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Ⅳ. 학문과 종교
  • 4. 실학의 태동
  • 2) 초기 실학의 계보와 성격

2) 초기 실학의 계보와 성격

 실학을 ‘조선 후기의 학문·사상’으로, 그리고 반주자학으로 규정하더라도 그것이 태동하는 사회·역사적 조건과 이에 대처하는 관인·식자들의 학문·사상 활동을 구체적으로 살피는 일이 아직 남았다. 이는 실학의 대두시기와 배경·계기에 대한 문제인데 사실 실학의 개념·성격 논의가 분분했던 만큼이나 이를 둘러싼 異見도 분분하다. 위로는 儒·佛이 교체하던 조선 초기설이 있고,0662)韓㳓劤, 앞의 글(1958). 아래로는 北學論이 등장하는 18세기 후반기로 보는 견해가 있다.0663)池斗煥, 앞의 글(1987). 무려 4세기간의 시차가 나는 셈이다. 그러나 대체로는 양란기인 16세기 말부터 17세기 전반기까지의 사이에서 실학이 성립한 것으로 보고 있다.

 고려말·조선 초에는 주자학(유교)이 스스로 실학의 입장에서 불교를 虛學으로 배격하였으며 經學(講經)論 역시 修身齊家의 실학을 자처하여 詞章論을 부박한 허학이라고 비판했었다. 실학·허학 시비는 유교 주자학과 異敎·異學인 불교와의 사이에서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유교 주자학 내부에서도 제기되는 문제였다. 특히 고려, 조선 왕조교체 과정에서 드러난 강경 온건의 갈등은 개혁과 반개혁(보수)이라는 노선대립의 양상을 띤 것이기도 하였다.0664)李相佰,≪李朝建國의 硏究≫(乙酉文化社, 1949).
韓永愚,<朝鮮建國의 政治·經濟 基盤>(≪朝鮮前期 社會經濟硏究≫, 乙酉文化社, 1983).
그러나 이 때의 대립 갈등은 중세적 왕조체제의 재정립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중세사회의 해체과정에 있었던 조선 후기의 그것과는 역사적 성격을 달리하는 것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이 때의 실학은 ‘주자학적인 實學’이었다.

 실학의 성립을 18세기 말로 늦추어 보는 견해 역시 곤란한 점이 있다. 이는 종래의 실학을 朝鮮性理學과 北學으로 나누어 후자만을 실학으로 인정하자는 주장이다. 실학의 개념을 명료하게 제시하려는 시도 자체는 탓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여기에는 정통주자학과 이에 맞서는 여타의 사상조류를 다 같은 ‘조선성리학’으로 묶어버려 그 내부에 존재하는 학문·사상의 특징과 차이점, 특히 보수와 진보로 나뉘는 이념의 차이를 간과해버리게 되는 문제점이 있다. 북학계열만을 내세워 강조하면 그 나머지 비북학계열(조선성리학)의 의의를 소홀히 해버리게 되는데 그치지 않는다. 17세기 이래로 전개되는 조선 후기 사회의 체제적 변동과 사상계의 대응이 가볍게 간주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실학의 의의가 축소되고 조선 후기 사회·사상운동의 규모와 내용 전체가 왜소화되고 말 우려가 있는 것이다. 더구나 북학의 기원을 16세기 후반으로 올려 잡아보는 견해도 있는 점을0665)金龍德,<重峰趙憲硏究>(≪省谷論叢≫5, 성곡학술재단, 1974;≪朝鮮後期思想史硏究≫, 을유문화사, 1977).
―――,<北學思想의 原流硏究-제1부 重峰의 實學思想>(≪東方學志≫15, 1977).
고려하면 북학만이 실학이라는 이해방식은 곧 ‘北學=實學’이 되어 조선 후기 실학의 성립시기는 물론 그 개념문제를 더욱 혼란스럽게 하는 것이라 하겠다.

