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Ⅳ. 학문과 종교
  • 7. 불교계의 동향
  • 4) 의승군의 조직과 활동

4) 의승군의 조직과 활동

 한국불교의 하나의 특성으로 그 호국적 史實을 논할 때, 임진왜란을 통한 義僧軍 활동은 특기할 만 하다. 물론 조선 중기 의승군 활동은 비단 임진왜란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정묘·병자호란 때에도 그 활약상이 보이며, 남한산성(1624년 축성)과 북한산성(1711년 축성)의 축조 및 그 계속된 수비 또한 승군이 주 임무를 담당하였다. 그러나 호국의 정신성은 물론 조직규모나 활동내용 나아가 실제 성과에 이르기까지, 임란왜란 당시의 의승군 활동은 불교의 여타 호국사례와는 크게 대비되는 것임에 분명하다.

 임진왜란은 선조 25년(1592) 4월 왜군의 東萊城 침략으로부터 시작되는데, 이들과 접전을 벌인 최초의 의승군은 公州 甲寺에 있던 靈圭와 그가 거느린 8백 명의 의승군들이었다. 이 8백의승군은 趙憲의 7백의병과 합세하여 그 해 8월 왜적에게 함락당한 淸州城을 수복함으로써, 왜란 발발 이후 첫 승전을 기록하고 있다.

 비교적 개전 초기부터 큰 활동상을 보이고 있는 이런 의승군이 처음 이루어진 것은 선조 25년 5월 경부터인 것 같다. 몽진 길에 올라 평양에 머물고 있던 왕에게 당시의 병력현황을 밝히는 비변사의 啓書 가운데 6백 명 가까운 승군이 열거되고0771)≪宣祖實錄≫권 26, 선조 25년 5월 병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렇게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의승군이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된 것은 같은 해 7월 선조가 義州 幸在所에 머물 때 승병모집을 위해 妙香山에 있던 휴정을 초치한 이후부터이다.0772)≪宣祖修正實錄≫권 26, 선조 25년 7월 무오. 世亂을 구할 것을 간곡히 부탁하는 왕에게 휴정은 忠赤을 맹세하고 있으며, 이에 감탄한 선조는 그에게 八道十六宗都摠攝의 직을 내려 전 승군을 관장케 하였다.0773)<淸虛堂休靜大師碑銘>(≪朝鮮金石總覽 上≫), 854쪽. 이로부터 의승군의 전국적인 확대가 시작된 것이다.

 왕을 進謁하고 돌아온 휴정은 전국 8도 사찰에 격문을 보내 궐기할 것을호소하는 한편 그 자신 73세의 노령으로 문도들을 포함하여 自募한 승군 1,500명을 거느리고 順安 法興寺에 주둔하였다. 법흥사 주둔 의승군은 휴정의 위촉을 받은 義嚴에 의해 잠시 통솔되었는데, 의엄은 황해도에서 봉기한 義僧將이었다. 이어 관동을 중심으로 8백 명의 의승군을 모아 평양성 인근에 주둔해 있던 휴정의 제자 惟政이 합류하고부터 법흥사 의승군의 지휘는 유정이 맡았다. 이렇게 해서 의승군의 본거지가 된 법흥사 鎭營에 집결된 의승군의 수는 5천여 명에 이르렀다. 그 밖에 호남 지리산에서 處英이 의승군을 모아 봉기한 것을 비롯하여 각 도에서 의승군이 일어나고 있지만, 왜란 기간중의 정확한 의승군 수는 파악되지 않는다. 다만 법흥사에 집결했다는 그 인원을 통해 의승군 활동 초기의 규모를 유추해 볼 뿐이다.

 이런 의승군이 전국적인 조직을 이루었을 것임은, 이미 선조가 휴정에게 내린 팔도십육종도총섭의 직함을 통해 알 수 있다. 즉 중앙에 도총섭을 두고 그 아래로는 전국 8도에 각각 선·교 양종 2명씩 16명의 총섭을 둔 조직체계인 것이다. 조정으로부터 임명되어 직첩을 받았던 도총섭과 총섭은 ‘領軍討賊之僧’을 가리키는 명칭으로서,0774)≪宣祖實錄≫권 48, 선조 27년 2월 병자. 그것이 전국에 걸쳐 시행된 것은 선조 26년 8월부터였다. 그러나 마치 선·교 양종의 복구를 방불케하는 이 일원체계는, 바로 이 점 때문에 조정 유신들의 논란 대상이 되기도 하여 각 도에 반드시 2명씩의 총섭이 임명되지는 못하였다.0775)安啓賢,<朝鮮前期의 僧軍>(≪韓國佛敎思想史硏究≫附篇, 東國大 出版部, 1983), 386∼392쪽.

