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1. 청국과의 관계
  • 2) 심양에서의 소현세자

2) 심양에서의 소현세자

 병자호란의 결과 조선의 세자532)昭顯世子(1612년 3월∼45년 4월)는 仁祖와 仁烈王后 韓氏 사이의 장남으로 이름은 이고 1625년 세자로 책봉되었으며 그의 嬪은 右議政 姜碩期의 딸이었다.가 인질로 8년이나 청의 수도인 심양에 가 있었다는 사실은 그 예가 흔치 않은 일로서 17세기 중엽 양국간의 정치문제로 대두되었다. 세자의 인질문제는 청으로서는 조선의 조약 준수를 보장받고 조선의 대명정책을 견제한다는 의미에서 중요한 조건이었다.

 인조 15년(1637) 정월 30일 인조가 청 태종 앞에서 굴욕적인 항복의 의식을 행한 후, 세자는 그대로 청 진영에 들어갔다가 2월 5일 돌아온 지 3일 후 청의 九王인 睿親王 도루곤(多爾袞)에게 인도되어 회군하는 청군을 따라 북행하게 되었다. 일행은 세자와 嬪, 鳳林大君, 判書 南以雄 이하 관원 180명이었다.

 이들 일행이 심양에 도착한 것은 4월 10일이었고, 인조 23년 2월 영구 귀국하기까지 거의 8년을 만주의 심양에 머물렀다. 소현세자는 귀국 후 2개월 만에 갑자기 사망한 비운의 왕세자였다. 그는 약 1개월씩 2번(1640. 3∼4, 1643. 1∼2) 서울에 머물렀던 기간을 제외하고는 생애의 중요한 시기를 대부분 인질로서 생활하였다.

 조선의 세자가 이렇게 인질로서 심양의 瀋館에서 지냈다는 것은 한중관계사에서 그 유래가 없는 일로서, 청조는 인질인 소현세자를 통하여 조선의 대청관계를 견제하고 압박하였으며, 조선의 대명관계를 억제시키고 단절시키는 효과를 얻었다. 이미 1636년 3월 20일 조선과 국교를 단절하고 조선을 멸할 것을 고려하면서 인질로서 왕자나 대신을 연행할 것을 논의한 사실533)≪滿文老檔≫太宗朝, 天總 10년 3월 20일.에서 보면 병자호란 이전부터 인질이라는 문제에 깊이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반면 조선은 소현세자나 그 밖의 인질을 통해 청조의 사정을 탐지하거나 청의 대조선 정책을 견제한다는 것은 거의 기대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그러나 인조는 蘇武534)前漢 武帝 때 匈奴에 사절로 갔다가 單于의 母를 漢에 납치하려던 계획에 참가, 失敗한 후 온갖 고초를 겪고 곤경에서 19년을 지내다가 흉노와의 화친으로 昭帝 때 돌아온 인물.의 예를 들어 소현세자에게 큰 기대를 걸기도 하였다. 여하튼 소현세자의 문제는 그가 인질이라는 위치를 벗어나지 못하였고, 그의 역할이나 역량이 비록 표면적이고 구체적이지는 못하였다 하더라도 한중관계사에서의 그의 위치는 나름대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청과 조선의 초기 관계에서 조선이 청에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는 억압되고 예속되었다 하더라도 문화와 경제 기타 부문에서는 청 조정에 영향을 미쳤고 이런 요소들이 청의 중국 진출에 한 부분이 되었을 것이다. 소현세자와 도루곤과의 관계를 통해 그 예를 찾아 볼 수 있다.