 종래 다수 논자들의 주장처럼 대개 17세기 전반기야말로 실학 태동의 기운이 확실해지는 시기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 무렵에는 임진·병자의 兩亂으로 야기된 왕조체제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사회적·학문적 움직임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관인·식자층 일각에서 종래의 國定敎學이었던 주자학에 대한 비판과 반성이 일어나고, 大同法의 실시와 軍役制의 釐正을 위한 논의가 제기되는 등 정부 차원의 제도개혁이 시도되었던 사정에서 충분히 확인된다. 그리고 이 때부터는 전통적인 經學·性理學·禮學·史學은 물론이고 農學·醫學·兵學·天文學·地理學·文字(언어)學 등, 실무·실용적인 학문 연구가 점차 확대되고 있었다. 또 불교(禪學)·老莊學·西學(西敎)이나, 先秦·漢唐의 유학, 陽明學 등을 포함하는 여러 사조·유파들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물론 이를 통해서 정치·경제·군사·교육 등 현안의 해결방안을 찾으려는 것이었다. 이런 여러 정황이야말로 실학이 주자학과 대별되는 반주자학의 조류가 형성되고 있음을 말해주는 단서들이었다.0666)1950, 60년대의 실학연구자들이 조선 후기 朱子學 이외의 학문동향에 관심을 기울였던 것은 이러한 사정을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예컨대, 老莊學에 대해서는 李丙燾(앞의 글, 1967), 西學(西敎)에 대해서는 洪以燮(<實學과 西學>,≪亞細亞學報≫4, 영남대, 1967 등)·李元淳(≪朝鮮西學史硏究≫, 일지사, 1986) 등, 先秦과 漢唐의 儒學에 대해서는 李乙浩(앞의 책, 1966, 1980), 陽明學에 대해서는 尹南漢(≪朝鮮時代 陽明學硏究≫, 집문당, 1982), 考證學·北學에 대해서는 全海宗(<淸代學術과 李朝實學-序論的 考察->,≪實學論叢≫, 전남대, 1975)·金龍德(≪朝鮮後期 思想史硏究≫, 을유문화사, 1977)·劉奉學(≪燕巖一派 北學思想硏究≫, 일지사, 1995) 등의 연구가 그것이다. 柳馨遠의≪磻溪隨錄≫은 이러한 사회·사상계의 분위기에서 이룩된 성과 가운데 대표적인 政論書였다. 그리고 그의 등장은 실학이 새로운 학파로 형성되는 劃期를 가름하는 일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앞에서도 말했듯이 양란 자체를 실학이 발흥하는 일차적 요인으로 보기는 어렵다. 양란의 충격이 비록 컸다 하더라도 그것은 당시 동아시아 국제환경이라는 밖으로부터의 변수, 부차적인 계기였을 뿐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임진왜란은 처음 16세기 후반기의 조선사회 내부 사정이 일본의 군사행동을 유발한 측면도 있었다. 전란의 결과로 중국에서는 명·청 왕조교체가 일어났고 침입의 장본인 일본에서는 德川幕府가 새로 성립했다. 그러나 피해 당사자 조선은 일단 왕조의 멸망은 모면했으므로 어떤 의미에서는 그 타격이 적은 것이기도 했다.

 요컨대 양란기의 체제적인 위기상황은 16세기 이래로 계속된 사회변동의 연장선 위에 있었다. 양란기, 즉 17세기의 역사적 변동은 16세기의 그것에 繼起하되 양란으로 더욱 촉진된 것이었다.0667)이러한 견해는 이미 이른 시기에 나와 있는 터이다. 千寬宇의 실학발전 3단계설(준비기·맹아기·전성기)은 이 점에서 일정한 의의가 있다(앞의 글, 1952∼3, 참조). 바로 여기에 실학이 태동하는 내인이 있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실학이 발흥하는 사회, 역사적 단서는 조선왕조의 기본 성격과 그 변동 속에서 찾아져야 하겠다.

 조선왕조는 그 성립 후 거의 1세기를 거치는 동안 중세집권체제의 기반을 재정비하는 방향에서 운영되었다. 사람을 그 出自에 따라 良賤·嫡庶·班常의 관계로, 또 인륜·도덕에 의거하여 上下·貴賤·尊卑의 관계로 峻別하고 이를 통해서 직업은 물론 모든 인간·사회관계가 관철되도록 했다. 이러한 신분차등제는 自作 소농경영과 지주전호제의 균형을 지향하는 농본주의는 물론 양반 사대부가 주체가 되고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정치질서의 사회적 기초이기도 하였다. 중앙과 지방의 정치·행정·군사·교육·과거제도가 그 매개고리인 收租權分給制·兩班官僚制와 함께 확립되었으며, 토지와 인민에 대한 직접적·통일적 지배를 관철하기 위한 봉건적 집권체제의 운영원리로서 주자학을 적극 채용하여 國定敎學의 지위를 굳혔다. 그리하여 세종대의 문화적 성과로 입증되듯이 15세기의 조선사회는 역사상 보기 드문 사회, 경제적 안정을 이룩하였다.0668)김태영,<서설-조선 전기 사회의 성격>(≪한국사-중세사회의 발전 1≫7, 한길사, 1994).

