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2. 영조대 탕평정국과 왕정체제의 정비
  • 2) 정치 구조의 변동

2) 정치 구조의 변동

 영조 연간의 정국운영을 살펴보면, 일관되게 군주권 강화와 중앙집권적 관료제의 강화가 추구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영조는 聖君政治를 실현하여 국정을 주도하는 군주가 되겠다는 구도를 제시하면서, 경연을 활성화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기본 서적이라는≪大學≫을 탐구하였을 뿐 아니라,082)李泰鎭,<朝鮮王朝의 儒敎政治와 王權>(≪韓國史論≫23, 서울大, 1990). 힘의 논리인 覇道라고 비판받는 당태종의≪貞觀政要≫역시 읽음으로써 강력한 군주권으로 치세를 이루었다는 시기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이 시기가 급격한 사회계층의 변동기라는 점은 이미 많은 연구에서 밝혀지고 있는데, 영조가 추구한 정치 구조 변동은 기본적으로 이런 바탕에서 추진된 것이었다.

 우선 사림정치의 상징으로서 국왕과 관료의 스승이라는 직책을 담당하였던 ‘山林’으로 호칭되는 유학자 집단의 정치 간여가 거의 전 시기에 걸쳐서 견제되었다. 또 이조낭관으로 대표되는 ‘청요직’의 통청권을 포함한 제반 권한도 영조 17년(1741) 이후 대폭적으로 혁파되었다. 이러한 관직 운영체계는 소론계 柳壽垣의 건의를 받아들인 것인데, 곧 차례차례 근무 연한대로 승진하는 명·청대 관료체제인 ‘序陞制’ 방식을 도입하여 재상 중심의 관료제 위계질서를 강화한 것이었다. 이렇게 당상관 이상 재상 중심으로 권력이 집중된 결과 문·무반 2품 이상 제조의 합의체 기구인 비변사의 기능이 더욱 강화되어 갔다. 이를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비변사의 강화는 영조 연간 정치구조 변동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영조 연간이 되면 비변사는 의정부를 제치고 최고 정책을 입안하고 결정하는 기구로 나타나고 있었다. 이는 탕평파 대신들과 군문대장의 권한을 강화하려는 영조의 의중과도 부합되어 더욱 촉진되었다. 예컨대 영조 23년과 영조 30년에는 총융사와 금위대장이 비변사 제조에 참여하게 되었고, 영조 30년의 松坡場 폐지문제에서 보이듯이 탕평파 대신들의 의견이 더욱 결정적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이는 비변사가 정책 수립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음을 보여준 것인데, 특히 八道句管堂上制의 실시로 드러난다.

 팔도구관당상제는 이제까지의 감사를 통한 지방 수령의 통제를 좀더 강화한 방식이었다. 수령들이 세력가와의 연결을 도모하여 감사의 통제를 벗어나려 하면서, 이권이 막대한 大邑과 비옥한 읍을 선호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팔도구관당상제는 비변사가 중심이 되어 지방을 지배하는 제도적 장치이다. 이 제도는 숙종 39년(1713)부터 실시되었다. 각 도의 狀聞과 文報를 원활히 처리하기 위하여 팔도에 구관당상을 각각 한 사람씩 차정하고 다시 유사당상 네 사람으로 하여금 각각 2도를 관장하게 하는 체제였다.

 이 제도는 영조 7년에 비로소 본격적으로 시행되었다. 비변사 당상 8인에게 각각 8도의 진휼을 담당하게 한 데서 출발하여 계속 군역 이정을 비변사에 담당시킴으로써 본격적으로 비변사가 8도를 구관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중앙정부의 지방지배력 강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각 지역 수령을 팔도구관당상의 통제하에 둠으로써 감사 중심의 지방 통치체계와 함께 지방에 대한 이중적인 통제장치를 마련한 것이었다. 이후 비변사는 지방 수령의 의천권을 계속 확대해 가기도 했다.083)韓相權,≪朝鮮後期 社會와 訴寃制度≫(一潮閣, 1996). 원래는 중요한 지역과 변방의 감사·병사·수령을 의천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했으나, 영조 말년경이 되면 양남과 호서 지방의 감사 및 6진과 江邊邑의 수령 역시 비변사에서 의천함으로써 결국 이조와 병조의 인사 권한이 대폭 축소되었다. 이는 결국 탕평파 재상들이 관료 집단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해서 비변사 권한을 강화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다.

 둘째로, 淸要職의 혁파이다. 이는 탕평파 정권을 안정시켜서 탕평의 실효를 얻으려는 목적에서 실시되었다. 원래 청요직이란 사헌부 장령·홍문관원(홍문록과 도당록)·이조낭관·예문관 한림을 지칭하는데, 모두 사림의 공론을 정치현장에 반영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이른바 ‘公論在下’ 원칙을 지키는 사림정치의 상징적 관직이었다. 이들은 재상도 함부로 관여할 수 없는 ‘통청권’이라고 해서, 관직 대상자의 추천·평가권과 외부 간섭없이 자체적으로 후임자 추천권(自代制) 등을 가지는 것을 그 특징으로 하고 있었다. 관리의 자격 심사권이 있는 장령은 과거 합격자가 아니라도 임명될 수 있어서 ‘산림직’으로 인식되고 있기도 했다. 또 이조낭관은 삼사의 관원 중에서만 선출되는데, 이들은 당하관 이하의 관료추천권(通望權) 외에도, 삼사관원의 피혐시에는 그에 대한 처치권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곧 사림정치 아래서는 의리와 공론 구현의 대변자와도 같은 의미를 가졌다.

