성립배경->(≪鄕土서울≫17, 서울시사편찬위원회, 1963;≪韓國의 歷史像≫, 創作과 批評社, 1982). 이는 실학 태동의 원인·배경을 발전단계나 사상계보의 체계화에서 찾는 발상으로서 여기에서의 학파분류는 이후 실학연구에 시사한 점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실학의 배경은 역시 후자, 즉 사회·경제 기반이 지니는 특성과 그 발전에서 구해야 할 일이었다. 이러한 발상은 다음의 논의에서 분명해졌다. 즉 실학은 임란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과 관련해서 발생했다는 것, 그리고 실학자들의 사회·경제 이론을 시기별로 계통화하면, 兩亂期의 약화된 봉건국가 강화책을 중심 내용으로 하는 봉건적 이데올로기로서의 실학(17세기 초), 봉건국가의 강화보다 농민계급의 입장을 더 중시하는 과도기의 실학(17세기 중엽∼18세기 중엽), 상공업과 기술혁신을 강조하며 신흥 시민계급을 대변하는 실학(18세기 말엽∼19세기 중엽), 開化思想으로 전화하여 근대개혁에 영향을 준 전환기의 실학(19세기 말엽∼ 20세기 초)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는 것이다.0656)趙璣濬,<李朝後期의 實學思想과 社會經濟的 背景>(≪亞細亞硏究≫32, 고려대, 1967;≪韓國史의 反省≫, 신구문화사, 1969).

 이렇게 실학사상 발전의 일차적 요인을 사회·경제 기반에서 찾고 이로써 실학자들의 사상·학문방법을 계열화하려는 문제의식은 앞에서 말했듯이 사회, 경제사 방면의 연구성과에 토대를 둔 것으로서 1970년대에 이르러 더욱 확고해졌다. 실학은, ‘17세기 이래의 사회, 경제 발전의 산물이며 그 변동을 배경으로 하여 이룩된 역사적 개념’0657)金泳鎬,<實學思想의 勃興>(≪한국사≫14, 국사편찬위원회, 1975), 128쪽.이라는 주장은 그 가운데 하나였다. 이에 따르면 농업 생산력의 발전과 地主佃戶制의 확대에 의한 농민층 분해의 전개, 상품생산·화폐경제의 발달, 봉건적 신분제의 붕괴와 서민의식의 성장, 서학과 청대학술의 영향이야말로 조선 후기 실학의 배경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서 天意에 따른 규범적 차원을 극복한 순수 물질적 존재로서의 자연관, 위선적·사변적 형식윤리에서 해방된 사회적 실천윤리로의 지향, 華夷論의 부정을 통한 萬國倂存의 민족 주체의식을 실학의 기본 성격으로 꼽았다. 무엇보다도 실학은, ‘사회·경제적 배경을 무시하면 그 개념이 관념적·초역사적인 것으로 전화되어 그 연원과 내용 역시 한없이 올라가고 확대되어 결국 실학 아닌 것이 없게 될 것’0658)위와 같음.임을 지적하였다. 조선 후기 사회의 물질적 조건이야말로 실학이 대두하는 기본 배경이자 그 개념과 본질을 규정하는 구체적인 단서가 된다는 것이다. 이는 앞에서 본대로 1960년대 초에 제기되었던 논점을 거듭 강조한데 불과하지만 그러나 이를 재확인하는 의의는 크다고 하겠다.

 크게는 역사를 주체적·발전적으로 인식하는 태도와 관련하여, 작게는 역사적 산물인 실학의 본질을 분명히 해명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內因의 내용과 의의는 확인된 셈이다. 곧 조선 후기의 사회, 경제문제란 바로 앞에서 지적한대로이며 그리고 여기에 집권적·신분제적 정치운영의 파행과 수취체계의 문란, 주자학 지배이념의 한계를 더 꼽을 수 있겠다. 이 변동의 가까운 계기는 임진·병자 양란이었지만 근본적으로는 16세기 이래 조선사회 자체의 자생적 동력에서 기인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그것은 구래 봉건적 양반지배체제의 모순을 극복하고 새로운 사회·역사 단계로 진입하려는 추진력이었다. 실학은 바로 이러한 조건 위에서 전개된 학문·사상운동이었다.