 15세기 말에 이르면 두 차례의 士禍와 곧 이은 反正을 계기로 정치주도세력이 종래의 勳舊에서 士林으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6세기에는 사림의 문중·향촌사회 기반이 안정되는 가운데 정치가 크게 활성화되었다.0669)李樹健,≪嶺南士林派의 形成≫(영남대 출판부, 1979).
李成茂,≪朝鮮初期 兩班硏究≫(一潮閣, 1980).
李秉烋,≪朝鮮前期 畿湖士林派硏究≫(一潮閣, 1984).
李泰鎭,≪朝鮮儒敎社會史論≫(지식산업사, 1989).
사림은 특히 주자학을 근거로 士論=公論이라는 이름의 정치언론을 강화하여 국왕과 기성세력의 정치적 무능과 도덕적 약점을 비판함으로써 자파의 정치적 정당성과 집권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이로써 종래 國王↔大臣을 축으로 하던 정치운영이 國王·大臣↔言官·郞官이라는 대응관계로 전환해가고 마침내 선조 초기에는 사림의 정계 석권이 일단락되었다.0670)宋贊植,<朝鮮朝 士林政治의 權力構造>(≪經濟史學≫2, 한국경제사학회, 1978).
金武鎭,<朝鮮前期 政治構造에 관한 硏究動向과 國史敎科書의 敍述>(≪歷史敎育≫43, 1988).
김우기,<조선전기 士林의 銓郞職 진출과 그 역할>(≪大丘史學≫29, 1986).
李秉烋,<朝鮮前期 支配勢力의 葛藤과 士林政治의 成立>(≪民族文化論叢≫11, 영남대, 1990).
崔異敦,≪朝鮮中期 士林政治構造硏究≫(一潮閣, 1994).
정계가 사림 일색으로 통일되자마자 곧이어 그들의 자체분열이 시작되고 이른바 동서분당이 가시화되었다.0671)姜周鎭,<黨爭以前의 李朝政派>(≪李朝黨爭史 硏究≫, 서울대 출판부, 1971).

 조선왕조와 사림과 주자학의 삼위일체적인 결합은 하나의 완결된 구조로서 지배체제의 안정성을 보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림의 분열과 주자학의 사상적 분화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그들은 처음 주자학을 공통의 이념근거로 하고 있었지만 당파를 달리하게 되면서 주자학에 대한 이해방식 역시 달리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잘 알려진대로 李滉과 李珥의 학풍상의 차이가 뒷날 嶺南學派와 畿湖學派로 나뉘고 이것이 각기 동인과 서인의 당파적 대립 근거였던 사정이 이를 잘 말해준다.

 사림세력의 분열과 주자학의 학리논쟁이 전개되는 현실적 배경에는 예컨대 수조권분급제의 소멸과 이에 따른 지주제의 확대,0672)金容燮,<前近代의 土地制度>(≪韓國學入門≫, 대한민국 학술원, 1982).
李景植,≪朝鮮前期土地制度硏究≫(一潮閣, 1986).
金泰永,≪朝鮮前期土地制度史硏究≫(지식산업사, 1983).
金鴻植,<封建的 小農民經營의 成立>(≪朝鮮時代 封建社會의 基本性格≫, 박영사, 1981).
김건태,<16세기 在地士族의 農莊經營에 대하여>(≪成大史林≫7, 1991).
전세의 永定化와 貢物의 代納·防納化,0673)金錫亨,<李朝初期 國役編成의 基底>(≪震檀學報≫14, 1941).
田川孝三,≪李朝貢納制の硏究≫(東京, 東洋文庫, 1964).
尹用出,<15·16세기의 徭役制>(≪釜大史學≫10, 부산대, 1986).
군역에서의 代立制·布納制와 良役化,0674)李泰鎭,<近世朝鮮前期 軍事制度의 動搖>(≪韓國軍制史-근세조선전기편-≫, 육군본부, 1968) 참조. 그리고 농민층의 投託과 流離逃散으로 인한 담세층의 감소, 賦稅의 族徵·隣徵이라는 악순환이 가로놓여 있었다.0675)지승종,<조선전기의 投託과 壓良爲賤>(≪한국사회사연구회논문집≫8, 한국사회사연구회, 1987). 이는 田稅·貢納과 軍役을 중심으로 하는 토지제도·수취체계가 무너지고 농민생활·농업경제가 파탄의 위기에 빠져드는 사정으로서 유통경제의 발달과 지방 場市의 증가 등 경제구조의 변동에 기인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그 보다는 빈부 격차의 확대와 농민층의 광범한 몰락·私民化에 더 큰 원인이 있었다. 李珥가 당시의 사회사정을, “元氣가 다되어 떨치고 일어서지 못하는 노인”0676)李 珥,≪栗谷全書≫권 30, 經筵日記 3.이나, “오랫동안 돌보지 않아서 퇴락해버린 큰 집”0677)李 珥,≪栗谷全書≫권 5, 萬言封事(甲戌).에 비유하고 있음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결국 16세기 말엽의 조선사회는 각종 제도·법령의 폐단과 지배층의 과도한 농민수탈로 야기된 내부 모순으로 집권체제의 위기상황을 맞이하고 있었다. 이는 14세기 말의 왕조교체로 일단 안정국면을 실현했던 사회질서가 이 시기를 경과하면서 다시 동요하기 시작한 때문이었다. 이렇고 보면 임란 전야에 이이가 외적의 침입 가능성을 예견하고 시급한 국방력 건설을 주장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던 셈이다. 요컨대 임진왜란과 그 수습과정에서 겪은 두 차례의 胡亂(丁卯·丙子)은 16세기 이래의 사회변동과 구조적인 모순을 한층 증폭시켰다. 그리고 이 무렵의 양심적인 관인·식자들 일각에서는 이러한 사회·국가적 위기상황을 직시하면서 이에 대한 타개 방안들을 제기하게 되었다. 바로 여기에 실학이 태동하는 단서가 있었다.

