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2. 일본과의 관계
  • 5) 개항 전후 양국관계의 추이와 전근대 통교체제의 붕괴
  • (3) 조일수호조규 성립과 전근대 조일 통교체제의 붕괴

(3) 조일수호조규 성립과 전근대 조일 통교체제의 붕괴

 조선에서는 1873년 12월 大院君의 실각과 함께 대일교섭 교착에 대한 반성이 대두되고 있었다. 개항정책의 대두로 그간의 대원군외교에 대한 책임 추궁이 있었으며, 그 결과 고종 12년(1875)에는 동래부사 정현덕과 훈도 안동준이 처벌을 받았다. 일본은 조선 내에서의 이러한 정권 교체를 서계 접수 및 무역을 재개할 수 있는 계기로 여기고 있었으며, 1874년 6월에는 서계 접수 교섭을 위해 외무성 관리 森山茂(모리야마 시게루)를 부산에 파견하였다. 그러나 일본 내부적으로는 아시아 침탈의 일환으로 조선에 대한 무력 개항정책이 이미 1874년 2월부터 大久保利通(오쿠보 도시미치)·岩倉具視(이와쿠라 토모미) 등에 의해 추진되고 있었다. 이는 조선의 경계를 요하는 일로, 1874년 6월에는 일본의 대만 공략 사실이 조선에 전해졌으며, 일본이 프랑스와 미국의 군사적 지원으로 조선을 침공한다는 유언비어도 나돌았다. 뿐만 아니라 청국신문에 일본의 征韓論이 소개되었다.

 조선은 일본의 이러한 움직임을 주시하면서, 고종의 친정을 계기로 신동래부사 朴齊寬으로 하여금 초량 공관의 분위기를 살피게 하고, 동래부 비장 南孝源으로 하여금 예조판서 趙寧夏의 지시에 따라 森山茂를 만나 교착 상태를 풀 수 있는 방안을 협의하게 함으로써 양국의 통교 교섭이 이루어질 수 있는 분위기 조성에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1875년 2월에는 삼산무 일행이 부산에 서계(외무경·외무대승)를 지참해 왔는데, 이 때의 서계는 원문이 일본문인 것을 비롯하여 외무성 도장이 찍혀 있었으며, 조선을 위협하는 용어가 기재되어 있었다. 이에 조선 조정 일각에서는 서계 배척론이 대두되었으나 고종의 개항정책을 고려하여 퇴각을 보류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6월에는 2품 이상의 관리들에 대한 의견 조사 결과 배척론이 우세해짐에 따라 서계를 퇴각하기로 하였으며, 1875년 7월에는 외무성 관리 삼산무 일행에 대한 연향시 양복 착용문제에 부딪혀 교섭은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었다.691)金義煥,≪朝鮮近代 對日關係史硏究≫(景仁文化社, 1974), 355∼374쪽.

 그 결과 조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삼산무는 武威를 배경으로 한 정한을 결심하였으며, 이를 외무성에 보고하였다. 일본은 대조선 무력 개항정책에 따라, 서계 접수 교섭이 교착을 거듭하면서도 추진중이던 1875년 5월과 6월에도 함대를 부산에 보내 측량과 시위행동을 했었다. 1875년 9월 외무경은 마침내 삼산무의 의견을 받아들여 그에게 교섭을 포기하고 귀국하라고 명함과 동시에, 군함 雲揚號(운요오호)를 조선의 서해안으로 이동시키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 결과 같은 달 20일에는 강화도에서 무력 도발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 후 명치정부는 조선에 사절을 보내 개항을 강요하기로 결정하였다. 조선은 일본과 무력 분쟁시 조선이 단독으로 무력 대결할 수 없고, 청의 지원이 어려우리라고 판단하여 일본의 강압적인 개항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고종 13년 2월에는 접견대관 申櫶과 尹滋承이 일본측의 무력 위협하에 일본측의 서계를 접수함과 동시에 黑田淸隆(쿠로다 키요타카)·井上馨(이노우에 카오루)과의 사이에 朝日修好條規가 맺어졌다.

 조일수호조규는 일본이 주장하는 萬國公法의 논리를 바탕으로 이루어졌는데, 제1조에 조선을 독립국으로 인정하여 양국관계가 독립국끼리의 약속에 의해 규정된 조약임을 강조하였다. 일본은 조약 체결 이전에 森有禮(모리 아리노리)를 청에 파견하여, 청이 조선의 내정·외교에 대한 간섭을 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아냄으로써 이 약조에 청이 개입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조약에 조선이 독립국임을 명시한 것은 전근대 중국 중심의 책봉체제라는 동아시아 국제관계 속에서 청의 간섭을 배척하기 위한 논리로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뿐만 아니라 일본은 이 조약 체결시 명치정부의 법률 고문인 브아스나드(Boissonade, Gustave Emile)로부터 강화도 무력도발사건의 배상에 대신하여 수호조약을 체결하고 무역을 확장하도록 하라는 자문을 받았는데, 이를 그대로 시행하였다. 따라서 13개의 구체적인 항목에서는 영사재판권·무관세·최혜국 대우·개항장의 확대 등이 체결됨으로써 조선에 대해서는 아주 불평등한 내용으로 되어 있었다. 그 결과 이 약조로 인해 조선과 일본 간에는 정치·경제적으로 침탈·피침탈이 구조화하게 되며, 왜관 침탈 이후에도 미미하게나마 유지되고 있었던 교린의 구태가 완전히 없어지게 됨으로써 전근대 통교체제는 완전히 붕괴되고 말았다.

 1879년 일본의 琉球(류우큐우, 현재의 沖縄縣) 침략 이후 조선에 대한 무력 침탈정책이 추진됨에 따라, 표류민의 송환이라든가 왜관 처리문제 등도 과거와 같은 국가 간의 신뢰·撫育의 차원에서는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게 되었다. 표류민의 송환도 국가의 보호가 아닌 개인의 경제적 능력이 송환의 주요 변수로 등장하게 되며, 왜관문제도 租借의 차원에서 새롭게 대응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즉 조선과 명치일본과의 관계는 조일수호조규를 계기로 전근대 교린관계와는 전혀 다른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李 薰>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