 이들은 8년간 심양관소에서 생활하게 되는데, 한때 조선사신 접대관인 東舘에 거주하다가 5월 7일 준공된 심양관소로 옮겼고 그 곳에서의 생활은 인질로서 출입의 제한은 받았지만 그 이외 큰 불편은 없었다. 이에 대해 “인질은 그 자체가 일종의 제약을 주는 정략적인 것으로, 심양에서의 세자 및 대신 등은 청·조선 양국 모두에 어려운 위치에 서지 않을 수 없었다. 청의 이러한 정책은 이들을 단순히 인질로서 잡아 놓은 것뿐만 아니라 양국 교섭에서 조선에 대한 견제에 효과가 있었다”535)田川考三,<瀋舘考>(≪小田先生頌壽紀念朝鮮論集≫, 京城, 1934), 489쪽.라고 표현하고 있다.

 여하튼 어려운 중간 위치의 소현세자는 청과 조선 간의 문제를 중재해 갔으며, 양국으로부터 다 좋은 반응을 얻지 못하였다. 그의 심양생활은 출입의 제한을 받았고 초기에는 언어가 불통하여 황제와의 대화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入瀋한 이후인 7월 청조가 그와 봉림대군에게 蒙書를 학습시키려 했을 때 언어가 통하지 않아 할 수 없다고 거절한 일도 있었는데, 이는 언어를 이유로 그들 요구에 응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536)≪瀋陽日記≫丁丑年(인조 15;1637) 5월 9일·26일, 7월 21일.

 청으로서는 이들과의 친선 도모와 관계 원활을 위해 제사, 몽고 부족들의 조공, 명나라 장군의 투항으로 인한 회합에 반드시 참석시키고, 매월 5일·15일·20일의 왕이나 장군의 청황제에 대한 조회와 소연에도 반드시 참석시켰다. 또 睿親王 도루곤을 비롯한 왕족은 세자를 초청하여 연회를 베푸는 등 인간적인 친숙의 기회를 마련하는 데 주력하였다.537)金龍德,<昭顯世子硏究>(≪史學硏究≫18, 1964), 439쪽. 이러한 청의 태도에 대하여 세자가 강경 일변도로 대처한다면 양국관계는 더 불편하게 될 것이므로 세자는 좋은 뜻으로 대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세자에 대한 불만은 조선에 대한 간접적인 불만의 표시였다. 그들은 助兵이나 군량 및 向化人(조선에 있는 兀良哈人으로 각지에서 조선인과 婚娶하여 일반민 같이 지내는 사람)의 쇄환 등과 같은 문제 때문에 조선에 대하여 불만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조선에 대한 불신은 瀋舘의 세자에게 西行을 명하기도 하였다. 세자는 자기의 신분이 ‘講學視膳而己’이며 본래 국정의 법은 간여할 수 없다고 곤경에 처할 때마다 책임을 회피하였다.538)崔韶子,<淸廷에서의 昭顯世子>(≪于湖全海宗博士華甲紀念史學論叢≫, 一潮閣, 1979), 379쪽. 세자와 비교적 친숙하였던 아지제(阿濟格)가 “황제가 무슨 일을 분부할 때마다 세자는 무릇 임의로 혼자 결정할 수 없고 다만 본국에 전보할 수 있을 뿐이라고 말하나, 이후 만약 황제의 명이 있으면 모름지기 그 뜻을 알고 좋게 대응하여야 할 것이다”539)≪瀋陽狀啓≫庚辰年(인조 18년;1640) 7월 20일자.라고 말하고 있는 것을 보아도 평상시 세자가 조선과의 일에 직접 나서지 않으려고 했었음을 알 수 있다.

 향화인의 쇄환을 독촉하는 것을 세자가 본국에 전달하지 않자 龍骨大는 심한 불만을 표하기도 하였으며, 1638년 9월 명나라 정벌에 5천 병력을 출정시키라는 청의 요구도 막으려 하였으나 힘들었고,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중간에 있는 그의 입장은 난처하였다. 청조는 세자를 중간에 세우면 조선이 좀더 잘 응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였고, 조선은 세자가 중간에 있으면 청의 요구를 덜 반영하여도 될 것이라고 생각하여 세자는 늘 양국의 중간에 끼어 어려운 처지였다. 1640년 4월 명나라 정벌시 조선 공미를 군량으로 하려 하였을 때도 같은 결과였다.540)金龍德, 앞의 글, 442쪽. 황제는 자신의 분부를 항상 세자가 막으려 하는 것을 매우 불쾌히 여겼다. 황제는 세자가 자기의 독자적인 재량으로만 판단하지 말고 우선 본국에 통보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분부가 있을 때는 함부로 거부하지 말고 선처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충고를 하기도 하였다.541)≪瀋陽狀啓≫庚辰年(인조 18년;1640) 7월 20일자. 이러한 양국관계는 瀋獄事件(1642)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렇듯 황제나 황실 인물들은 세자의 소극적인 태도에 불만스러워 했다.