 아무튼 초기의 실학은 임란 전야와 전후의 수습기를 거치면서 점차 자리잡아 갔다. 이 때의 주목할만한 관인·학자로서는 대개 李之菡·李珥·趙憲·柳成龍·韓百謙·柳夢寅·李睟光·許筠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은 土地·賦稅·奴婢·官制·科擧·國防 등에 관한 제도개혁론, 혹은 保民·王政論, 對外交易論, 取末補本論을 제기하였다. 이들의 논점은 한결같이 낡은 제도와 법규를 更張·變通하여 民生을 안정시키고 국가의 기반을 강화해야 한다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實事에 힘써서[務實] 실질적인 성과[實功]를 거두는 정치를 이룩해야 한다는데 모아지는 것이었다.

 그렇더라도 학문 대상이나 방법은 아직 단조롭고 제한된 범위에 머물러 있었으며 주자학의 논리방식에서 크게 벗어난 것이 아니었다. 추구하는 대상 주체도 봉건적 속박에 묶인 농민층이었으므로 조선 후기에 등장하는 신흥사회세력의 존재가 시야에 들어올 수도 없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18, 9세기 실학의 문제의식이나 기본 논점들이 이미 싹트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말하자면 실학은 務實·實事 등 현실적용을 강조하는 체제내적인 초기의 학문단계로부터 점차 현실의 정치·사회의 한계와 모순을 극복해서 새로운 사회건설을 지향하는 신흥계층의 변혁적 사회사상으로 발전해 간 사유방식·사상운동이었기 때문이다.0678)실학의 발전단계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들 참조.
金良善, 앞의 글(1955).
千寬宇, 앞의 글(1952∼3).
趙璣濬, 앞의 글(1967).
全海宗,<實學의 槪念>(≪韓國과 中國≫, 지식산업사, 1979).

 무실과 이에 따른 경장을 내세운 논자로는 누구 보다도 먼저 이이를 꼽아야 할 것이다. 그는 務實·實功·時勢를 강조함은 물론이고, ‘欲並與實學’,0679)李 珥,≪栗谷全書≫권 4, 論朋黨疏. 혹은 ‘必務實學’0680)李 珥,≪栗谷全書≫권 30, 經筵日記 3. 등과 같이 實學이라는 표현을 자주 쓰면서 당장 낡은 법제를 개폐하는 경장·변통에 착수하자고 주장하였다.0681)李 珥,≪栗谷全書≫권 5, 萬言封事(甲戌). 즉, “時務는 때와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그 크고 중요한 것으로는 창업과 수성과 경장의 세 가지 뿐”0682)李 珥,≪栗谷全書≫권 25, 聖學輯要 7, 爲政 下, 識時務.인데, 잘 갖추어진 법규를 지키기만 하면 되는 수성과 달리 경장은 현명한 군주의 결단과 유능한 신하의 보필[明君哲輔]이 있어야만 되는, 창업 다음의 어려운 일이라고 했다.0683)위와 같음. 또 때를 알고[知時] 실상에 힘쓰는 것[務實]이 정치와 사업의 요령이듯이0684)李 珥,≪栗谷全書≫권 5, 萬言封事(甲戌). 나라의 경영에서도, “때에 맞게 변통하여 법제를 만들고 민생을 救濟하는 것[時宜]”0685)위와 같음.이 우선이었다.

