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Ⅱ. 양역변통론과 균역법의 시행
  • 3. 균역법의 시행과 그 의미
  • 1) 균역법의 제정 경위
  • (1) 감필

(1) 감필

 均役法은 일반적으로 영조 26년(1750) 7월의 減疋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균역법은 엄밀한 의미에서는 감필과, 감필로 인한 재정 결손을 보완하는 給代를 포괄하는 개념이다. 따라서 균역법은 영조 27년 6월의 결미 징수 결정, 9월의<結米節目>완성을 거쳐 이듬해 6월<壬申原事目>의 제정으로 완결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균역법 논의는 영조 25년 8월 충청감사 홍계희의≪良役變通≫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홍계희는 良役을 없애고 대신에 토지에 結當 布 1疋을 부과하여 양역문제를 해결하자는 양역변통책자를 작성하여 올렸다.217)≪英祖實錄≫권 74, 영조 27년 6월 정유. 영조가 책자에 각별한 관심을 보임으로써, 18세기 초 숙종조 후반부터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던 結布論이 다시 논의되었다. 이러한 양역변통 논의를 더욱 활발하게 한 것은 이듬해의 전염병과 기근이었다. 영조 26년에는 연초부터 시작된 전염병이 갈수록 기승을 더해 5월에 이르러 사망자가 124,000명에 달하였는데, 호적에 등재되지 않은 유민들까지 합하면 최소한 30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산되었다.218)≪英祖實錄≫권 71, 영조 26년 5월 병진. 설상가상으로 기근마저 심하게 들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시 민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부담이었던 양역의 개혁에 우선적으로 관심이 쏠리지 않을 수 없었다. 3월에 홍계희의 양역변통책자가 다시 논의 대상으로 떠올랐고, 持平 鄭恒齡, 同副承旨 李應恊 등이 양역변통을 주장하고 나섰다.219)≪英祖實錄≫권 71, 영조 26년 3월 갑인·병진.
≪承政院日記≫1054책, 영조 26년 3월 25일.

 이러한 정황은 예전의 양역변통론 대두 시기의 정황과 특별히 다를 바 없었다. 그런데 예전에는 늘 유야무야되었던 양역변통 논의가 이 때에 균역법으로 매듭지어지게 된 데에는 영조의 양역변통에 대한 집념에 못지 않게 戶錢에 대한 박문수의 잘못된 계산이 적잖이 작용했다. 영조 26년 5월 14일, 호조판서 박문수는 양역을 파하고 그 대신에 호를 대·중·소호로 나누어 호당 5전 이하를 징수하여 재정 결손을 충당하되 나머지 부족분은 각 아문과 궁방이 장악하고 있던 어염세를 호조로 귀속시켜 해결하면 가능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220)≪承政院日記≫1056책, 영조 26년 5월 14일. 영조는 즉위 전부터 호포제를 양역변통의 최상의 방안으로 생각하고 있었다.221)≪英祖實錄≫권 71, 영조 26년 7월 계묘. 그러나 사족층의 반발이 만만치 않은 데다가 빈한한 사족들에게 부담이 될 것을 우려하여 시행을 주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박문수가 호전 부담이 大戶에도 5전을 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자 귀가 솔깃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호포제는 가장 유력한 양역변통책으로 부상하였다.

 영조는 박문수의 호포와 홍계희의 결포에 대한 가부를 民에게 직접 묻기로 하였다. 영조는 5월 19일 창경궁 홍화문에서 五部의 士庶와 지방에서 올라온 禁軍 등 50여 명을 불러 모아놓고 호포와 결포 가운데 어느 것이 편한지 물었다(一次臨門). 거의 모두가 호포가 편하다고 대답하였다222)≪英祖實錄≫권 71, 영조 26년 5월 경신조의 史臣의 말에 의하면 박문수가 홍화문 앞에 모인 사람들에게 영조의 뜻이 호포에 있으니 호포를 찬성하라고 미리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영조는 호포제를 단행하기로 결심하였다.

