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2. 일본과의 관계
  • 5) 개항 전후 양국관계의 추이와 전근대 통교체제의 붕괴
  • (2) 왜관 침탈과 조일관계의 변질

(2) 왜관 침탈과 조일관계의 변질

 1871년 일본에서는 막부시대의 藩을 폐지하고 縣을 두는 廢藩置縣이 단행되었다. 외무성은 이를 계기로 조선과의 통교에서 이전보다 더 주도권을 발휘하게 되었다. 대마번은 1871년 9월 伊万里(이마리)縣에 병합되고 번주 宗義達(소오 요시아키라)은 외무성원으로 편입되어 外務大丞에 임명되었으며, 명치정부는 대마번 처리를 위해 대마번의 부채를 상환하였다. 구대마번은 이러한 변화를 조선에 알려 왔으나, 조선은 종래대로 대마번을 통한 교제를 주장하였다. 특히 명치정부의 岩倉具視(이와쿠라 토모미)를 단장으로 하는 사절단의 구미 파견을 계기로 조선문제를 외무성 관리 길강홍의가 책임을 지게 되자, 대마번의 정치적 입장은 약화되었다.681)≪朝鮮外交事務書≫3, 757쪽.
≪日本外交文書≫1(韓國篇), 355쪽.

 이런 가운데 1872년 정월에는 조선과의 외교관계 회복을 위해 외무성 관리 森山茂(모리야마 시게루)·廣津弘信(히로즈 히로노부)이 구대마번사 相良正樹(사가라 마사키)·浦瀨裕(우라세)와 함께 부산에 파견되었다. 이후 왜관측은 외무성 관리의 책임하에 훈도와의 교섭을 시도하게 되며, 외무대승 종의달의 서계를 지참해 온 상양정수는 동래부사(정현덕)와의 면담을 요구하였다. 훈도와 별차는 교섭에 소극적이었으며, 조선 조정은 왜관의 훈도 安東晙을 통해 왜관의 상황을 보고받는 정도였다.

 조선과의 교섭이 지체되는 속에서 외무성 관리는 4월에 왜관 정리의 필요성을 외무성에 건의하였으며,682)≪日本外交文書≫1(韓國篇), 371쪽. 왜관 관수 深見正景(후카미 마사카게)은 교착을 타개하기 위해 5월 상양정수 등을 이끌고 동래부 관아에 가서 집단 시위(난출)에 들어갔다. 대수대차사가 가져온 종의달의 서계 접수를 요구하는 왜관측의 난출은 조선측의 저지로 10일 이상 끌었으나, 결국 동래부사와의 면담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 대신 차비관 韓寅鎭이 동래부사의 접견 거부 이유를 적은 각서를 왜관측에 전하였다.

 왜관측의 난출 소식을 접한683)≪日省錄≫ 권 123, 고종 9년 6월 7일. 조정에서는 이러한 사태를 막지 못한 동래부사 정현덕에 대한 처벌 여부가 논의되었으나,684)위와 같음.
≪承政院日記≫고종 9년 6월 7일.
고종은 죄를 묻지 말라는 전교를 내렸다.685)≪日省錄≫고종 9년 6월 8일.
≪承政院日記≫고종 9년 6월 8일 및 6월 11일.

 한편 왜관에서의 난출이 문제가 되고 있을 때, 명치정부는 5월 28일 부산 초량의 왜관사무를 외무성 소관으로 하고, 외무성 직원이 아닌 구대마번사들의 퇴거·귀국을 명하였다. 뿐만 아니라 대마번의 대조선무역(세견선의 파견, 공무역)을 중지하는 대신 대마도에 5,000원(일본 통화)을 지급하였다.686)≪朝鮮外交事務書≫4, 247∼267쪽. 그리고 기타 구대마번이 대행하던 조일 상호간의 표류민 송환 업무도 長崎(나가사키)현으로 이관시킴으로써,687)위와 같음.
≪日本外交文書≫1, 378∼382쪽.
대조선 외교의 일원화가 급진전되었다. 1872년 9월에는 외무대승 花房義質(하나후사 요시타다)이 파견되어, 館守 深見(후카미)을 외무성 9등 출사로 임명하여 館司에 보임하고, 구대마번사를 귀국시켜 버렸다. 이는 외무성이 대마번으로부터 왜관을 접수한 것으로 대마번의 외교권이 상실되었음을 의미한다.688)≪朝鮮外交事務書≫1, 413∼415쪽.

 동래부사 정현덕의 장계로 외무성의 일방적인 왜관 접수 소식을 접한 조선 조정에서는 일단 수백 년 동안 지속되어 온 대마번을 통한 조일 간접통교 방식은 단절된 것으로 파악하고 외무성 관리를 귀국시키기로 결정하였다.689)≪日省錄≫고종 9년 10월 3일. 조선은 대마번이 교섭창구로서 기능하지 않는 한 초량 왜관을 폐쇄하여 원래대로 초량읍으로 환원시킬 생각이었다. 명치정부의 왜관 접수는 일본측에서 봤을 때 외무성이 조선과의 외교·무역을 직접 취급하기 위해 대마번을 처리하는 차원에서 시행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를 조선의 입장에서 보면 왜관을 침탈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에 조선측의 입장은 강경하였으며, 외교의 개혁은 있을 수 없다고 판단하여 구교를 준수하든가 단교를 하든가 양자 택일을 한다는 반응이었다. 외무대승 화방의질은 조선측의 항의 때문에 교섭을 진전시키지 못한 채 부산을 떠났다. 그러나 1873년 3월 부산에 파견된 외무성 7등 출사 廣津弘信은 초량 공관을 완전히 접수하여 大日本國公館이라 명칭을 바꾸고 관수 심견을 면직시켰다. 이에 조선은 종래 동래부의 훈도를 통해 왜관측 사안을 받아들이던 공적 교섭 루트를 중단시켜 버렸다.

 명치정부(외무성)의 왜관 침탈로 왜관 기능이 정지되고 조선이 교섭루트를 폐쇄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으로 양국 간의 국교가 완전히 단절된 것은 아니었다. 왜관 침탈 이후에도 한편에서는 표류민 상호 송환 등의 일상적인 교류가 이전까지와는 다른 루트로 지속되고 있었다. 1873년 6월부터 그 이듬해 정월 사이에 일본은 14건의 조선인 표착 사건 중 10회에 걸쳐 조선인 표민을 송환해 왔다. 송환 비용도 아직까지는 일본측이 부담하였다.690)池內 敏,<倭館と漂流民の明治維新>(≪日本史硏究≫ 411, 1996), 30∼31쪽. 조선은 이들의 송환을 거부하지는 않았는데, 이렇게 일본측과의 교류가 여전히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은, 당시 일본이 조선 조정-명치정부(외무성)라는 통교 루트의 개편을 위해 전략상 구막부시대 이래 교린외교의 구태를 최소한도로 유지하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교린관계는 단절되었으나, 최소한의 교류는 유지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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