 조선 후기 사회의 현안에 대처하는 관인·식자들의 입장과 태도는 대체로 현실의 법제를 개선하여 기존의 질서를 보수하려는 입장과 그것을 근본적으로 개폐하여 새로운 질서를 창설하려는 진보적인 입장으로 크게 나눠지고 있었다. 논자들의 현실적인 이해관계나 學緣·黨色·門地 등이 여기에 작용하였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특히 학문·사상적으로는 정통주자학에 대하여 반주자학의 학풍이 일어나서 서로 대립 갈등하며 점차 보수노선과 진보노선으로 分岐하고 있었다.0659)조선 후기 현실인식과 그 타개책을 둘러싼 주자학과 반주자학의 사상·이념적 대립과 분기현상은 이 시기 土地論의 전개과정에서 분명히 확인된다. 즉 주자학적 토지론이 양반 지주적 입장, 개량적 방법의 농업문제 수습책임에 대해서 반주자학의 토지론은 농민적 입장, 혁신적 방법에 의한 해결책이었다는 것이다(金容燮,<朱子의 土地論과 朝鮮後期 儒者>,≪增補版 朝鮮後期農業史硏究≫Ⅱ, 一潮閣, 1990). 그런데 이 때의 반주자학이란 다름아닌 실학이었다. 구래 조선사회체제를 떠받드는 원리가 정통 주자학이었음에 대하여 그러한 구래 질서의 모순을 극복하려는 ‘조선 후기의 새로운 學風’이 바로 실학이었기 때문이다.

 주자학과 반주자학(또는 非朱子學)이 처음부터 보수사상과 개혁사상으로 명확히 구분된 것은 물론 아니었다. 주자학은 조선왕조의 國是·正學의 지위에 있었고 따라서 모든 관인·식자들의 지적 활동, 학문·사상적 출발점이 주자학이었다. 그러나 사회·경제의 발전과 시대상황의 변동에 따라, 더구나 그 변화가 크고 심각해져감에 따라, 주자학에 입각한 현실의 인식과 대응방법을 놓고 그들 내부에 이견이 생기고 이것이 입장과 이념의 차이로 확대되면서 반주자학의 성립으로 나타난 것이었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학파·지역·문벌의 분화와 차이가 한층 뚜렷해지고 당쟁적 정치운영으로 치닫게 된 사정은 이러한 사상·이념적 변동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조선 후기 사회의 발전과정에서 주자학으로부터 분리되어 나와 주자학의 대항이념으로 성립한 학문·사상을 가리켜 반주자학=실학이라고 부른다.0660)실학과 주자학을 이렇게 대항적 관계로 설정하는 것 자체는 그리 새로운 견해가 아니다. 예컨대 실학은 상황적으로 중국 고대에서 淸代에 걸쳐서, 또 조선 전기에서 조선 후기에 이르도록 존재했는데 구체적으로는 陸王學에 대항한 程朱學에서, 空談化한 性理學·禮學·詞章學을 배격하는 經世學에서 실학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는 주장이 그것이다(韓㳓劤, 앞의 글, 1958). 이 견해는 구학문과 신학문, 虛學에 대한 實學의 대응관계에 주목한 점, 그리고 어느 역사시기에도 사상, 학문간의 갈등은 존재하게 마련임을 예시하는 점에서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그 학문 상호간의 대응관계가 필연적으로 보수와 진보의 대립 갈등 관계를 반영하게 마련이며 또 그렇기 때문에 사회의 변동 발전과 학문·사상의 계기적 발전을 정합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 느낌이 있다. 즉, 실학은, “西歐近代의 사회경제사상이 수용되기에 앞서, 그리고 그것이 전래하는 시기에는 그에 대응하면서, 우리의 전통사상이 스스로 개척한 社會改革思想이고 近代化論이었다”0661)金容燮,<朝鮮後期의 農業問題와 實學>(≪東方學志≫17, 연세대, 1976), 60∼61쪽.
이러한 농업문제를 통해서 드러나는 실학의 성격과 관련하여 최근에는 실학의 정치구조·정치운영론에서도 이같은 사실이 확인되고 있다(金駿錫,≪朝鮮後期 國家 再造論의 擡頭와 그 展開≫, 연세대 박사학위논문, 1991).
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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