 호전의 준비 작업이 즉시 시작되었다.223)戶布를 戶錢으로 바꾼 것은 布를 거둘 때에 布의 質을 문제삼아 點退하는 폐단을 막고자 한 것이었다(≪承政院日記≫1056책, 영조 26년 5월 17일). 양역을 호전으로 대신한다는 방침에 따라 전국의 軍摠과 영조 23년의 戶摠을 비교하여 호전의 액수를 계산하여 정한<軍戶假令草>가 당일로 작성되었다. 그 결과 호전은 대호의 경우 1냥 5전, 소호의 경우에도 1냥이나 되는 것으로 추산되었다.224)≪英祖實錄≫권 71, 영조 26년 5월 19일 경신. 대·중·소호의 구분 기준이 무엇이었는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다만 이를 짐작케 하는 것은 영조 20년에 持平 任珣이 호포론을 주장하면서 5口까지를 殘戶, 10口까지를 小戶, 15口까지를 中戶, 20口까지를 大戶로 하자고 하였고(≪英祖實錄≫권 59, 영조 20년 4월 기유), 영조 26년 우의정 조현명은 20口를 大戶라 한다고 하였다(≪承政院日記≫1058책, 영조 26년 7월 2일). 호당 5전을 초과하지 않을 것이라던 예상이 빗나가고 말았다.225)영조는 이 때의 결과에 크게 실망하여 “靈城君(박문수)이 호당 5전이면 된다고 아주 쉽게 말하기에 굳게 믿었는데 속은 듯하다”고 말하였다(≪承政院日記≫1056책, 영조 26년 5월 19일). 호전의 시행은 이 때부터 난항에 부닥쳤다.

 첫째 이유로는 호전의 액수가 결코 작지 않았다. 대·중·소호를 막론하고 호당 1냥을 초과해서는 호전을 시행하기 어렵다는 것이 지배적인 견해였다. 당시 평안도 함경도를 제외한 6도 총 호수는 134만 호로서 전국의 正軍 40만 명이 내던 포 80만 필(160만 냥)을 채우려면 호전은 호당 평균 1냥을 넘을 수밖에 없었다.226)≪承政院日記≫1056책, 영조 26년 5월 30일. 더구나 134만 호 중에서도 奴婢貢과 戶役을 부담하고 있는 公私賤戶 등에는 호전을 부과할 수 없었다.227)≪承政院日記≫1058책, 영조 26년 7월 3일. 대·중·소호 외에 殘戶에까지 호전을 부과한다 해도 호전의 부담은 작지 않았다.

 둘째로 호전 부과의 기초 자료인 호적이 제대로 정비되어 있지 않았다. 급한 대로 우선 한성부의 호적을 살펴보니 ‘長安 8萬家’를 일컫는 서울의 호가 34,000호밖에 되지 않고 더구나 대·중호는 겨우 2,000호인데 잔호는 18,000호나 되는 실정이었다.228)≪承政院日記≫1056책, 영조 26년 5월 29일. 이런 상황에서 호전을 시행하려면 우선 호적을 대대적으로 정비하여 漏戶·虛戶를 색출하고 戶等을 정확히 책정해야 했다. 그러나 민의 부담을 덜고자 단행되는 호포제가 대대적인 호적 정비로 인해 오히려 새로운 문제를 야기시킬 우려가 있었다. 더구나 혹심한 전염병과 기근으로 상황도 좋지 않았다.

 논의 과정에서 완전한 호전의 시행은 어렵다는 것으로 결론이 모아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5월 말에 領中樞府事 金在魯가 감필을 제기하였다. 예조판서 申晩과 판윤 趙載浩 등도 김재로의 견해에 찬동하고 나섰다.229)위와 같음. 영조는 감필에 대해 논의해 보도록 지시하였다. 감필은 양역의 완전한 혁파를 전제로 한 개혁보다는 용이하고 절충적인 방편으로 적극적으로 검토되었다.

 결국 6월 중순에 이르러 감필은 거의 확정되어 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1필 감필로 인한 재정 결손을 무엇으로 채우는가 하는 문제가 새로운 과제로 대두되었다. 앞서 논의되었던 결포론과 호전론 사이의 논쟁이 다시 시작되었다. 중앙 조정의 논의는 減疋結布論과 영조를 중심으로 한 減疋戶錢論으로 양분되었다.

 감필호전론은 주장의 열기로나 수적으로나 열세였지만 영조의 집념에 힘입어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다. 비변사에서는 다시 양역가를 1필로 줄이고 그 재정 결손을 호전으로 보충하는 구체적인 방안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영조 26년(1750) 7월 초에<良役變通假令節目>이 완성되었다.230)≪英祖實錄≫권 71, 영조 26년 7월 임인조에는<良役節目>의 내용이 간략하게 실려 있다. 이는<良役變通假令節目>이 수록되어야 하는데 영조 28년의<壬申原事目>이 잘못 수록된 것이다. 절목의 10개 조항 가운데 상당수는 아직 언급조차 되지 않았던 조항들로서, 舊 守禦廳을 均役廳으로 사용한다는 기록이나, 결미 징수에 관한 내용 등으로 보건대<原事目>임이 확실하다. 이 오류로 인해 균역법 제정 경위에 대한 연구에서 많은 오해가 야기되었다. 절목은 호당 부담이 1냥을 넘지 않게 하여 작성되었다.231)≪承政院日記≫1058책, 영조 26년 7월 2일.