 반면 조선의 반응도 매우 회의적이었다. 소현세자가 청국에 가기 전 이들 부자관계가 어떠하였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인조 23년(1645) 귀국 후 인조는 소현세자에게 상당히 복합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초기에는 그의 귀국을 요청하는 사신을 심양에 보내기도 했지만, 그가 청 조정에서 책봉을 받고 일시 귀국하는 시기에는 인조와 세자 두 사람 사이의 갈등은 심화되었다. 또 심양관의 규모나 역할이 커져서 교섭이나 교역에 관한 일이 많이 취급되면서 이들 부자 간의 관계는 더욱 미묘하게 되었다. 인조는 세자에 대하여, 세자는 이미 심양에 오래 머물렀기 때문에 청나라 사람과 같아져 田獵戎馬之間을 출입하고, 講學을 전폐하고, 오로지 貨利에 힘쓴다542)≪仁祖實錄≫권 46, 인조 23년 4월 무인.
崔韶子, 앞의 글(1979), 380∼381쪽.
당시 瀋舘은 단순히 質子舘이 아니라 대사관 이상의 정부 대리기관이었으며 세자의 지위도 국왕 대리를 방불케 하였다. 청이 필요한 물자의 많은 부분을 접수하고 조절하며 本國에 전달하는 기관이었다.
고 비판하기도 하였다.

 세자가 청의 요구를 막지 못하고 청의 뜻대로 움직인 것 같이 보였던 것도 무리는 아니었으며, 세자의 권한이 늘고 또 친청적으로 되어 가자 인조의 瀋館에 대한 감시는 더 심해졌다. 두 사람의 관계는 2차 瀋獄 이후 그 균열이 더욱 심해졌다. 이 때도 세자는 적극적으로 청측을 설득하거나 항의하는 것이 아니고 냉담한 태도여서 인조의 심관에 대한 의혹은 날로 깊어 갔다. 이 시기 소현세자는 양국의 중간에서 청이나 조선 어느 쪽으로부터도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의 이면에는 소현세자가 성격상 능수능란하지 못하였고 어느 쪽에도 기울어지지 않는 비교적 공정한 입장에서 사리를 판단하고 처리해 왔던 사례들이 있었기 때문으로 그가 친청적이었다는 국내의 비판도 없지 않지만 그렇게 단정하기는 어렵다.

 소현세자의 심관생활(1637∼45)은 인질이었기에 자의적이고 자발적인 면모를 엿보기는 어렵지만 ≪淸太宗實錄≫·≪瀋陽狀啓≫·≪瀋陽日記≫ 등에서 외형적으로 제한된 활동들이 나타난다. 그는 청측의 요구에 의하여 의례적인 행사에 참여했고, 西征 및 수렵에도 참여했다. 또한 청이 조선과의 현안문제를 세자와 함께 의논, 해결하려고 할 때 그 역할을 담당하였다. 반면 조선은 청측의 요구에 대하여 세자를 통해 답하거나 해결한 것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따라서 소현세자의 위치는 대체로 청측의 대조선문제의 중간 역할을 담당한 것이지 조선의 대청문제의 중개 역할을 할 위치는 아니었다.

