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3. 부세제도 개선의 한계
  • 4) 환정이정책과 정책의 추진
  • (1) 환정의 구조적 문제와「파환귀결책」

(1) 환정의 구조적 문제와「파환귀결책」

 삼정체제의 가장 큰 특징은 환곡이 국가재정의 부족분을 충당하는 세원으로 등장하였다는 점이다. 환곡은 본래 국가의 예비곡을 이용하여 봄에 식량 또는 종자를 대부하고 가을에 元穀과 耗穀을 거두어 농민의 재생산을 보조하는 장치였다. 이 때 모곡(耗條)은 환곡 운영의 자연 감소를 보충하는 방편으로 수취하는 것이었는데, 17세기 초 그 일부가 재정 보용책의 일환으로 會錄되면서, 환곡은 부세화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508)宋贊植,<李朝時代還上取耗補用考>(≪歷史學報≫27, 1965).
그러나 환곡은 19세기 전반까지 부세적 기능과 함께 진휼적 기능이 함께 존재했음을 주장하는 논자도 있다(文勇植,<19세기 前半 還穀賑恤機能의 變化過程>,≪釜山史學≫19, 1990).

 이에 17∼18세기 중앙과 지방의 각 아문은 기존의 환곡을 늘리거나 혹은 새로운 환곡을 설치 운영함으로써 환총은 급격히 증가하였다.509)환총은 18세기 초 약 500만 석에서 19세기 초에는 약 1,000만 석으로 증가되었다. 오일주,<朝鮮後期 國家財政과 還穀의 賦稅的 機能의 강화>(延世大 碩士學位論文, 1984) 참조. 또한 이식수입을 늘리기 위해 전체 곡식의 절반은 남겨두고 절반만 분급하기로 되어 있는 半留半分의 원칙이 지켜지지 않고, 환곡이 加分 혹은 盡分되는가 하면, 회록률도 점차 높아져 갔다. 가분과 진분은 자연히 환곡의 분급률을 높이고, 분급률의 증가는 민의 부담을 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510)宋讚燮,≪19세기 還穀制 改革의 推移≫(서울大 博士學位論文, 1992). 환곡이 고리대적 수탈의 도구가 되었던 것이다.

 한편 환곡은 군·현 단위의 환총제로 운영되면서 여러 가지 폐단을 낳았다. 원래 要地要路와 僻地와는 설치시부터 환총에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각급 아문에서 모곡을 징수할 때 곡가가 높은 곳에서는 돈으로 바꾸어 수용하고 곡가가 낮은 곳에서는 그대로 積置하여, 환곡의 양은 적은데 분급 대상자는 많은 ‘還少民多’와 그 반대 현상인 ‘還多民少’의 불균이 생기게 되었다. 지역간에 불균등한 환총을 변동시키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에 ‘환다민소’한 지역의 민은 수십 석에서 많게는 100석에 이르는 환곡을 억지로 받아, 고리로 그 이자를 납부해야만 했다. 이 때문에 19세기에는 환곡으로 유망하는 자가 속출하였고, 미처 거두지 못한 미봉액이 크게 늘면서 환곡은 허류화하였다. 미봉액의 처리를 위해 ‘減價作錢’과 移轉 등의 대책이 시행되었으나, 이는 오히려 폐단만 가중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511)金容燮,<還穀制의 釐正과 社倉法>(≪東方學志≫34, 延世大, 1982).

 또한 환곡은 진휼곡과는 달리 환곡을 갚을 능력이 있는 ‘受還戶’와 그렇지 못한 ‘不受還戶’를 가리고 다시 수환호에 등급을 매겨, 이에 따라 환자를 분급하였다. 그런데 환곡의 부세적 기능이 강화되자, 권력과 富力을 갖춘 자는 환곡의 대상에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환곡의 분급대상에서 빠지는 頉還層이 증가하자, 환곡은 자연히 상환능력이 없는 가난한 농민층에게 집중되는 폐단을 낳았다. 이에 강제성을 띤 분급 방식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수환호가 아닌 統戶 즉 전체 민호에 환곡을 분급하는 統還과 토지를 대상으로 환곡을 분급하는 결환이 일반화되었다. 환곡의 분급과 수봉을 각 면·리에 자율적으로 맡기는 里還의 방법도 강구되었다.512)梁晉錫,<18·19세기 還穀에 관한 연구>(≪韓國史論≫21, 서울大, 1989). 그러나 어떠한 방식이든 간에 부호들이 還戶에서 빠짐으로써 부담은 가난한 농민이 떠맡고 있었다. 따라서 거두어들일 수 없는 환곡의 양이 늘어나게 되었다.513)宋讚燮, 앞의 책.