 그러나 절목대로 시행하더라도 5만 냥의 재정 결손은 해결할 길이 없었다. 또한 호의 파악이 가혹하여 문제가 되고 있었다.232)≪承政院日記≫1058책, 영조 26년 7월 5일.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사족층의 반발이었다. 李宗城·元景夏 등 중신들의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233)≪英祖實錄≫권 71, 영조 26년 6월 계사. 영조는 양역을 완전히 혁파하지도 못한 채 호전을 시행하는 데 대해 내심 마땅치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7월 3일에 영조는 홍화문에 성균관 유생 80여 명과 5部의 坊民을 불러 모아 놓고 다시 백관·유생·민의 의향을 물었다. 이 때는 감필이나 호전의 액수에 대해서는 묻지 않고 호전의 찬반 여부만을 물었다(二次臨門). 방민들은 호전이 편하다고 답하였으나 관료와 유생들은 모두 호전에 반대했다. 영조는 사족층의 반발을 무릅쓰고 호전제를 강행할 것인지 주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홍화문에서의 詢問이 있은 지 이틀 뒤 영조는 호전을 시행하지 않는다는 윤음을 직접 썼다. 이로써 호전제는 무산되었다. 사족들의 반발로 인해 ‘上下均役’의 ‘大同之政’으로 일컬어진 호전제는 끝내 시행될 수 없었다. 그러나 減疋戶錢 가운데 감필은 그대로 남았다. 취소된 것은 감필호전 전체가 아니라 그 가운데 호전 부분이었다. 영조 26년(1750) 7월 9일에 영조는 창경궁 明政殿에 時·原任大臣, 六曹·備邊司 堂上, 兩司 諸臣들을 모아 놓고 양역가를 2필에서 1필로 감하도록 명하였다(一次臨殿).234)≪英祖實錄≫권 71, 영조 26년 7월 기유. 나흘 전의 윤음에서 결정된 감필을 정식으로 공포한 것이다.

 양역가를 1필로 줄이려는 감필론은 이미 숙종 말년부터 제기되어 경종조, 영조조를 거치면서 계속 다양한 형태로 제기되었다. 감필론은 특히 영조 초에 적극적으로 검토되었다. 경종 3년에 설치된 양역청은 영조 즉위 초까지 이어져, 李光佐를 중심으로 하여 감필을 집중적으로 검토하였다. 그러나 감필에 따른 재정 보완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여 별다른 진척을 보이지 못하던 중 이른바 을사처분으로 소론정권이 붕괴되자 양역청의 활동이 중지되고 감필론도 무산되고 말았다. 그 후 감필론은 영조 9·10년에도 집중적으로 제기되어 신중하게 검토되었으나 다시 거부되고 그 대신에 閑丁을 대규모로 搜括하는 정책이 단행되었다. 그러던 중 이 때에 이르러 결국 감필로 매듭지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 때의 조처는 단순한 감필이 아니라 1필로의 통일이었다. 숙종 31년(1705) 이정청에서 <軍布均役節目>의 반포로 京案付良役을 2필역으로 통일했던 조처에 이은 양역가 균일화의 최종 조처였다.235)鄭演植,<17·18세기 良役均一化政策의 推移>(≪韓國史論≫13, 서울大, 1985). 감필은 경종조 李健命의 감필결포론에서 양역가의 경감과 균일화라는 이중적 효과를 노릴 수 있는 좋은 방책으로 줄기차게 주장되었다. 따라서 감필은 단순한 감필이 아니라 양인의 신역을 모두 1필로 통일시키는 방향으로 추진되었다. 즉 감필은 ‘均一疋’로서, 1필 이상의 역가는 1필로 내리되 1필 미만의 역가는 1필로 올린다는 것이다.

 명정전에서 감필을 명하고 난 후 영조는 감필에 대해 “一國의 良民의 役을 모두 1필로 고르게 하는 제도로서 大同之政과 다를 바 없다”236)≪承政院日記≫1058책, 영조 26년 7월 9일.는 敎를 내렸다. 사족과 평민이 모두 같은 역을 부담하는 ‘上下均役’의 ‘戶大同’이 아니라 평민의 범위 안에서는 모두 같은 역을 부담한다는 ‘一疋大同’의 균역법은 大同之政과 다름없는 것으로 표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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