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3. 서양과의 관계
  • 4) 이양선의 출현

4) 이양선의 출현

 조선 후기 17세기 이후 조선의 연해에는 荒唐船의 출몰이 잦아져서 조선 정부 당국에서는 이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었다. 한편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영국·프랑스·러시아 미국 등 구미 제국의 선박들이 조선 연해에 출현했다. 서양 선박들의 출현은 황당선의 출몰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서양의 군함이나 무장상선 또는 포경선 등이 조선 연해에 출몰하게 되자 조선의 관리들은 이를 이양선이라 부르며 그들과의 접촉을 경계했다. 19세기를 전후하여 전개된 이양선과 조선인의 조우는 조선과 서양의 관계를 종전과는 다른 새로운 양상으로 전환시켜 나가고 있었다. 이양선을 통해서 파악되는 서양인들은 더 이상 초라한 표착자나 무력한 선교사가 아니었다. 그들이 타고 왔던 이양선들은 당당한 무장을 갖춘 거대한 함선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1866년 丙寅洋擾와 제너럴 셔먼호 사건, 1871년 辛未洋擾 등을 통해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조선에 대해서 무력 도발이나 침략을 감행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조선에서는 서양의 침입에 대한 경계심과 이에 대처해 나가려는 海防論이 강화되어 갔다.

 17세기 조선 사회에서는 청의 漁採船인 황당선에 관한 문제로 인해서 海防論이 제기되기도 했다.744)≪肅宗實錄≫권 14, 숙종 9년 6월 병진 및 권 49, 숙종 36년 9월 기미. 황당선들은 漁採뿐만 아니라 조청 간의 밀무역에도 간여하거나 때로는 조선인들에 대해 劫掠을 감행하기도 했다.745)≪肅宗實錄≫권 35, 숙종 27년 3월 병진 및 권 55, 숙종 40년 3월 무진.
≪景宗實錄≫권 4, 경종 원년 6월 을미 .
조선 정부에서는 황당선의 출몰을 청의 禮部에 항의하고 이의 사전 단속을 요구하기도 했다.746)≪肅宗實錄≫권 59, 숙종 43년 5월 계해. 또한 황당선을 나포하여 배를 불태우고 선원들을 북경으로 압송하기도 했다. 그러나 황당선들은 여름에서 가을로 계절이 바뀔 때면 20∼30여 척으로 선단을 이루어 황해 연안 지역에 출몰했다. 조선 정부는 황해 연안에 출몰하는 황당선이 수백 척 이상일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747)≪英祖實錄≫권 38, 영조 10년 5월 신사.

 18세기에 들어와서도 정부에서는 황당선을 방지하기 위해서 연해의 요해처에 追捕武士를 설치했고, 황당선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해 海防의 강화를 논했다.748)≪英祖實錄≫권 38, 영조 10년 5월 신사 및 권 69, 영조 25년 3월 무진.
≪正祖實錄≫권 11, 정조 5년 4월 무신.
조선 정부가 황당선의 출몰을 금지하려 했던 것은 이들로 말미암아 조선의 해안 방어력이 노출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 황당선의 문제는 해로를 통한 침략의 가능성에 대한 경계심을 강화시켜 주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이양선에 관한 문제가 발생했다. 이양선의 출현으로 인해서 조선의 조야에서는 종전보다 더욱 강한 해방의 필요성을 주장하게 되었다. 그리고 서양세력의 도전에 대한 의구심을 구체적으로 갖게 되었다.

 이양선의 출현에 관한 기사는 17세기부터 나타나고 있다. 즉 李睟光의≪芝峯類說≫을 보면 ‘永吉利’ 선박이 興陽 앞바다에 도착했다는 기록을 남긴 바 있다. 그의 이 기록은 1614년 영국의 동인도회사의 캡틴 사리스(Captin Saris)가 에드먼드 사리스(Edmond Saris)를 일본 대마도로부터 조선 연안으로 출동시켜 직물시장 개척의 가능성을 조사시켰다는 기록과 일치되는 것으로 판단되며, 이는 조선이 이양선의 실체를 처음으로 접한 사건이라 할 수 있다.749)李睟光,≪芝峯類說≫권 2, 諸國部 外國.
H.N. Allen 著, 櫻井義之 譯,≪外人去來朝鮮年表≫5, 188쪽.
潘允洪,<朝鮮後期의 對歐羅巴認識>(≪國史硏究≫3, 朝鮮大, 1982), 83쪽.

