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2. 일본과의 관계
  • 4) 19세기 조일 통교체제의 왜곡
  • (2) 조일 교린관계의 변화

(2) 조일 교린관계의 변화

 전근대의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한 양국관계는, 일본에서 명치정부가 수립된 이후 침탈·피침탈 또는 불신·멸시의 관계로 변질되어 가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앞에서 설명한 역지빙례, 즉 정부 차원에서 이루어진 통신사 의례의 왜곡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양국의 변경으로 존재하면서 자립할 수 없는 경제구조를 가지고 있던 대마번의 이해가 일본 내부의 정치적 변동과 맞물리면서 통교체제 개편에 장애가 되고 있었다.

 대마도는 양국의 변경에서 교섭 창구 역할을 하면서 양국으로부터 경제적으로 많은 기득권을 부여받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은 조일관계가 안정되어 감에 따라 기회있을 때마다 우대조치를 삭감하려 하였다. 조선이 순조 11년 신미통신사 파견시 의례 장소를 대마도로 변경하는 것을 수락하는 조건으로 대마번에 요구한 폐해 16조의 개선이 그 좋은 예이다. 이러한 조치들은 18세기 이후 계속되는 대조선무역의 침체로 곤란해진 대마번의 재정을 더욱 심각하게 하는 것이었다.

 한편 일본에서는 1854년 미국에 의해 개국한 이후 기존 막부가 취해 오던 외교관계 및 대외정책에 변화가 생겼다. 서양 여러 나라와의 통상 및 외교가 증가하면서 막부에는 外國奉行이라는 직책이 생겼으며, 유일한 通信의 나라였던 조선의 비중이 낮아졌다. 그 결과 양국 외교의 중요성을 바탕으로 주어진 대마도에 대한 특권은 조일 양국 모두에게 관철시키기 어려운 상황이 되어 가고 있었다.

 이러한 시대 상황과 막부의 외교정책 변화를 읽은 대마번의 일부 세력은 藩의 존속을 꾀하기 위하여, 조선과의 교섭을 막부가 직접 떠맡을 것을 제의하였다. 대마번이 조일 간접 통교체제 속에서 대조선외교를 대행하는 조건으로 누려온 기득권을 포기하는 대신 막부를 상대로 경제적인 보상을 받아내자는 것이었다. 이는 막부에 대한 移封 및 원조 요구로 구체화되었다.

 이봉이란 막부가 대마도 전역을 직할지로 삼아 開港하는 대신 대마도에게는 九州 지역 안에서 10만 석에 해당하는 땅을 달라는 것이었다. 막부는 대마도의 개항을 내정하였으나, 攘夷派의 압력으로 결국은 이봉이 실패하게 되며, 막부는 조선문제를 다시 대마도에 위임하였다.

 그러나 막부가 조선과 직접 통교해 보려는 시도를 아주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고종 3년(1866) 막부는 以酊菴 윤번제를 폐지함으로써 조선과의 直交를 염두에 두고 있었으며, 대마도에 외국봉행을 파견하겠다는 지시를 내렸다. 이에 막부는 1866년 丙寅洋擾로 인한 조선과 프랑스 간의 충돌을 막부에서 직접 사자를 파견하여 조정함으로써 조선과의 직접 외교를 맺는 계기로 삼고, 막부의 외교적 지위를 상승시킴으로써 지방 영주 위에 군림을 시도하려 했다.

 막부의 사자 파견 계획은 1867년 10월 마지막 장군의 太政奉還과 12월 京都 조정의 王政復古 선언(明治維新)으로 막부가 폐지됨에 따라 무산되고 말았다. 그 결과 막부 말기 직교체제로의 전환 시도는 실패로 끝났으며, 조선과 일본 간의 간접 통교체제는 당분간 유지되었다. 기유약조에서 정해진 대로 대마번이 조일 양국의 통교를 담당하는 상태에서 명치(메이지)정부가 들어선 것이다. 막부가 조선과의 직접 통교체제를 시도하는 가운데 대마번이 기득권을 잃지 않으려고 막부를 상대로 정치적 운동을 벌이는 과정에서 형성된 중앙 정부와 대마번 사이의 긴장은 기본적으로 명치정부에 들어가서도 계속되었다.661)玄明喆,<文久元年對馬藩の移封運動について>(≪日本歷史≫ 536, 1993).
―――,<幕末∼明治初 對馬藩 처리에 대한 考察>(≪日本歷史硏究≫ 2,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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