 전시 재상이었던 유성룡은 왜란의 와중에서 舊習이나 衆情에 구애되어 있는 관인·식자 일반의 안이한 태도를 비판하고 경장의 차원에서 적극적인 對倭戰守策을 마련했다. 즉, “비상한 사태에 당하면 비상한 조치를 내려서 變通救時하는 계책을 마련하지 않을 수 없다”0686)柳成龍,≪西厓先生文集≫권 8, 柳祖訒上疏回啓(乙未).거나, “지금에 와서 변통하지 않는다면 燎原의 형세가 날로 심해져서 마침내 나라의 근본이 무너질 것”0687)柳成龍,≪西厓先生別集≫권 2, 無氷箚.이라는 지적은 그러한 인식의 일환이었다. 임란 후의 수습기에 살았던 이수광은 仁祖反正 직후의 불안한 사회상황을, “살 곳을 잃고 變亂을 꾀하는 백성들이 사방에 떼지어 모이고 있으니 한나라에 赤眉黃巾賊이 다시 일어난듯 싶다”0688)李睟光,≪芝峯集≫권 22, 條陳懋實箚子(乙丑).고 우려하면서, “만약 務實하지 아니하고 헛되이 文具만 가지고 治功을 이루려 한다면 만가지 일이 모두 虛事로 돌아갈 것”0689)위와 같음.이라고 환기시켰다. 그는 특히 修己治人이란 바로 實心·實踐·實用·實功에 있음을 강조하였다. 이 무렵에는 앞서 이이의 ‘保國安民’이나, 유성룡의 ‘便民之方’과 같은 논리의 ‘恤民之實’(이수광), ‘太上安民 其次足食’(유몽인)0690)≪於于集≫권 3, 送別咸鏡監司張好古(晩)詩序. 등의 표현이 더욱 많아졌다.

 이처럼 임란을 전후해서 여러 논자들은 安民·保國, 즉 국가 위기상황의 극복을 위한 時務와 時宜, 實功과 務實을 강조하고 이를 경장론·변통론으로 이어갔다. 이는 자신의 눈으로 직접 현상에서 문제를 발견하고 그때그때의 상황에 적합한 해결책을 마련하려는 태도이며 관념·사변 일변도가 아닌 경험·실제적 접근방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비록 주자학의 논리에서 출발하면서도 이를 탈피하는 방향을 취하게 되는 점에서 주자학의 논리 범주에 안주하려는 논자들의 그것과는 분명히 다른 태도이며 입장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경장·변통의 핵심은 낡은 법령과 제도를 재정비하는 데 있었다. 이이는 이를 법제가 오래되면 폐단이 생기고[法久弊生] 누적된 폐습은 고쳐서 바로잡아야[矯革宿弊] 한다는 관점에서 생각했다.0691)이는 물론, “낡은 법제의 개혁은 그 옳고 그름과 이롭고 해로움을 따져서 그 혜택이 오직 백성들에게 돌아가도록 할 뿐이다”(李珥,≪栗谷全書≫권 11, 答成浩原(丙子))라고 했듯이, 고통받는 민생을 구제하고 무너진 사회기강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였다. 그의 변통론은 신분·사회관계의 지나친 갈등을 완화하는 일, 중간수탈이 고질화된 수취체계를 정비하고 政·官制 운영의 효율을 높이는 일, 그리고 변통의 추진 주체인 군주·관료·식자층이 각성하는 일의 세 가지로 마련되었다.