 이후 이양선의 출현에 관한 기사는 18세기 말엽부터 자주 확인하게 된다. 즉 1787년 5월 프랑스의 라 뻬루즈(La Pérouse)는 동해를 여행했다. 그 과정에서 라 뻬루즈의 船團에 속해 있던 부쏠號(la Boussole)에는 육군사관학교 교수 다즐레(Dagelet)가 승선해 있었다. 그는 울릉도를 ‘발견’했고 라 뻬루즈는 이를 ‘다즐레島’라고 명명했다.750)Milet-Mureau, Voyage de la Pérouse autour du monde, 4 Vols., Paris, 1798.
崔奭祐, 앞의 글(1986), 23쪽.
이들은 조선 연해에 들어왔던 무장선이었음에 틀림없지만 조선인들과의 직접적인 충돌이나 교섭이 없이 지나쳐 갔다. 그러나 정조 19년(1795) 황해도 吾叉鎭에는 ‘국적을 알 수 없는’ 이양선 한 척이 상륙하여 그 곳의 鎭卒들과 충돌한 기록이 있다.751)≪正祖實錄≫권 43, 정조 19년 8월 기묘. 그리고 정조 23년 영국의 해군 중령 부로튼(Broughton)이 지휘하는 프로비던스號(The Providence)가 함경도 元山 근해에 나타나 해안을 측량하고, 元山灣을 艦長의 이름에 따라 부로튼灣(Broughton Bay)으로 명명하고 돌아간 바 있었다.752)洪以燮, 앞의 글(1994), 646쪽.
韓國史硏究協議會,≪韓英修交100年史≫(1984), 2쪽.

 조선 연안에는 19세기에 들어와서 이양선이 더욱 자주 나타나게 되었다. 이 때에 이르러 조선인들은 더 이상 황당선의 출현사실에 관심을 기울이지 아니하고 이양선의 출몰에 대비하여 해방론을 강화시켜 나갔다. 19세기에 출현한 이양선으로는 순조 원년(1801) 제주도에 표착했던 국적 미상의 선박을 먼저 들 수 있을 것이다.753)洪以燮,<朝鮮後期海洋史>(≪洪以燮全集≫ I, 延世大 出版部, 1994), 459쪽. 그리고 이 때에 이르러 러시아인을 비롯한 서양인들의 동해안 출현이 가속화되고 있었다. 러시아인들이 동해에 출현하여 활동한 사실은 순조 3년의 기록을 주목할 수 있다. 이 때 러시아는 대일통상사절로 레짜노프(Lezanov)를 파견한 바 있었다. 그가 러시아 정부로부터 받은 훈령 가운데에는 조일관계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라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레짜노프는 조약의 체결에는 실패했지만 동해의 일본 연안을 거쳐 사할린과 캄챠카를 거쳐 귀환했다.754)朴泰根, 앞의 글(1984), 33쪽. 그 일행은 조선 연안을 직접 항해했거나 조선에 상륙했던 일은 없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19세기에 접어들어 러시아 선박이 동해안에 빈번히 출현하게 될 것임을 암시하는 일이기도 했다.

 18세기 말엽 부로튼의 항해에 뒤를 이어서 19세기에 접어든 이후에도 영국 군함들은 한반도를 향해 계속 접근해 오고 있었다. 이 때 조선 연해를 탐사했던 영국 군함으로는 베실 홀(Basil Hall) 함장이 이끄는 알세스트號(the Alcest)와 리라號(the Lyra)를 들 수 있다. 이 배는 순조 16년 충청도 馬梁鎭에 도착한 바 있었다.755)≪純祖實錄≫권 19, 순조 16년 7월 병인. 그리고 순조 32년에는 영국 선박 로오드 애머스트號(The Lord Amherst)가 충청도 洪州 古代島에 나타나 그 근해에 거의 한 달을 체류하면서 조선측 관헌 및 지방민과 접촉하고 수교와 통상을 요구했다. 그러나 그들은 성과없이 돌아갔다.756)韓國史硏究協議會,≪韓英修交100年史≫(1984), 2쪽. 이 배에는 독일인 개신교 목사 칼 구츨라프(Karl Friedrich August Gutzlaff)가 승선하여 일부 조선인과 만나기도 했다.757)Charles Gutzlaff, Journal of Three Voyage along the Coast of China in 1831, 1832 & 1833, with Notice, Corea and Loo­Choo Island, London, 1834. 헌종 6년(1840) 12월에도 영국 선박이 제주 가파도에 상륙하여 가축들을 약탈해 갔다. 그리고 헌종 11년에는 영국 군함 사마랑號(The Samarang)가 남해안 일대를 탐사하던 중 巨文島에 들려서 해밀턴港(Port Hamilton)으로 명명하고 돌아간 바도 있었다.758)韓國史硏究協議會,≪韓英修交100年史≫(1984), 2쪽.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19세기 전반기 영국 함선들은 4회에 걸쳐서 조선 연해에 출몰하고 있었다.