 세자의 활동을≪심양장계≫나≪심양일기≫를 통해 보면 먼저 명나라 정벌을 위한 문제로 助兵·軍糧·向化와 관련된 것들이고, 그 밖에 친명적인 대신의 처벌이나 選侍女 入瀋 문제들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현안문제들은 세자가 조선의 입장을 청에 설명하는 것이 아니고, 청의 입장을 조선에 반영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책임있는 대답은 회피하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자기는 視膳 외에는 아무 일도 할 수 없고 본국에 알리겠다는 정도로 비협조적인 대답을 하여 청의 비난을 사고 있다. 그러나 황제를 비롯하여 제왕들의 개인적인 관심과 필요에서 나온 것일 경우는 세자가 본국에 요청하여 공급하였다.

 그가 참여했던 의례적인 행사 가운데는 매월 5·15·20일 각 왕·왕자 및 장군 등이 황제에 대한 조회의 예로서 眞瓜宴이라는 小宴을 행할 때 여기에 가끔 참여하였음이≪심양일기≫에 기록되고 있다. 또 별일이 없는 한 제사, 몽고 부족들의 조공, 명장의 투항으로 열린 각종 회합에 참석하고 있다. 그 밖에 조선문제와 관련하여 이들 인질을 불러 사연을 베푸는 경우 참석하였다. 그리고 예를 마친 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황제의 요청에 따라 從人 중 善射者·角戱者를 선발하였던 일도 있었다. 이러한 의례적인 행사에는 청 조정을 움직이는 주요 인물들이 다 모이는 기회로 대체로 諸王·貝勒·貝子 등과 三順王,543)三順王은 청에 투항한 明將으로 후에 중국정벌의 주역인 恭順王 孔有德, 懷順王 耿仲明, 智順王 尙可喜 등을 이른다. 조선국 왕세자 및 次子, 몽고 부족들의 왕들이 참여하였다.544)崔韶子, 앞의 글(1979), 381∼382쪽.
諸王, 貝勒, 貝子, 蒙固 諸部의 왕들 및 藩屬의 왕들이 참석하는 정례적인 의식과 행사는 朴趾源이 熱河를 방문하였을 때에도 행해졌는데, 淸朝는 이러한 의식을 통해 주변 지역과의 유대를 공고히 하고 그들의 동태를 파악하여 세력을 견제시키는 데 이용하여 왔다.

 세자는 대명정벌을 위한 西征에 2회에 걸쳐 참여했다. 즉 1회는 1641년 태종을 따라 錦州·松山 정벌, 2회는 1644년 睿親王 도루곤의 征明軍을 따라 山海關∼北京 정벌에 참가했다. 봉림대군은 그에 앞서 1638·39·41·44년에 걸쳐 모두 4회의 對明西征에 참여했지만 세자는 稱病하고 마지막 2번만 참여하였다. 1644년의 경우 산해관 입관 및 북경 입성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앞서의 전투 참여와는 좀 다른 성격으로 볼 수 있다. 특히 1641년의 錦州·松山 등지 정벌에 세자가 참여했을 때는 창졸간에 가게 되어 겨울 장비를 갖추지 못하여 얇은 옷을 입고 있어 무척 고생이 심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볼 때 세자의 참여는 처음부터 계획되지 않았던 것이거나 또는 계획이 있었다 하더라도 참여하지 않을 의사를 더 많이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예측할 수 있다.545)≪瀋陽狀啓≫辛巳年(인조 19년;1641) 9월 2·10일자.

 또 수렵에는 1638년부터 43년까지 5차례 참여하였는데 騎射의 기풍을 통해 무력을 과시했던 것이지만 그런대로 부담없이 참여했던 것 같고 그 규모는≪심양일기≫에 의하면 50여 명쯤 되었던 것 같다.