 사회질서의 긴장을 완화하고 신분간의 相須關係를 안정시키는 일은, 신분·門地를 넘어선 인재의 활용, 貢賦·公役 부담의 減下와 公平化, 公私賤에 대한 溫情的 배려, 천인층의 증가 억제 등을 강구하는 문제였다.0692)李東仁,<栗谷의 身分觀과 身分制度改革論>(≪韓國學報≫76, 일지사, 1994), 8∼11쪽. 그 요점은 신분제의 골격을 유지하되 양반 지배계층이 온정을 가지고 농민층의 부세부담을 일부 나누어 지며 제한된 범위에서 신분상승의 길을 열어놓는데 있었다. 알려진 바와 같이 이이가 庶孼과 公·私賤人에게 武才를 시험하거나 納粟의 기회를 부여하여 仕路許通, 혹은 免賤·從良하자고 건의했던 것0693)李 珥,≪栗谷全書≫권 5, 萬言封事(甲戌)·권 7, 陳時事疏.은 이러한 발상의 반영이었다.0694)이는 가용인력을 국가적 차원에서 동원하는 방법이기도 했는데 그 무렵 柳成龍은 임진왜란의 抗戰力量을 강화하는 방안으로 이를 원용했다. 수취체계의 개선, 통치질서의 정비 강화와 관련해서는, 賢材(經明行修者)의 발굴과 적재적소(人器相稱) 임용, 유능자의 不次擢用, 적임자의 專責久任, 年功昇進의 억제와 공정한 업적평가에 따른 任免·昇降, 科擧制本位의 지양과 薦擧制의 확대, 서얼의 사로허통 등 관리선발, 특히 수령 임무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또, 언로의 확대, 유사 관서의 통폐합과 冗官의 汰去, 영세한 郡縣의 倂省과 吏胥作弊의 규제, 內需司 기능의 戶曹로의 통합, 왕실·외척의 정치관여 배제, 수령·방백의 녹봉지급 등도 기구·관원의 축소와 능률 향상을 지향하는데 필요한 조치로 생각했다. 弊政釐正의 추진기구로서 한시적인 經濟司를 설치하자고 제안하였다.0695)李元述,<李栗谷의 政治思想 硏究>(≪社會科學硏究≫14-1, 영남대, 1994).
李東仁,<栗谷의 政治思想과 政治改革論>(≪韓國學報≫77, 1994).

 이이는 경장의 주체가 군주를 위시한 관인 유자층임을 분명히 했다. 따라서 이들에게는 治者로서의 道理를 자각하고 국가와 민생을 우선하는 인식과 실천을 요구했다. 그는 특히 務實이 군주의 修己工夫에 요점이 된다고 하면서0696)李 珥,≪栗谷全書≫권 15, 東湖問答(己巳). 정치운영·정책론을 언급한 많은 부분에서 군주의 자각과 결단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君主論의 연장선에서 格君心과 親民, 기강의 확립, 법제의 준수를 관인·치자층이 수행해야 할 책무로 꼽았다. 경장이라는 이름의 정치·사회개혁은 군주의 의식을 一新하는 일에서 출발하여 나라 안팎의 크고 작은 모든 문제에 이르는 총체적 작업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본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이이의 경장론은 군주의 자기혁신과 신료 집단의 각성을 촉구하고 여기에 제도의 모순과 그 운영상의 불합리한 점을 개선하는데 모아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로써 保國安民은 실현되고 조선왕조는 中衰期의 침체와 위기를 벗어나 집권체제의 중흥기를 맞게 될 것이었다.

 한편 앞에서도 말했듯이 조선 후기 실학의 근본 과제는 주자학으로부터의 탈피였다. 그리고 토지문제는 그 구체적인 지표의 하나였다. 韓百謙은 箕田論을 제기하여 토지문제야말로 이 시기 경장·변통의 핵심 문제라는 인식을 분명히 한 선구자였다. 그도 역시, “法이 오래되면 폐단이 없을 수 없음”0697)韓百謙,≪久庵集≫下, 貢物變通疏.을 인정하고 ‘정치[爲治]’는, “때에 맞춰 변통하고 일에 당해서 결단을 옳게 하여 常規에 구애되지 않아 法外의 意義를 얻는 일”이라고 믿었다. 그가 낡은 법제를 ‘先王成憲’이라 해서 고수하려는 태도를 가리켜, ‘膠柱鼓瑟 刻舟求劍’이라고 비판해 마지 않았던 까닭도 여기에 있었다.0698)위와 같음. 한백겸은 賦稅를 공평히 하여 농민경제를 均質化하는, ‘平賦均民’에 경장의 목표를 두었는데 이러한 공평부세의 전제로서 토지제도의 개혁이 필요다고 본 것이었다.