 도총섭·총섭의 지휘를 받는 의승군은 都元帥의 節制下에 관군과 협력하거나 또는 독자적으로 전투임무를 수행하는 한편 군량운송과 산성 축성 등 후방지원을 담당하며 準官軍의 형태로 활동하였다. 우선 임진왜란 당시 크고 작은 전투에서 활약한 의승군의 주요 전적을, 선조 26년 서울이 수복되어 왕이 還都하는 그 해 7월까지로 한정하여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0776)李章熙,<壬辰倭亂僧軍考>(≪李弘稙博士回甲記念 韓國史學論叢≫, 1969).
安啓賢, 위의 글.
禹貞相,<朝鮮佛敎의 護國思想에 대하여>(≪朝鮮前期佛敎思想硏究≫, 東國大 出版部, 1985).

① 靈圭軍·趙憲軍 청주성 수복 (선조 25년 8월) ② 영규군·조헌군 錦山 전투, 전멸 (선조 25년 8월) ③ 信悅軍·진주성 방어전 때 丹城에서 전투 (선조 25년 10월) ④ 休靜·惟政軍 평양성 탈환 전투 참전 (선조 26년 1월) ⑤ 處英軍 행주산성 전투에 참전 (선조 26년 1월) ⑥ 義能·三惠水軍 薺浦 공격에 참전 (선조 26년 7월) ⑦ 유정군 진주성 방어전 참전 (선조 26년 6월) ⑧ 도총섭 휴정 1백 명의 승군과 還都하는 大駕수행 (선조 26년 7월)

 이 밖에도 의승군의 전투활동은 육·해전을 막론하고 전국 일원에서 끊임없이 계속되어 큰 전적을 올렸다. 그러나 선조 26년 4월 서울이 수복되고 왜적이 남하하여 전황이 소강상태로 접어들면서부터는 의승군 활동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장기전에 대비하여 군량운송에 의승군이 투입되거나 대부분 의승군이 각지의 산성 축성의 임무를 맡았던 것이다. 또 일부 의승군들은 주둔지역 내에서 군량 조달을 위해 屯田을 개간하여 농사를 짓거나 뗄감을 모으는 등 전쟁물자 비축의 임무를 수행하고도 있다. 이같은 후방지원 및 전쟁대비 활동 가운데서도 특히 의승군의 산성축성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전국 각지에서 대대적으로 이루어져 갔다.0777)李章熙, 위의 글, 349∼354쪽. 유정이 西生浦에 주둔해 있던 적장 加藤淸正의 진영을 출입하면서 일본의 강화조건이 불가함을 역설하고 罷兵을 종용하는 등 외교활동을 벌였던 것0778)惟政의 행적 및 임진왜란 중 활동에 관해서는 金東華·金煐泰·睦楨培,≪護國大聖四溟大師硏究≫(東國大 佛敎文化硏究院, 1971) 참조. 또한 의승군 활동의 일부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의승군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여러 방면에 걸쳐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던 것이다.

 한편 7년간에 걸친 지루한 왜란이 끝나고 그 상처가 가시기도 전에 다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에도 의승군 활동이 이어지고 있다. 전쟁의 성격상 임진왜란 때의 의승군 활동에 비해 크게 눈에 띄지는 않지만, 이 때의 의승군 규모나 활약 또한 주목해 볼만 하다. 정묘호란 때에 활동한 의승장은 明照였다. 휴정-유정계의 법맥을 잇고 있는 그는 인조 5년(1627) 後金이 來侵했을 때 조정으로부터 八道義僧都大將에 임명되어 4천여 명의 의승군을 거느리고 安州에서 항전하여 큰 전공을 세웠다.0779)<虛白堂大師碑銘>(≪朝鮮金石總覽 下≫), 914쪽.
≪虛白集≫盧夢修序(≪韓國佛敎全書≫8), 380쪽.
다시 인조 14년에 淸軍이 침입했을 때에는 의승장 覺性의 활동이 돋보인다. 임진왜란 때 明將 李宗城과 함께 海戰을 지원하기도 했던 그는 선조 2년(1624) 승군의 남한산성 축성시에는 8도도총섭으로서 役事를 감독하여 3년만에 축성을 완성한 바 있다. 역시 휴정의 동문 浮休의 제자인 각성은 축성을 완료한 뒤 화엄사에 있던 중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승군을 모으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주로 남방 각지에서 모여든 3천여 명의 의승군을 ‘降魔軍’이라 이름하고 스스로 의승대장이 되었다. 각성은 이 의승군을 이끌고 북상하던 중 淸과의 굴욕적인 강화가 성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진군을 중지하였다.0780)<華嚴寺碧巖大師碑銘>(≪朝鮮金石總覽 下≫), 918쪽.
<法住寺碧巖大師碑銘>(≪朝鮮金石總覽 下≫), 923쪽.

 이상에서 대강 살펴온 바와 같이 조선 중기 의승군 활동은 전 불교계가 능력과 관심을 총집결시켰을 만큼 가장 비중이 큰 활동이었다. 그 결과로서 특히 임진왜란 이후 불교에 대한 국가와 사회의 인식이 새로워지고 어느 정도 그 위상이 높아진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의승군 활동은 어디까지나 불교 외적인 활동이었다. 따라서 국가의 성리학적 이념의 기본 억불방향에 큰 변화는 없었던 것이며, 불교계 또한 전후에는 다시 산중승단으로 돌아가 守黙할 수밖에 없었다.

<李逢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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