 청은 소현세자에게 각 왕이나 장군들과의 사교를 금지시키고 하인잡배의 언행은 물론 비밀리에 국정의 누설 등에 신경을 썼고, 조선 사신이 심양에 들어왔을 때는 반드시 별관 혹은 西館에 머물게 하여 이들이 곧바로 瀋舘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임무를 마친 후에 심관에 들도록 하였다. 뿐만 아니라 청 조정의 인물들과 접촉하는 것도 제한하였는데 세자가 주로 만날 수 있었던 사람들은 多爾袞(도루곤;누르하치의 14子)546)多爾袞(1612∼1656)은 누르하치의 14子로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인 면에서 당시의 실력자였고 順治帝 즉위(1644년) 후 攝政으로 실권을 장악하였으며 조선으로부터 義順公主를 妃로 맞아들이는 등 조선과는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崔韶子,<淸初의 王位繼承과 多爾袞>(≪梨大史苑≫9, 1970).
―――,<淸代 韓中通婚考>(≪梨大史苑≫7, 1968) 참조.
, 代善(다이산;누르하치의 2子), 多鐸(도도;누르하치의 15子), 阿濟格(아지제;누르하치의 12子) 등 황실 인물들과 英俄爾岱(잉굴다이)였다. 이들은 모두 호란과 관련하여 조선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던 인물인데 ,≪심양상계≫나 ≪심양일기≫에서 일반적으로 황제를 중심으로 동쪽에는 九王(도루곤;다이곤)·十王(도도;다탁), 서쪽에는 虎口(하오게;태종의 長子)·要土(요토;대선의 장자)·頭頭(두두;杜度)가 있다고 하였다. 이들은 입관 전 청 조정의 실력자들로 도루곤·도도·아지제는 모두 누르하치 사망시 순장된 大妃 烏刺納刺(우라나라;孝烈武皇后)의 소생이다. 그리고 당시 누구보다 실력자이자 실권자로 행세한 인물이 도루곤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소현세자가 도루곤과 일정한 관계를 유지하였다면 심양에서 활동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을 것이다. 세자는 1644년 입관 과정에 참여하였고 북경 입성 후 귀환이 결정되었지만 이것을 태종 사망 후 도루곤이 공표하였다든가, 또 북경(1644. 9. 19∼11. 26)에서 세자와 서양인 선교사 아담 샬(Adam Schall)과의 만남을 주선하고 서양 문물의 흡수 등에 관해서도 서로 논의했을 것이라는 사실이 이 두 사람의 관계를 말해 준다. 그러나 세자와 도루곤의 관계는 그 친분 정도와 비례하여 주변에게는 꺼림칙하고 위협적인 존재로 이해되었을 것이고 도루곤은 세자를 통해 조선에서의 세력을 확대하려는 저의도 있었을 것이다.

 세자가 귀국한 것은 1645년 2월 17일인데 순치제는 중원이 평정되었으므로 조선국 인질인 세자 李를 귀국토록 했다. 여하튼 소현세자는 귀국 후 곧 병사하였기에 모든 가능성과 그에 대한 비판적 의견은 동시에 의혹 속으로 사라졌다.547)≪淸世祖實錄≫권 11, 順治 원년 11월 경술.
≪仁祖實錄≫권 45, 인조 22년 12월 무오.

 청은 소현세자를 대조선문제 해결의 중개적 위치로 생각하여 그를 통해 조선과 좀더 원활한 관계를 시도하려 했다. 그러나 소현세자 자신은 “세자란 視膳 이외에 다른 일을 할 수 없다”는 입장에서 청의 대조선 정책 수립에 별다른 조언을 주지 않았다. 결국 그가 처한 인질이라는 묘한 위치 때문에 자신의 역량을 발휘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 그러나 도루곤과 관계가 비교적 가까웠으므로 청 조정에서의 그의 활동과 행동은 표면적이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활력을 가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태종 사망 후 도루곤과 함께 했던 세자의 행동은 그 이전과는 다르게 자의적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바로 이 점에서 아담 샬과의 관계를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그가 귀국 후 곧 사망하지 않았다면 그는 조선의 대청외교에 유화적인 면을 보이면서 진보적인 새로운 문물에 관심을 가져, 물론 많은 반대도 감수해야 하겠지만, 조선의 장래에 변화를 가져오지 않았을까 보여진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