 한편, 영국의 해양 진출에 자극을 받은 프랑스의 경우에도 19세기에는 동아시아 진출을 강화하면서 조선 연해에 출현했다. 즉 프랑스 정부는 1842년 아편전쟁이 끝난 직후 해군 중령 세실(Cécille)이 지휘하는 에리곤號(l'Erigone) 및 해군 중령 빠즈(Page)가 지휘하는 파보리뜨號(la Favorite)를 황해에 파견하였다. 이 때 세실은 프랑스의 상업과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서 조선에 대한 ‘원정’을 계획했다. 그러나 그의 ‘조선원정’ 계획은 아편전쟁을 마무리짓는 南京條約 이후 동아시아 정세가 급변해 가고 있던 상황에서 보류되었다.759)Louise Wei Tsing-Sing, La Politique Missionaire de la France en Chine 1842∼1856, Paris, 1960.
崔奭祐, 앞의 글(1986), 5쪽.
그러나 이 계획은 1846년 5월 駐中國 印度 프랑스 함대 사령관 해군소장 세실에 의해서 다시 시행되었다. 그는 이 항해의 목적을 해군성 장관에게 보고한 바 있었다. 여기에서 그는 조선에 대해서 1839년 프랑스 선교사를 살해한 데 대한 해명을 요구하고 동시에 프랑스가 1844년에 중국과 맺은 바 있던 黃埔條約 수준의 조약을 체결하여 천주교도들의 처우를 개선해 보겠다고 말했다.

 세실은 1846년 5월 20일 클레오빠트르號(la Cléopâtre)를 이끌고 마카오를 출항했다. 그는 도중에 빅또리외즈號(la Victorieuse)와 사빈느號(la Sabine)를 합류시켜 8월 6일 충청도 홍주 外烟島에 나타났다. 세실은 원래 조선 대신과의 면담을 계획했으나 이를 포기하고 프랑스 선교사 3인을 1839년에 학살한 데 대한 해명을 요구하는 서신을 남기고 회항했다. 그리고 프랑스 해군은 이 때 보낸 서신의 회답을 받겠다는 명목으로 중국·인도 해군기지 分艦隊長 라삐에르(Lapierre) 대령의 지휘를 받는 글루와르號(la Gloire)를 조선에 파견했다. 그들은 헌종 13년(1847) 7월 28일 마카오를 출항하여 8월 10일 萬頃 지방 薪峙島 後洋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들은 여기에서 암초에 좌초되어 8월 12일 인근 古群山島에 상륙하였다. 난파된 군인 560명은 上海에 있는 영국 군함의 구조를 받아 母港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난파선에서 건져낸 물건들을 고군산도에 잔류시켜 놓았다.760)<한불관계자료 1846∼1856>(≪敎會史硏究≫ 1), 164∼176 쪽. 그들은 이 잔류물을 看審한다는 명목으로 철종 3년(1852)에 나타나기도 했다.761)≪日省錄≫철종 3년 7월 23일·24일. 이에 앞서 철종 2년 제주도 慕瑟浦에는 프랑스 포경선이 나타나 양식을 요청한 바 있었다.762)崔奭祐, 앞의 글(1986), 23쪽.

