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Ⅴ. 문학과 예술
  • 5. 무용·체육
  • 1) 무용
  • (5) 나례우인

(5) 나례우인

 조선시대의 연희문화는 ① 妓(장악원기, 내의원기, 혜민서기, 외방봉상기, 현수), ② 工(악공, 장악원악공, 외방봉상악공, 악생, 가동, 무동), ③ 배우(광대, 재인, 수척), ④ 花郞(兩中, 群中), ⑤ 社堂, ⑥ 巫女, ⑦ 農民(民俗的)들에 의하여 유지되었다.

 이들 가운데 妓·工·俳優가 그 주류를 이루었고, 나례나 明使·淸使 영접이 있을 때, 또는 野人, 倭人 接禮에 있어서 이들이 서로 모여 肆習을 하고 봉행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평소 관가에 매여 있는 교방기녀나 악공, 악생은 고사하고 지방봉상에 의한 악공이나 악생·창우까지도 巫系에 속한 광대나 水尺으로 대치하여, 이것이 조선시대의 연희문화를 수정하는 근본적인 계기가 되었다.1042)金東旭,≪한국가요의 연구≫(을유문화사, 1961).

 이러한 현상은 특히 임진·병자 양란 후 조정의 악사들이 많이 죽거나 포로가 되어 그 응급책으로 재인·광대를 각 고을에서 봉상시킨 뒤부터 두드러졌다. 그 뒤에도 해마다 여러 명씩 봉상되는 소임에 응하기 위해 巫契가 전국적으로 조직되었다. 천민이며 무당의 서방인 각 고을의 재인광대는 才人廳에 소속되어 수령의 행차 때 선두에서 三絃六角을 연주하고 연회 때에는 여러 가지 놀이와 재주를 연출하였다. 그리고 여러 고을의 재인청이 모여 각 도의 大房이 되었다. 그리고 대방에는 右道都山主와 좌도도산주가 있었으며, 그 밑에 執綱, 公員, 常務를 두어 서무를 맡겼다. 이 팔도의 都廳이 전국적으로 모여 八道都大房, 八道都山主, 都執綱都常務 등의 여러 소임을 두고 지방의 향연에서부터 서울에서의 나례 등 모든 연예적인 행사에 재인광대를 참가시켰다.

 그들이 선출되어 왕궁의 나례나 산대잡희를 위해 서울로 왕래할 때에는 호조에서 발급받은 圖書(일종의 증명서인 完文)를 갖고 전국의 관아와 사찰을 돌면서 乞量이라고 하여 비용을 벌기도 하였다.1043)金東旭,≪국문학사≫(日新社, 1976). 광해군 13년(1621) 10월에 희자에게 米布를 급송하는 일에 관하여 왕의 독촉이 있어 좌우나례청에 속한 희자 360명에게 전례에 따라 綿布 각 한 필씩 마련하여 나누어 주었다.

 성종 때에는 執義 李命崇이 “식량을 휴대하고 상경한 나례우인들을 다수 서울에 머무르게 하기 어려우니 돌려보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아뢴데 대해 성종은 “나례는 조종조부터 행해오던 것이니 지금 경솔히 바꿀 수 없으며, 우인들은 대체로 농사를 짓지 아니하고 乞糧으로 살아가는 자들이고, 또 서울에서 멀지 않은 이틀 정도의 거리에서 온 자들이니 이미 상경한 이상 正朝가 지나 내려보냄이 좋겠다”라고 하였다.1044)≪成宗實錄≫권 136, 성종 12년 12월 정사. 중종 때에는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歲時의 逐疫行事는 좋으나, 觀儺는 즉 잡희로서 絃手재인들이 버릇없이 궁궐에 출입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방자하게 만드니 이를 폐지하여 달라”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중종은 “관나가 雜戲라고는 하지만 이는 古風을 전하는 것이며, 하물며 이를 보는 자들이라고 하여 다 방자하게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세시는 索寬한 고로 옛부터 이를 행하여 온 것이요, 지나친 놀이는 아니다”고 하여 그 청을 들어주지 않았다.1045)≪中宗實錄≫권 1, 중종 원년 11월 갑오.

 중종 36년(1542) 5월에는<賑恤廳節目>의 하나로 정재인, 백정 등은 본시 항산이 없는 자들로 우희를 전업으로 하여 마을을 돌아다니며 乞糧을 하나 실은 각탈과 다름없으며, 이들은 민가에 기생하여 작폐가 심하며, 올해 같은 흉년에는 그 도둑질함이 전보다 더할 것이니 이들이 경내를 돌아다니는 것을 일체 금하도록 하였다.1046)≪中宗實錄≫권 95, 중종 36년 5월 기해.

