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2. 세도정치의 전개
  • 2) 헌종대의 세도정치
  • (1) 헌종대 순원왕후 수렴청정기(헌종 즉위년∼6년)

(1) 헌종대 순원왕후 수렴청정기(헌종 즉위년∼6년)

 헌종이 즉위한 것은 그의 나이 8세 때로서, 왕실의 최고 서열에 있던 그의 할머니 純元王后가 수렴청정하는 것이 불가피한 일이었다. 이에 김조순 가문은 그들의 권력을 확고히 하기 위한 노력을 다시 활발히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그들의 세력 확장 노력은 우선 병권의 추이에서 나타난다. 효명세자 청정기 이후 훈련도감은 조만영이 거느리고 있었으며 김조순 가문 세력이 직접 훈련대장이나 어영대장에 참여하지 못하고 있던 상태에서, 순조가 죽자 즉시로 김유근이 어영대장에 오르고 원년(1835) 7월에는 김유근이 훈련대장, 조만영이 어영대장으로 마주 옮김으로써 병권의 균형을 유지하였다. 나아가 3년 2월에는 김조순의 7촌 조카인 金祖根의 딸을 왕비로 결정하였다.

 한편 대왕대비는 원년 정월 국왕 외조부 조만영의 동생인 趙寅永을 이조판서에 임명하여 그에게 상당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3년 10월에는 이기연과 조인영을 예조판서와 호조판서에 특지로 임명하고 정승을 이상황·박종훈·李止淵으로 임명하였다. 이후 박종훈이 한동안 국정을 총괄하다 4년 2월부터는 이지연이 담당하였다. 조인영 및 그 세력이 대왕대비 수렴청정하에서 이만한 위치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기본적으로는 당시 국왕 외척세력들 간의 협력 관계가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좀더 구체적으로는 순조가 김조순 가문 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헌종의 보도를 조인영에게 맡긴다는 유촉을 남겼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중에서도 내면적으로는 순원왕후의 친정인 김조순 가문이 점차 권력을 집중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 시기 대왕대비 및 김조순 가문 계열의 정치운영은 沈英錫의 등용에 잘 표현되었다. 심영석은 경종대 辛壬獄事 시기에 남인으로 활동했던 沈檀의 증손자였으므로 당시 집권세력 내에서 명분상의 흠을 지적당하였던 인물로서, 효명세자 대리청정기에는 호조판서 김교근과 그 아들 김병조의 발호를 맹비난했다가 유배당했던 전력이 있다. 대왕대비는 김교근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헌종 원년 정월에 그를 부총관에 발탁하였다. 물론 이것은 김교근 부자가 김조순과 그 아들 김유근 중심의 세력으로부터 어느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김교근이 김조순 가문의 한 인물로서 대접받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지만, 그의 부자가 익종 대리청정기 뿐만 아니라 그 사후에도 부정함을 공격받았던 사실을 보면 그들과 권력 중심부 사이의 거리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므로 순원왕후를 내세운 집권세력은 심영석을 발탁함으로써 별다른 댓가없이 조정에 포용성을 과시하고 자기들의 영향력을 강화하는 성과를 거두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심영석은 순조 18년(1818) 5월 신임의리에서의 자신의 약점을 만회하려다 이지연으로부터 공격을 받은 바 있기 때문에, 김조순 가문 세력이 조만영 가문 계열의 인물이라고 평가되는 이지연 등을 견제하는 데 큰 역할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제한적이나마 척족세력에 비판적이었다고 평가되는 홍석주가 아래에 서술한 바와 같이 얼마 지나지 않아 축출된다. 심영석은 순조 22년(1822) 11월에 홍석주와의 분란을 겪은 인물이므로, 심영석의 발탁은 홍석주의 축출에도 어느 정도 작용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383)홍석주의 정치적 입장에 대해서는 金文植,<尙書 연구서를 중심으로 본 丁若鏞과 洪奭周의 政治思想 비교>(≪韓國史論≫20, 서울大, 1988), 406쪽 및≪純祖實錄≫권 25, 순조 22년 11월 경진 참조.

 위와 같은 인사정책을 통해 조정에 권력의 안정이 이루어졌으며, 그러한 안정위에서 앞 시기로부터 넘어온 문제들이 일단락되었다. 헌종 원년 정월에는 윤행임의 관작을 복작하였고, 김노경·이인부·김노·송성룡·신윤록 등의 죄명을 씻고 그 중 김노와 김노경에게는 특별히 타일러 호의를 보였으며, 특히 김노경에게는 “선왕도 그 무죄함을 알고 있었으니 더 이야기를 꺼내지 말라”는 간곡한 타이름이 있었다. 그리하여 효명세자의 세력 재편 노력에 의해 빚어졌던 정쟁이 마무리되었다.