 조선 연해에 이양선의 출몰이 가장 잦았던 때는 헌종 14년 여름과 가을경이었다. 이 때 “이양선이 경상·전라·황해·함경·강원 다섯 도의 대양 가운데 출몰하는데, 널리 퍼져서 추적할 수 없었다. 간혹 뭍에 내려서 물을 긷기도 하고 고래를 잡아 양식으로 삼기도 하는데, 거의 그 수를 셀 수 없이 많았다”라는763)≪憲宗實錄≫권 15, 헌종 14년 12월 29일. 기록을 남길 정도로 이양선의 숫자가 급증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 때는 동해안에 출몰하는 이양선에 대한 보고도 많이 등장하고 있다. 즉 헌종 14년 5월에는 함경도 단천과 북청 앞바다에 이양선이 출현했고, 8월에는 영흥과 성진에도 이양선이 나타났다. 헌종 19년에도 이양선 관계 기사는 꾸준히 출현하고 있다. 이 해 4월에는 함경도 이원과 북청 앞바다에 이양선 3척이 나타난 바 있었다. 그리고 이 해에 프랑스의 포경선 리앙꾸르號(la Liancour)는 동해안을 항해하던 중 독도를 확인하고 이를 리앙꾸르 암초로 명명했다.764)Annales Hydrographiques, t. xv. 1858, p.180.
崔奭祐, 앞의 글(1986), 23쪽.
이제 동해는 유럽의 탐사선이나 포경선 및 함선들이 빈번히 출입하는 지역이 되어 가고 있었다.

 이양선의 동해 출현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현상은 러시아의 진출이었다. 이미 제정 러시아 당국에서는 1852년에 태평양의 러시아 진지를 강화하고 중국 및 일본의 개항을 추진하기 위해서 ‘극동정책 기본문제 심의위원회’를 만들었다. 이 위원회에서는 뿌쨔찐(Putiatin) 제독을 극동으로 파견하여 일본의 개항을 추진했다. 그는 통상교섭을 위해 나가사키를 수차 방문한 바 있었다. 이 때 그는 조선 해안 각처를 항해했다. 그는 1854년 대일교섭의 속개를 위해서 세번째로 나가사키로 가기 위해서 마닐라(Manila)에서 북상하던 과정에서 함대의 집결지로 巨文島를 지정했다. 러시아 함대는 1854년 4월 거문도에 입항했다. 그리고 4월 20일부터 5월 11일까지 22일간에 걸쳐서 동해안 전역을 실측했다. 그는 이 작업을 통해서 영국 해군성 지도를 대폭 수정했다. 그리고 이들은 松田灣을 라자레프港(Port Lazareff), 迎日灣을 운꼬프스끼灣(Unkovski Bay)이라고 명명했다.765)李用熙,<英國의 巨文島占據>(≪韓英修交100年史≫, 韓國史硏究協議會, 1984), 72쪽. 1884년 英國은 이곳을 給炭地로 상정한 바가 있었다. 그리고 鬱陵島와 獨島를 재실측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이 항해 과정에서 永興府와 德源府에서 조선인과 충돌해서 조선 주민 2인을 죽이고 3인을 부상시킨 사건이 일어났다.766)朴泰根, 앞의 글(1984), 37∼40쪽.

 1850년대 러시아가 동해에 관해서 큰 관심을 가지고 있을 때, 그 밖의 구미 열강들도 조선의 연해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켜 나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철종 4년(1853) 정월 부산 龍塘浦 앞바다에 旀里界, 즉 미국의 포경선이 기착했다. 그리고 두 해 뒤인 철종 6년 6월에는 강원도 通川에 미국 포경선 선원이 표착한 바 있고,767)金源模, 앞의 글(1982), 20∼21쪽. 같은 달 국적 불명의 배가 안변에 나타나 農牛 13두를 약탈한 바 있었다. 철종 6년에는 영국의 중국함대에 소속된 풔사이스(Charles Codrington Forsyth)가 지휘하는 군함 호네트號(the Honett)는 동해를 항해하다가 독도를 다시 실측하여 영국 해군성 지도에는 독도가 호네트島로 기록되기에 이르렀다.768)洪以燮, 앞의 글(1994), 465쪽.

 영국이나 미국 못지않게 프랑스도 조선 연해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황해에는 철종 7년에 프랑스 함선이 나타났다. 이 때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기지사령관 게렝(Guérin) 소장은 본국으로부터 조선을 식민지화하기 위한 기회와 조건 등에 관한 정보의 제출을 요구받고 이를 위해서 조선 연해를 항해했다. 그는 비르지니號(la Virginie)를 이끌고 철종 7년 7월 16일 조선 연해에 이르러 약 2개월에 걸쳐서 조선 연해 일대를 두루 탐사하고 이를 동년 9월 30일자로 해군성 장관에게 보고한 바 있었다. 그는 이 보고문에서 “현재 조선은 허약하고, 종주국인 청도 조선을 보호할 수 없는 상태이므로 유럽의 열강들이 마음만 먹는다면 쉽게 점령될 것이다. 러시아는 이런 헛점의 기회를 이용하여 조선을 점령하려 하고 있다. 그래서 러시아 선박들이 근래에 조선 해안을 탐사하며 그 준비를 하고 있다. 러시아의 점령을 막는 길은 프랑스가 선수를 치는 데 있다”라고 기술했다.769)<한불관계자료 1846∼1856>(≪敎會史硏究≫ 1), 189∼196쪽. 이와 같은 사고방식의 연장선상에서 고종 3년(1866)에 프랑스는 丙寅洋擾를 도발하게 되었다.