 특히 社堂에 관한 기록은 세조 11년(1466) 8월에 처음 보이는데, “社長이라고 하는 자가 가짜 勸善文을 가지고 원각사 녹화승인 양 촌락을 횡행하며 민폐를 끼치고 있으니 각 고을 수령들은 이런 자들은 僧俗을 가리지 말고 잡아 올리라”고 하였다.1047)≪世祖實錄≫권 36, 세조 11년 8월 무자.

 태종 6년(1406) 4월부터 寺社革罷政策을 실시한 지 반세기가 넘는 세조대에 이르러서는 무시 못할 동냥승들의 기형적 집단이 생겨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감시와 멸시, 학대의 손길을 피하여 몸에 지니고 있는 밑천만으로 살아야 하는 그들로서는 惡의 집단이라 규탄을 받더라도 賣淫, 盜賊, 念佛, 歌舞 등으로 사는 길 밖에 없었다.1048)崔正如, 앞의 글. 그 후 이들에 관한 기록이 예종, 성종, 중종, 선조대에 이르면서 심심치 않게 보이고, 선조 40년(1607)에는 ‘男爲居士, 女稱社堂’으로 이름이 바뀌고, 이후의 문헌들, 예컨대≪星湖僿說≫·≪芝峰類說≫·≪五洲衍文長箋散稿≫·≪牧民心書≫등에는 그대로 그 이름이 전해 내려오고 있어 이미 특수 집단으로 정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전기의 연예문화가 관에 의해 주도되고 산대나례도 공의로 거행되었지만, 그것에 대한 일반의 호기심은 대단하여 산대희가 거행될 때는 민중이 운집하였고, 觀劇은 점차 일반화하여 갔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선비들은 그들의 유학적 견지에서 매번 산대희의 거행을 비난하고, 특히 풍교상의 이유로 일반의 관람과 부녀자의 참관을 반대하는 의견이 분분하였다. 세종 13년(1431) 7월 대사헌 申槩 등이 올린 상소문이나 선조 39년 4월 迎詔使三度習儀之日의 기사 등에서도 사족과 부녀자에게 觀儺戲禁令을 내리고자 한 예를 볼 수 있다.

 조선 중기에 접어들면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을 겪은 약 반세기 간은 사회적으로 일대 혼란기로서 나라는 전쟁으로 황폐해졌고 그 위에 흉년까지 겹쳤다. 따라서 백성들의 생활이 말이 아니었는데, 나라에서는 비싼 조세를 물려 그 핍박과 궁핍함이 형언하기 어려웠다. 그리하여 임진왜란 이후부터는 나라에서 연례행사처럼 거행되던 歲末儺禮의 풍속은 사라지고, 明使 내왕시와 부묘환궁시에도 전대의 채붕산대 및 백희가 얼마간 자취를 감추는 듯하였다.

 광해군대에 다시 이 풍습은 살아나 나례백희와 처용무, 결채헌가, 잡상우희 등이 전대에 못지않게 극성을 부렸지만 인조 때에는 나라의 긴축재정으로 점차 식어갔다. 인조 원년(1623) 3월에 임금은 앞서 광해군이 종묘친제 후 환궁할 때면 나례도감에서 雜像과 沈香山을 시설하고, 팔방에서 모은 戲子와 기생들이 온갖 재주를 보이게 하여 인력의 허비가 많았음을 감안하여 예조의 청대로 침향산을 거리에서 불사르고 또 嗣位 후 祔廟還宮 때 儒生耆老들이 올리던 결채헌축지례도 정지시켰다.

 백성들의 원성과 인조의 긴축재정, 그리고 명·청간의 정권교체기로 채붕산대와 이를 주관하던 산대도감이 자연히 해체되었으며, 그에 예속되었던 나례산대인은 물론, 당시 이들과 더불어 살았던 우인, 광대와 관원, 이배들은 결국 새로운 호구지책의 길을 모색해야만 하였다.

 재주있고 기예에 능한 사람들은 짝을 지어 마을에서 마을로 유랑하며 그 본업인 규식지희와 소학지희를 연출하며 호구를 유지했다. 이들은 나중에 천직으로 사당패, 풍각쟁이, 걸립패, 굿중패, 그리고 탈춤·덧뵈기패 등으로 분화되어 갔다.1049)張漢基,≪韓國演劇史≫(東國大 出版部, 1986), 112∼113쪽. 그리고 이 때는 조정과 양반관료들의 기강이 해이해져서 품계를 사고 파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전체의 인식변화로 서얼허통의 법과 노비속량제가 실시되었다. 아울러 그 때까지 있어 온 모진 규범과 허례허식은 서민의식의 각성과 신장으로 점차 파괴되어 나갔으며, 이에 따라 민간에서 민속춤과 민속극이 차츰 형성되어 가고 있었다.

<宋壽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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