 환폐는 상품화폐경제 방식이 이용되면서 가중되었다. 각급 관아가 ‘耗穀作錢’을 통해 잉여를 취하려 한 것이다. 예를 들면 환곡을 거둘 때 정해진 상정가보다 높은 가격으로 거두는 ‘高價執錢’이 행해지는가 하면, 환곡의 작전 과정에서 규정량 이상을 작전하는 加作도 널리 행해졌다. 분급 과정에서도 봄·가을의 곡가 차이를 이용하여, 상정가보다 훨씬 낮은 가격으로 나누어 주는 錢還이 시행되었다. 이는 허류가 심한 상태에서 耗條를 제대로 취할 수 있는 수단이기도 하였다. ‘加作立本’과 ‘移貿立本’은 상품화폐경제를 이용한 수취 과정과 분급 과정이 연결되면서, 고리대적 수탈을 강화한 대표적 예로서, 이 시기 환폐의 근원으로 지적되기도 하였다.514)≪備邊司謄錄≫24책, 철종 5년 8월 29일.

 본래 부세의 명목이 아닌 환곡이 부세로 기능함에 따라, 환정은 국가재정에서 전정 다음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면서 없어서는 안될 존재가 되었다.515)金玉根, 앞의 책에 의하면 조선 후기의 세입규모 구성비는 결세 46%, 환모 36%, 신역 16%, 잡세 2%였다. 그러나 이로 인한 농민의 부담은 일년 농사 수입이 거의 환곡의 부담으로 돌아간다고 할 정도로 극심한 것이었다.516)≪備邊司謄錄≫19책, 순조 4년 10월 11일 및 24책, 철종 3년 7월 21일.

 결국 19세기 환정은 환곡의 진분화·허류화가 심화되면서, 환곡은 분급되지 않고 가을에 이자곡만을 거두는 부세화의 길을 걷게 되었다. 환곡의 이와 같은 운영은 농민경제의 파탄을 초래하였고, 종국에는 철종 13년(1862) 전국적인 농민의 저항에 부딪히게 되었다.

 당시 환곡개혁론은 환총의 규모를 줄이고 신규를 작성하여 환곡제 본래의 의미를 살려가자는 개선론도 있었으나, 대부분의 경우에는 운영의 한계점에 다다른 환곡제의 근본적 개혁을 요구하고 있었다. 조선정부의 삼정이정책도 이러한 개혁론 속에서 罷還歸結로 결론지어졌다. 파환귀결은 환곡제를 영원히 폐지하고, 개혁의 걸림돌이었던 모곡 수입의 감소에 대한 급대는 8道 4都의 모든 時起實結에 1결당 2냥씩 거두어 보충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었다. 아울러 남은 환곡은 일단 돈으로 거두었다가 다시 곡식을 마련하여 유치키로 하였다.517)≪壬戌錄≫,<釐整廳謄錄>임술 윤8월 19일.

 파환귀결은 이정절목에서 ‘대변통’이라고 자부할 만큼 획기적인 조치였다. 빈부와 다과의 구별이 어려운 戶를 대상으로 한 戶斂이 아니라 토지를 대상으로 한 결렴을 택하였기 때문이다. 가난한 농민의 입장에서는 모곡 수취를 통한 불법적인 수탈을 당하지 않아도 되었다. 정부로서도 부과의 대상이 확실한 결렴을 통해 재정 수입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전정과 군정의 이정책이 소변통론 범주에 머문 것에 비하면, 환정의 파환귀결은 환곡의 문제를 정면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책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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