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3. 부세제도 개선의 한계
  • 4) 환정이정책과 정책의 추진
  • (2) 정책추진의 실상과 한계

(2) 정책추진의 실상과 한계

 철종 13년 전국적인 농민항쟁을 겪으면서 조선정부는 환정의 파환귀결이라는 방책을 내놓았다. 이는 조선정부가 환곡의 부세화, 총액제 운영, 환총의 지역간 불균, 신분·빈부 간의 부담 차별, 상품화폐경제에 편승한 폐단 등 18∼19세기에 걸쳐 만성화·고질화·대형화된 환정의 폐해가 이미 부분적 이정만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한계점에 다다른 것을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환곡의 耗條가 부세화되는 추세를 그대로 받아들여 토지에 부과하는 파환귀결이 결정된 것이다.

 그러나 파환귀결은 다음과 같은 요건이 뒷받침되어야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첫째, 결렴으로 재정의 보용은 가능했으나 환곡이 담당하는 진휼적인 기능과 예비곡의 역할을 대신할 제도가 필요하였다. 이정절목은 예비곡의 필요성에 유의하여 恒留穀을 두었으나, 항류곡은 분급운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제 구빈의 기능은 영원히 폐지시킨 것이었다. 아직 환곡에 의존해야 하는 가난한 농민의 경우 이는 큰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둘째, 파환귀결로 인한 결전의 담세자를 분명히 규정해야 했다. 이정절목은 결전의 부과를 균역법의 예에 따를 것을 명시하고 있다. 균역법의 규정은 결전의 부담을 지주와 작인 간의 지세 부담자로 결정하고 있었다. 따라서 삼남과 같이 지세가 작인에게 전가되는 지방의 농민에게 파환귀결은 환영할 만한 조치가 아니었다. 셋째, 파환귀결은 양전을 비롯한 부세 수취 구조의 전면적인 개혁이 뒷받침되어야 했다. 파환귀결은 결국 결가의 증가를 가져오게 되기 때문이다. 비록 국가가 田三稅 외의 부과를 모두 금지한다고 했으나, 지방재정의 갖가지 명목이 토지에 부과되고 있었으므로 규정대로 실현되기는 어려웠다. 부세제도 전반의 개혁없이 실행되는 결렴은 오히려 농민항쟁의 원인인 결가 상승을 부채질할 우려가 있었으며, 지주와 작인 모두로부터 불만을 살 수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파환귀결은 시행 초부터 반대에 부딪혔다. 실제로 파환귀결에 대한 불만이 집단적인 저항으로 나타나기까지 했다.518)宋讚燮, 앞의 책. 결국 파환귀결은 시행 후 3달을 넘기지 못하고, 옛 규정에 의거한다고 결정됨으로써 이전의 제도로 환원되었다.519)≪承政院日記≫2657책, 철종 13년 10월 29일. 그러나 폐단이 많은 환곡제를 그대로 시행할 수는 없었다. 이에 환총을 재조정하여 부분적으로 환폐를 줄이는 「蕩逋均還」정책이 시행되었다.

 <還政捄弊節目>을 통해 삼남과 관동에 시행된 탕포균환 정책은 각 도 허류곡의 일정 부분을 탕감하고 환총을 재책정한 후, 각 지역의 환총을 ‘戶數多寡 計戶大小’에 따라 재조정함으로써 불균이 없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환총이 적지 않게 줄고 지역간의 불균형이 조정될 수 있었지만 신분간의 불균문제 즉 頉戶의 문제는 해결하지 못한 채 한계로 남았다.

