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란 이후 회례아악은 영조대에 잠시 복원되었을 뿐이어서 조선 중기의 회례아악은 거의 유명무실한 형편이었다.0923)≪英祖實錄≫권 106, 영조 41년 10월 계축.
반면에 중기의 제향아악은 초기와 마찬가지로 社稷, 文廟, 山川, 先農, 先蠶 등의 제사에 지속적으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그 아악곡은 다음<악보 9>와 같은 성종대의 祭樂0924)≪樂學軌範≫권 2, 時用雅部祭樂.을 그대로 썼을 것이다.
조선 중기 제향아악의 편성도 초기에 비하여 상당히 축소된 것이다. 인조대의 편성은 登歌 22명, 軒架 20명, 文舞·武舞 각 36명으로 당시 종묘의 편성규모와 비슷하게 되었다.0925)≪仁祖實錄≫권 20, 인조 7년 6월 갑술.
≪增補文獻備考≫권 105, 樂人. 그리고 그것은 향후 정조대까지도 달라지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0926)宋芳松,≪韓國音樂通史≫(一潮閣, 1984), 381쪽,≪춘관통고≫소재 악현참조.
이 시대 제향아악의 등가는 앞 시대에 비하여 歌 24명이 4명으로, 琴·瑟이 각 6명에서 각 2명으로 감소되고, 管 등의 수종의 악기가 없어졌고, 또한 헌가는 編鍾·編磬 각 9架가 각 1가로 줄었고, 管·簫 등 각각 10명씩 담당하던 여러 관악기의 인원이 평균 2명으로 축소된 것이다. 조선 중기의 등가와 헌가악현은 아악편성의 최소 요건만을 갖춘 것이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조선 중기 궁정음악의 여러 악곡들은 그 악곡내용에서 대체로 새로워졌다. 특히 제향악 외의 조회·연향 악곡들은 대부분 노래가 탈락한 기악곡의 형태로 바뀌게 되었고, 그러한 기악곡도 장단이 분명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양분되는 발달양상을 보인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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