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2. 일본과의 관계
  • 1) 왜란 이후 조일 통교의 회복
  • (2) 기유약조의 체결과 통교체제의 확립

(2) 기유약조의 체결과 통교체제의 확립

 선조 40년 회답겸쇄환사의 파견으로 양국 간의 교린관계가 회복되기는 하였지만, 이는 일본 내의 유동적인 정세 변화 및 南倭北擄라는 17세기 초 동북아 정세 속에서 보국안민을 위해 중앙정권 차원에서 우호를 확인하는 수준이었다. 무역 등을 포함한 교린체제 재편성이라는 과제는 광해군 원년(1609) 己酉約條가 성립되어서야 비로소 해결되게 되었다.

 조선은 선조 37년(1604) 6월 대마도에 유정과 손문욱을 파견하여 허화를 전하면서 이미 開市(사무역)를 허락한 바 있었다. 그런데 조선이 무역을 허락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마도는 조선에 사자를 보내 무역액을 증가시키려는 노력을 보이지 않았다. 대마도가 교역을 둘러싸고 조선과의 논의를 시도하게 되는 것은 선조 41년 ‘일본국왕사’의 파견때부터로, 광해군 원년 3월에는 대마도의 외교승 玄蘇(겐소)가 324명의 사절단을 데리고 부산에 왔다. 이 때 부산에서는 국왕사에 대한 접대와 더불어 선위사 李志完과 외교승 현소 사이에서 비로소 교역을 위한 기유약조가 체결되었다.

 약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611)≪光海君日記≫권 17, 광해군 원년 6월 정축.
≪通文館志≫권 5, 交隣 上, 萬曆 己酉約條.
≪增正交隣志≫권 4, 光海元年己酉改定約條.
≪朝鮮通交大紀≫권 5, 萬松院公 己酉約條.

㉠ 조선에서 접대하는 예는 국왕사신과 대마도주의 특송과 대마도 受職人으로 합하여 3례에 한정한다.

㉡ 국왕사신에게는 本船과 副船만을 허가한다.

㉢ 대마도로부터의 세견선은 20척에 한정시키며, 이 속에 특송선 3척을 포함시킨다. 대선은 6척, 중소선은 각각 7척이다.

㉣ 대마도주에게 매년 1번 歲賜米·斗를 100石 급여한다.

㉤ 수직인은 매년 1번 來朝하되 대리인의 파견은 허락하지 않는다.

㉥ 戰前의 수직인은 죄의 면죄를 다행으로 알고 이의를 제기해서는 안된다.

㉦ 배의 길이가 25尺 이하를 소선, 26·27척을 중선, 28∼30척을 대선으로 한다. 船夫로는 소선이 20인, 중선이 30인, 대선은 40인으로 하며, 이 규칙을 어겨서는 안된다.

㉧ 조선에 파견하는 모든 배는 대마도주의 文引을 지참해야 한다.

㉨ 대마도주에게는 전례에 따라 圖書(銅印)를 지급하기로 한다. 견본은 校書館, 그리고 부산포에 두어 그 진위 확인시에 대조한다.

㉩ 문인을 지참하지 않고 부산포 이외의 지역으로 접근해 오면 賊으로 간주한다.

㉪ 過海料(來船手當)로 대마도인에게는 5일 분을, 대마도주의 특송선사에게는 10일 분을, 일본국왕사신에게는 20일 분의 식량을 지급한다.

㉫ 왜관에 체제하는 기일은 대마도주 특송선을 110일로 하고, 나머지 세견선은 85일로 하되, 표류인 송환차왜와 각 항별 차왜는 55일로 한다.

㉬ 기타의 세목은 전규에 따른다.

 13개 항목에 달하는 약조의 특징은 대략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대마도의 세견선수를 20척으로 감소시키고 세사미두의 양을 조선 전기 癸亥約條의 절반 수준으로 줄임으로써 대마도에 대한 교역량을 제한하였다.

 둘째는, 조선 전기의 교역체계인 文引·圖書·受職人制를 그대로 답습하면서, 15세기 초부터 일본내의 각종 통교자를 통제하기 위해 대마도의 宗氏에게 渡航文書의 발행권을 위임하던 문인제도를 통해 외교창구로서의 대마도 종씨의 위치를 더욱 확고히 하였다. 이 규정에 따르면 실제로는 한번도 파견된 적은 없지만 일본국왕사선까지도 대마도의 문인을 받아와야 했다.

 세째는, 국왕사선을 제외한 巨酋使 등 일본의 특정세력이 파견하는 사자에 대한 규정을 없애는 대신 모든 규정을 대마도 종씨에 귀속시킴으로써 통교루트를 일원화하였다.

 이상을 정리해 보면, 기유약조는 임진왜란 전까지 대마도와 맺었던 약조들을 집약하여 대마도를 조선의 기미권 안에 재편입시키기는 했으나, 대마도가 요청해 올 교역관계 확대 요구를 최대한 억제한 것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대마도를 통한 일본 막부와의 간접 통교 루트를 설정함으로써, 새로 개편된 외교 체제 속에서 무역을 비롯한 대마도의 기득권을 보장한 것으로 조선 후기 조일관계의 기본 골격을 제시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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