 한편 헌종 2년(1836) 12월에는 대사헌으로 임명된 김노가 倭館을 이용하여 난을 일으키려 한 南膺中의 옥사를 졸속으로 처리하려 했다는 죄명으로 홍석주를 탄핵하여 삭탈관작을 거쳐 서울 밖으로 쫓아내는 처벌을 받도록 하였다. 실록에 자세한 내용이 나와 있지 않고≪承政院日記≫에도 홍석주의 움직임과 김노 탄핵의 중심 내용은 오려져 있어서 자세한 전말은 알 수 없으나, 순원왕후의 동생 김유근이 공초에 나오자 홍석주가 그를 拿問할 것을 요청했기 때문이라는 자료가 있다.384)金洸,≪大東史綱≫권 12, 헌종 정유 3년. 김노 등이 당대의 집권자와 협력하여 척족세력의 일방적인 정국운영에 방해가 될 수 있는 홍석주를 축출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 때 김노의 활약 역시 대왕대비의 배려가 성과를 거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홍석주의 후임으로 조만영 가문의 계열인 이지연이 우의정에 올라 한동안 국정을 주관하는 것은 홍석주 축출이 김조순 가문과 조만영 가문 사이의 동의에 의한 것임을 짐작하게 한다.

 그러나 위와 같은 당시 왕실 척족세력들의 연합은 수렴청정의 종료를 앞두고 세력 기반을 굳히려는 김조순 가문의 노력에 의해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먼저 헌종 6년 7월에 金弘根은 효명세자 사후 순조에 의해 이미 처리가 끝난 윤상도와 김노경의 죄목을 아무런 새로운 이유없이 제기함으로써, 박종훈·신위·유상량 등을 공격했던 순조 30년 윤상도의 상소를 재조사하게 하였다. 그 과정에서는 김양순이 오히려 윤상도를 조종하였음이 명백히 밝혀지고 심문 중에 물고당하는 등 김조순 가문 세력에 불리한 점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金正喜도 김양순의 무고를 받아 유배당하는 등, 김조순 가문 세력은 자기들에 대해 경쟁 또는 견제의 가능성이 있는 세력을 축출하고자 하는 목적을 일단 이루었다. 이 때의 김노경에 대한 공격은 익종 대리청정기의 행위를 중심으로 한 것으로서, 김노경을 공격하면서 그가 김노에게 아부했다는 설을 재론한 이상황의 발언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김노경과 함께 지목받았던 김노의 명분까지도 여지없이 짓밟는 것이었다. 결국 그 이후 김노의 정치적 활동이 드러나지 않음은 물론 존재조차도 쉽게 확인할 수 없게 된다. 헌종 즉위 후의 김노의 복귀와 활동은 김조순 가문의 세력 확장 정책에 의한 일시적인 것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그 사건에 바로 이어 헌종 6년 9월에는 대사간 李在鶴이 뚜렷한 계기 없이 이지연·이기연 형제를 공격한 것을 계기로, 沈承澤은 윤상도의 옥사를 이용하여 조정 신하들을 모두 도태하려 했다는 죄목을 이지연 등에게 무리하게 적용하여 그들을 공격하였다. 그리하여 대왕대비는 그들이 효명세자의 대리청정에 불만을 가지고 큰 죄를 지었으며 헌종대에 들어와서도 정권을 오로지 하려 했다는 모호한 이유를 들어 그들을 유배하였다. 이지연은 비록 그 동생 이기연이 김유근과 사돈관계에 있었다고는 하지만 자신의 아들이 조만영의 사위이며 조카는 조인영의 사위인 이중의 사돈 관계와, 어렸을 때부터 조인영과 맺은 우의를 통해 풍양 조씨 조만영 가문 세력에 대한 지지 기반으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지닌 인물들이었다.

 그리고 순원왕후의 수렴청정이 끝난 직후 7년 정월에는 효명세자가 죽은 뒤 김노경의 血黨이라고 공격받았던 李鶴秀를 유배하는데, 이것은 전년에 있었던 정치적 처리의 마무리 작업이라고 생각된다. 이리하여 세자 청정기에 김노를 중심으로 세력을 모아 김조순 가문에 위협이 되거나 그 가능성을 지니고 있었던 인물들은 헌종 초년 수렴청정기의 유예기간을 거쳐 결국 조정에서 모두 축출당하였다. 그들은 김조순 가문과 조만영 가문이 어느 정도 연합하거나 대립을 유예하고 있던 동안 조정에 복귀할 수 있었지만, 양 세력의 경쟁이 격화됨에 따라 설 자리를 먼저 잃어버렸던 것이다.

 어린 헌종이 즉위하고 김조순의 딸인 순조비 순원왕후가 대리청정하던 시기에는 그 친정인 김조순 가문 세력이 계속하여 튼튼한 정치적 기반을 유지하면서도, 생전의 순조로부터 헌종 보도의 책임을 위촉받은 趙寅永이 정국운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그 두 세력 사이에는 어느 정도 균형이 유지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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