 그러므로 청요직이란, 의리주인인 산림의 우익인 淸類가 자신의 뜻을 펼 수 있게 하는, 사림정치의 상징적 제도였다. 그런데 산림세력은 영조 연간에 계속 정치간여가 견제되었고, 이조낭관의 통청권 및 한림의 회천법 혁파, 균역법 실시와 함께 영조 스스로 탕평을 달성하기 위해서 고수해야 할 자신의 4대 정책이라고까지 지칭되고 있었다.

 영조 17년(1741) 4월 영조는 소론계 탕평파 대신 조현명의 건의를 받아들여 이조낭관 통청의 법과 한림의 回薦法을 혁파해 버렸다.

 이조낭관은 당파간의 이해관계를 대변할 수 있는 자리였으므로 그 대립이 당하관 주도의 정치체제에서는 당연히 격화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탕평정국에서도 계속 정국을 흔드는 변수가 되었다. 이에 이조낭관의 추천은 이조판서와 참판이 주재하며, 낭관 전임자를 우대하는 관례를 없애 버렸다. 또한 일단 弘文錄에 선발된 사람은 번갈아 가면서 모두 이조낭관 후보자로 추천되도록 해서, 경쟁의 필요가 없어지도록 만들어 버렸다. 곧 국왕과 국왕이 직접 뽑는 재상의 권한이 강화된 것을 의미한다. 이는 실제로 당시 새로이 출발한 탕평파 김재로·송인명·조현명의 3상 정권을 안정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이후 영조 26년에는 이조참판과 이조참의 역시 3명 추천윈칙인 三望 아닌 그 이상의 추천 원칙인 長望을 채택하였다.

 사관으로서 당시 정치의 득실을 기록하고 평가하는 권한을 가진 한림의 會圈法은 전·현직 한림이 모여서 참석자 전원의 의견이 일치된 인물만을 뽑은 후에 하늘에 분향하여 고하는 만장일치 추천에 의한 자대제였는데, 이러한 관행들도 동시에 혁파되었다. 역시 홍문록과 도당록의 예에 따라 권점을 찍어서 일정한 수 이상의 추천을 얻은 후보자를 뽑아서, 최종적으로 국왕 앞에서 시험을 보아서 선발하기로 하였다. 특히≪속대전≫에는 전·현직 한림들이 권점을 그르치면, 예문관 당상관들이 권점하여 후보자를 뽑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이는 기본적으로 넓은 범위에서 뽑는다는 廣選의 원칙과 재상 권한의 확대를 통한 위계질서 강화라는 방향으로 개편한 것이었다. 동시에 정치에 대한 기록과 평가를 담당하는 관료도 예전처럼 독립적인 위치에 두지 않고, 재상과 국왕이 선발권을 장악하겠다는 뜻이었다. 이후 역시 청요직으로 존중되던 校書館 兼校理를 혁파해 버렸고, 교서관 設書, 승문원 注書가 존중되자 이 역시 모두 ‘圈點召試法’으로 바꾸고 말았다.

 이러한 청요직의 폐지는 곧 군주권과 재상권의 강화를 목표로 하고 있었다. 이는 물론 탕평파 권력집단의 강화를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재상권을 견제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없앤 결과, 말년에는 이른바 국왕의 척족세력과 탕평파 대신이 결합된 ‘權貴’의 전권을 초래하기도 했다.

 셋째로, 일반 백성들의 의견을 정치에 반영하는 방식의 하나였던 상언과 격쟁제도도 좀더 활성화되었다. 영조는 상언·격쟁을 고식적으로 처리하는 관원들의 자세를 질타하면서 백성들의 억울함을 펴게해야 한다고 하였다. 영조 20년 편찬된≪속대전≫에서 가족이나 先祖의 신원문제, 수령의 형벌 남용문제를 상언이나 격쟁으로 호소할 수 있게 하였다. 또한 영조 47년에는 申聞鼓를 복설하였다. 이는 상언·격쟁이 빈발하는 것을 통제하려는 시책이기도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관원들의 비리를 탄핵하는 제도로 정착되어 갔다.084)韓相權, 위의 책.

 탕평정국에서 실시된 위와 같은 제도개혁으로 군주권이 강화되었고, 위계질서 강화와 재상 권한의 확대 및 지방 통제력의 강화같은 중앙집권적 관료제의 재정비가 이루어졌다. 도시와 농촌에서 성장해 왔던 향반이나 역관·서얼·상인세력 같은 중간계층과 일반 백성들의 의견을 중앙정치 구조 속에서 파악하려는 노력들도 기울여졌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새로운 정치집단의 진출로 역할을 하던 당하관의 정치적 위치가 약화된 반면에, 국왕 측근세력은 강화되어 가는 등 지배집단 내에서의 권력기반 축소 현상이 일어났다. 그리고 이에 부수되는 권력의 정통성과 도덕성 문제가 임오년 사도세자의 죽음같이 오래 그 후유증이 이어지는 정치적 파란들을 야기시켰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