 대원군 정권에 들어와서도 환곡에 대한 개혁작업은 계속되었다. 환곡의 허류를 탕감하고 토지에 일정한 세를 부과하는<蕩還歸結>의 방식이 그것이다. 충청도의 경우 철종 13년(1862)의 탕포균환조치로 38만여 석이 탕감되고 22만여 석이 實留穀으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그 가운데 분급되는 것은 3만 석에 불과하고 19만 석은 빈 장부였다. 이에 조선정부는 19만 석을 탕감하고 모조의 결렴화 방식을 채택하였다. 평안도의 경우에도 비슷한 조치가 취해졌다. 평안도의 환총 82만 석은 대부분 허류 또는 포흠이었는데, 고종 2년(1865)<關西還弊矯捄節目>이 작성되면서 환곡 운영이 모두 정지되고 토지와 호구에 일정한 세를 거두는 방식이 채택되었다. 평안도의 이같은 대책은 「파환귀결(호)」의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었다. 이처럼 농민항쟁 이후의 환곡 대책은 지역마다 일정한 것은 아니었지만, 충청도와 평안도에서와 같이 환곡 유지의 지향을 보이면서도 토지에 과세되는(歸結) 경향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경복궁 영건과 丙寅洋擾 등 재정의 확대가 시급했던 상황에서 조선정부가 환곡의 탕감에서 오는 재정적 손실을 감당하기는 어려웠다. 이에 대원군은 환곡의 복구와 社倉制를 통해 환곡을 유지 운영하면서 재정의 결핍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대원군은 고종 3년에 內帑金 30만 냥을 경기·삼남·관동 등지에 분배하여 別備穀(丙寅別備穀)을 마련하였다. 병인별비곡은 전액 분급하여 그 모조를 환총에 덧붙이도록 하였다. 그리고 흉년에도 停蕩되지 않도록 하였다. 이어 이듬해인 고종 4년에는 當百錢 150만 냥을 삼남과 황해도에 분배하여 호조 별비곡 50만 석을 마련했다. 그리고 그 모조는 작전 상납하여 호조의 수입으로 충당하였다. 또한 고종 10년에는 평안도에 癸酉別備穀을 마련하고 중앙의 재정으로 활용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별비곡은 사창제로 운영되었다. 사창제 운영의 골자는, 첫째 面民이 그 운영을 맡아 이서가 관여치 못하게 한다는 것과, 둘째 환곡의 분배를 동 단위로 신분과 관계없이 빈부에 따라 균분한다는 점이다.

 사창제가 실시된 지역은 병인별비곡·호조 별비곡이 설치된 지역을 포함하였으므로 평안·함경도를 제외한 전국이었다. 그러나 이 사창제는 몇 가지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 첫째 사창곡 설치 과정상의 문제점이다. 즉 정부가 사창곡을 마련하여 분급한 것이 아니라, 각 도별로 돈을 분급하고 그것으로 원곡을 마련하려 하였다. 이 틈을 노려 상정가 이하의 돈을 지급하고 원곡을 채워 넣으려는 고리대적인 불법이 자행되었다. 둘째 신분관계의 긴박이 잔존하였다. 사창제 운영의 책임자인 社首를 大民 중에서 차정한다든가, 원곡 및 모곡을 거둘 수 없게 된 指徵無處의 경우 洞民이 공동 책납토록 규정하는 등 신분제적 요소가 남아 있었다. 셋째 사창제는 본래의 사창제와는 달리 耗條 및 色落條(곡물의 품질 검사와 마질에서 축날 것을 대비해 더 받아들이는 곡물)를 거두는 등 환곡제를 유지하려는 입장에서 운영되고 있었다. 따라서 舊穀과 社倉穀의 이중 운영에서 오는 폐단이 발생하였고, 마침내는 사창곡이 중앙재정으로 직접 획급되기도 했다. 사창제는 대원군이 국가재정의 위기에 직면하여 별비곡을 설치하고, 환곡제 강화의 방향에서 운영함으로써 결국 그의 하야 후인 1880년대에는 거의 소멸하였다.

 이렇듯 19세기 후반 환곡제 개혁의 실상은 이정책에서 제시된 파환귀결의 원칙에 비추어 많은 한계를 지닌 것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적지 않은 의미를 지니고도 있었다. 즉 환곡의 부세적 기능은 농민들의 저항을 받으면서 파환귀결의 방향에서 운영되다가 갑오개혁기에 結稅제도로 수렴되었다. 또한 진휼의 역할은 별도의 사환미를 설치하여 운영하는 社還制로 귀결되었다. 결세제도는 환곡을 포함하여 새로이 결세의 수취체계를 세운 것이었으며, 사환제는 환곡의 취모보용 기능을 제거하고 그 운영을 향촌민에게 일임하는 새로운 지방제도의 시행과 맞물린 것이었다.520)宋讚燮, 앞의 책. 요컨대 환곡제는 19세기 후반 몇 차례의 농민항쟁에 부딪히면서 변화하는 가운데 근대 재정제도와 지방제도 확립의 역사적 배경을 이루었던 것이다.

<李哲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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