 한백겸은 학문적 관심대상이나 연구방법을 종래 주자학자들과 사뭇 달리하였다. 스스로의 思考를 중시하되 字句의 訓義는 물론이고, 錯綜處의 融會, 疑晦處의 破綻, 窒碍處의 通透를 추구하여 거듭 硏窮함으로써 의문을 그대로 놓아버리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또 그는 經傳(六經)의 이해방식에서 註疏에 가리어 本旨를 잘못 알기 쉬운 폐단을 경계하고 의문되는 곳은 비록 先賢의 견해라도 구애받지 말 것을 강조했다고 한다.0699)鄭經世,≪愚伏文集≫권 18, 通政大夫戶曹參議韓公墓碣銘(竝序). 사물·문헌연구에서 분석·종합과 추론을 바탕으로 고증이나 비판에 철저했다는 것이다. 기존의 권위를 묵수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自家의 견해라고 해서 고집하지 않는 실증적·객관적 태도라고 할 수 있겠는데 아마 이것이 주자학을 맹목 존신하는 속류 관인·학자들과 크게 다른 점이었을 것이다.0700)朱子의 학설을 상대화하고 독자적인 견해를 표명하는 한백겸의 실증적이고 독창적인 학문에 대해서는 이미 당대의 평판이 있었다. 즉 啓蒙揲蓍辨·多方解·豳風說 등 몇 편의 논문은, “先賢成說을 벗어난 논지로서 그 精粗深淺은 쉽게 알 수 없으나 覃思力索한 功을 금방 느끼게 된다”(鄭經世,≪愚伏文集≫권 18, 通政大夫戶曹參議韓公墓碣銘)거나, “象數之變, 制度之宜는 연구가 매우 깊고 前說에 구애되지 않았으나 程子·朱子의 嫡傳 사이에도 서로 異同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는 결코 先儒의 定論에 異說을 세우려는 의도가 아니라”고 변호하기도 하였다(韓百謙,≪久庵集≫, 序(李植), 2).
尹熙勉,<韓百謙의 東國地理志>(≪歷史學報≫93, 1982).
고영진,<한백겸의 심의설>(≪조선중기 예학사상사≫, 한길사, 1995).
이 시기 실학의 학풍은 이러한 한백겸의 태도에서 그 특징이 크게 드러나는 것이라 하겠다.

 ≪東國地理誌≫로 잘 알려져 있듯이 한백겸은 새롭고 독자적인 역사지리학의 영역을 개척했다. 역사발전·사회통합의 계기를 종래와 같이 도덕적 기준이나 개인의 영웅적 능력에서 구하기 보다 지리·환경 요인이나 사회구조·국가정책 등 합리적·객관적 조건에서 찾으려 한 것이었다.0701)鄭求福,<東國地理誌에 대한 一考察 -歷史地理學派의 成立을 中心으로->(≪全北史學≫2, 1978).
尹熙勉, 위의 글.
鄭求福,<韓百謙의 史學과 그 影響>(≪震檀學報≫63, 1987).
高英津,<한백겸>(≪한국의 역사가의 역사학≫상, 창작과비평사, 1994).
그리고 이로써 종래 신라 중심의 역사·지리인식에서 벗어나는 관점을 세웠다. 이는 말하자면 민생을 안정하는 위에서 부국강병을 실현하고 적극적인 대외정책에 나서야 한다는, 양란기의 절실한 대내외 상황을 진취적으로 타개하려는 역사·현실인식을 반영한 것이었다. 한백겸의 역사지리연구는 그의 ‘箕田’ 연구와 함께 柳馨遠·洪萬宗·申景濬·李肯翊·安鼎福·丁若鏞 등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이 방면 연구에 큰 지표가 되었음은 물론이다.0702)鄭求福, 앞의 글(1987) 참조.

 역사지리 연구에서 보인 한백겸의 문제의식은 箕田에 대한 관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의도는 井田制가 실재했던 제도임을 입증하고 그 정전제 이념, 즉 耕者有田의 원칙에 입각한 토지제도 개혁의 역사적·이론적 근거를 마련하려는 데 있었다.0703)바로 이 점에서, 한백겸의 箕田論은 당시 주자학자들의 箕子에 대한 이해나 연구가 주로 조선왕조의 국가기원, 유교의 東傳과 조선사회의 유교화에 초점이 맞춰졌던 것과는 그 성격을 전혀 달리하는 것이었다. 이 시기의 기자 인식에 대해서는, 朴光用,<箕子朝鮮에 대한 認識의 變遷>(≪韓國史論≫6, 서울大, 1980), 참조. 이미 16세기에는 토지소유의 불균형이 심각한 지경에 이르러 均田論·限田論이 제기되는 가운데 논자들은 토지제도의 始原으로서 孟子의 井田說이나 箕子 井田에 주목하고 있었다. 또 주자학의 이해가 깊어지고 이로부터 典據를 찾으려는 경향이 더해갔으므로 토지문제에 대한 주자의 본의를 확인하려는 시도 역시 활발해졌다. 양란기의 國家再造문제가 떠오르면서 더욱 그러하였는데 한백겸의 기전론은 바로 이 무렵에 제기된 것이었다. 주자는 정전제를 聖王의 이상적인 법으로는 공감하면서도 정전의 실재나 토지제도의 전면개혁에는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그러므로 이제 기전의 실체 확인은 정전제 원리에 의한 토지제도의 실현 가능성을 인정한 것이며 동시에 주자의 토지론에는 정면대립하는 논점이 아닐 수 없었다. 조선 후기 경제사상·개혁사상은 그 핵심문제인 토지제도를 둘러싸고 주자적 입장과 반주자적 입장으로 크게 분립하였던 것이고 반주자적 토지론, 즉 그 뒤 2백여년 동안 실학의 개혁사상의 기축이었던 토지개혁론은 이렇게 한백겸의 기전론에서 성립하였던 것이다.0704)주자의 井田制難行說, 한백겸의 箕田論의 내용과 의의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을 참고.
金容燮,<朱子의 土地論과 朝鮮後期 儒者>(≪增補版 朝鮮後期農業史硏究≫, 一潮閣, 1990).
―――,<朱子의 土地論과 朝鮮後期의 儒者-地主制와 小農經濟의 問題->(≪위의 책≫), 410∼413쪽.

