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Ⅴ. 문학과 예술
  • 3. 음악
  • 3) 기악풍류의 성립과 발달
  • (2) 영산회상

(2) 영산회상

 영산회상은 조선 초에 성악곡으로 불려졌고, 그것은 다음처럼 간단한 향토조의 선율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악보 18>).0935)≪樂學軌範≫에 기록된 초기 영산회상은 女妓와 樂工에 의하여 回旋하며 일제히 불려진 점에서 메나리토리의 단순한 노래일 것으로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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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보 18> 영산회상의 기본선율
<악보 18> 영산회상의 기본선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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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간단한 황종궁 계면조의 노래선율은 거문고로 연주되면서 많은 間音을 추가하여 기악풍류 영산회상으로 탈바꿈하였고, 그것이 효종 2년(1651)의≪이수삼산재본금보≫에 처음 기록되었다. 다음<악보 19>는≪이수보≫영산회상의 첫 행이다. 가사 ‘靈’에 해당하는 下二(大五)의 연속으로 선율이 형성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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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보 19>≪이수삼산재본금보≫의 영산회상
<악보 19>≪이수삼산재본금보≫의 영산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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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류 영산회상이 성립되는 자세한 과정은 미상이다. 그러나≪양금신보≫에는 영산회상을 ‘舞蹈之節’ 이라 하여 싣지 않았고,≪현금동문류기≫에는 영산회상·여민락·보허자를 모두 ‘別曲’이라 하여 거문고로 연주하는 만대엽·북전·중대엽과 구별하였으므로, 이 시기 이후에 차츰 영산회상이 거문고 중심의 풍류음악으로 정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초기의 풍류 영산회상은 선율이 단조롭고 음역도 매우 좁다. 출현음이 宮을 중심으로 아래로 下二, 위로 上二에 이르는데 불과하다. 또한 위의 악보처럼 4대강 악보의 7행 길이로 된≪이수보≫의 영산회상 선율에는 동음 반복이 아주 많다. 특히 4대강의 첫 박에는 대부분 ‘스렁’ 또는 ‘사랭’으로 되었는데, 그 음들은 행의 첫 박에 나오는 음들을 반복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당시의 영산회상은 템포가 느리고 음높이의 변화도 많지 않아서, 유유한 선율진행으로 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처음에는 ‘周而復始’로 단순히 반복 연주되던 영산회상은 경종 4년(1724)의≪한금신보≫에 이르러 靈山會上還入과 靈山會上除指를 파생하였다. 이 초기변주곡은 그러나 本曲과 별로 선율이 달라지지 않았고, 다만 템포가 약간 빨라졌거나 가락이 조금 간략해졌을 뿐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변주곡은 靈山會相甲彈의 파생으로 이어졌고,0936)홍선례,<漁隱譜의 靈山會上 甲彈>(≪한국음악연구≫10, 1980), 25∼62쪽. 갑탄이 파생되는 시기에 영산회상도 길이가 조금 길어졌다.

 영산회상에서 파생된 새로운 악곡인 영산회상갑탄은 정조 3년(1779)의≪어은보≫에 처음 기록되었다. 이 곡은 영산회상의 머리선율을 제하고 선율을 높게 변주한 악곡인데, 영산회상이 거문고 유현4괘로 타는데 비하여 유현7괘로 연주한다. 따라서 영산회상갑탄은 그 宮이 영산회상보다 4도 높게 轉調된 악곡이고, 그 결과 본래의 계면조도 허물어진 악곡이 되었다.0937)영산회상갑탄의 악조는 향악기의 구조적 특성 때문에 본래의 황종궁 계면조가(4도 높게 변주된 결과) 중려궁의 평조로 변질된 것이다. 영산회상갑탄의 음계를 초기 영산회상의 음계와 비교하면 다음<표 1>과 같다.

  下二 下一 上一 上二 上三 上四
영산회상 大五
林 
大七
無 
方四
黃 
方六
夾 
方七
仲 
영산갑탄 大八
黃 

方七
仲 
方八
林 
方十
無 
方十一
潢  
方十二
汰  

<표 1>영산회상의 음계

 조선 중기의 풍류 영산회상은 이상과 같이 영산회상 한 곡이 오랫동안 애호되다가, 후에 선율을 높게 올려서 변주하는 갑탄을 파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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