 이상과 같이 조선 후기 실학의 시원적 계보는 일단 이이의 무실·경장론과 한백겸의 토지론을 중심으로 정리된다. 모두 시의·실공·무실을 강조하면서도 이이는 정치·사회의 문제점을 개별적인 것으로 파악하고 그 해결방법도 실무·실제적인 차원에서 사안별로 제시하였다. 이에 비해 한백겸의 논리는 복잡다단한 현상계의 개별 사안 자체보다는 그 배후의 원인·본질의 문제를 직시하고 근원적인 대안을 찾으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기전설이 지니는 의의가 바로 그렇다. 하여튼 이들이 제기하는 실무·변통론의 논리야말로 실학의 학문적·이념적 기원이 되는 것이라 하겠다.

 16세기 말의 임란기를 거쳐 호란기에 이르면서 실학적인 분위기는 점차 확대되었다. 이 때의 논자로서는 한백겸을 위시해서 유몽인·이수광·허균 등을 꼽을 수 있었다. 이들은 점차 당쟁이 치열해짐에 따라 정치적인 제약을 받았지만0705)허균과 유몽인은 당쟁의 갈등 속에서 반대파에게 역적으로 몰려 처형되었다. 현실문제에 대한 학문, 이념적 소신은 분명히 표명하고 있었다. 우선 도교·불교·양명학 등을 이단으로 간주하면서도 일정하게 관용하고 六經·古文을 중시하여 이를 四書와 융회·절충하려는 태도를 취했다. 이는 그들의 학문적 개성과 진취성을 잘 보여주는 것이었고, 때문에 이 무렵의 주자학이 정통 주류학문의 지위를 한층 강화해가는 사정과 대비되었다. 아마도 여기에서 그들의 학풍이 주자학적인 理氣人性說과 心學·修己治人이 일단 전제되는 것이면서도 務實·實事·實用의 학문, 즉 실학이 확연해지는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그들의 이러한 인식태도·학문방법은 이를테면, 君臣相濟와 이에 의한 붕당의 해소, 능력에 따른 인재등용과 서얼·천인에 대한 防限撤廢, 부세·공물의 완화와 진휼의 확대에 의한 對民按撫, 또 魚鹽·鉛銀鐵의 개발과 화폐의 사용, 路鋪의 開設, 선박·수레의 활용 등 유통경제의 확대, 상업적 농업의 장려, 그리고 軍丁·軍糧·軍器의 확보와 鍊兵·關防의 정비에 의한 자주국방의 강화 등등의 견해로 구체화되었다.0706)韓永愚,<李睟光의 學問과 思想>(≪韓國文化≫13, 서울大, 1992).
李萬烈,<芝峰 李睟光 硏究-그의 社會思想을 中心으로->(≪淑大論文集≫15, 1975).
韓明基,<柳夢寅의 經世論 연구-임진왜란 이후 사회경제 재건의 한 방향->(≪韓國學報≫67, 1992).
李離和,<許筠의 개혁사상>(≪한국의 사상≫, 열음사, 1984).
金容燮,<17世紀 初·中葉 農書의 새로운 農業技術과 地主立場의 農學思想>(≪朝鮮後期 農學史 硏究≫, 一潮閣, 1988), 113∼132쪽.
이들의 논의는 임란 이전의 실학적인 전통을 계승하고 더욱 진전시키는 차원의 것이다.

 특히 이 무렵 정부와 지배층은 임란으로 인한 충격과 위기를 국가재조의 차원에서 대처하고 있었는데 이들 실학의 학풍은 자연스럽게 진보·개혁적인 입장에서 마련하는 국가재조론의 사상 경향을 대변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전통은 그 뒤 반세기가 채 되기도 전에 유형원의≪磻溪隨錄≫을 통해서 국가체제 전반에 걸치는 개혁안으로 집대성되기에 이르렀다.

<金駿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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