 병인양요에 앞서서 1860년을 전후하여서도 여전히 이양선의 출몰관계 기사가 보고되고 있었다. 즉 철종 10년(1859) 5월에는 영국 상선이 부산 동래부 용당포에 입항하여 교역을 요구했고, 그 해 11월에도 영국 상선 2척이 동래부 신초량에 입항하여 교역을 시도했으나 모두 거절당했다. 철종 11년 윤3월에도 영국 상선이 동래부 용당포에 기착했고, 그 해 4월에도 영국 상선이 전라도 영암군 추자도에 나타났다. 그리고 고종 2년 8월 17일 미국인 3명이 경상도 延日縣에 표착했다.770)金源模, 앞의 책, 97쪽. 고종 2년 9월에는 러시아인 수십 명이 두만강을 건너와서 통상을 요구하는 사건이 발생했다.771)≪日省錄≫고종 2년 11월 10일.

 조선에서는 고종 3년에 대원군에 의한 천주교 탄압사건인 병인박해가 일어나고 이를 빌미로 하여 프랑스가 조선을 침공한 병인양요가 발생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서양 이양선은 조선 연해에 계속해서 나타나고 있었다. 즉 고종 3년 정월에는 영흥만 인근인 원산에 러시아 함선이 다시 나타나 통상교역을 요청한 바 있다고 전해진다.772)李用熙,<英國의 巨文島占據>(≪韓英修交100年史≫, 韓國史硏究協議會, 1984), 72쪽. 그리고 같은 해 2월에는 미국 상선 士佛號가 일본 나가사키에서 상해로 항해하던 중 식량을 구하기 위해서 선원 8인을 태우고 부산 境沙嶝 앞바다에 이르렀다. 미국 상선 서프라이즈號(The Surprise)가 중국 芝罘를 출발하여 琉球로 항해하다가 난파되어 평안도 鐵山에 표착한 때도 이 해 5월이었다.773)金源模, 앞의 책, 105쪽.

 이와 같은 때에 미국상선 제너럴 셔먼호(The General Sherman)가 영국 商社 메도우즈와 용선 계약을 맺고 조선과의 통상을 위해 고종 3년 8월 평양 대동강으로 항해해 왔다. 이 배는 80톤급 선박으로서 12파운드 대포 2門을 배치했으며, 선원 24명이 모두 완전 무장을 하고 있었다. 이 배는 조선 지방관들의 거부와 경고를 무시하고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평양 관민의 공격을 받고 燒破되었고 이 배에 동승했던 스코틀랜드 출신 개신교 목사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 崔蘭軒, ?∼1866)가 살해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그리고 이 배의 행방을 찾기 위해서 고종 4년 정월에는 슈펠트가 이끄는 와츄셋號(The Wachusett)가 조선에 파견되었다.774)金源模, 위의 책, 145∼163쪽.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통해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이양선의 출현은 무력 충돌로 이어졌다. 이양선의 침입과 관련하여 조선왕조가 겪은 최대의 시련은 고종 3년 병인양요와 고종 8년 辛未洋擾였다. 이 양요 이후에도 조선왕조는 쇄국의 길을 더욱 강화하고자 했으나 점증하는 외압과 내적인 각성으로 인해 문호개방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그러나 개항에 이르기까지도 계속해서 이양선의 도전과 이에 대한 경계가 강조되고 있었다.

 독일상인이었던 오페르트(Ernest Jacob Oppert)는 고종 3년 영국 상선 로나號(The Rona)에 승선하여 조선과의 통상을 시도하다가 실패한 뒤 그 해에 다시 엠페러號(The Emperor)호로 재입국하였으며, 고종 5년에는 차이나號(The China)로 三차 입국하여 충청도 德山의 南延君墓 도굴 사건을 일으켰다.775)Oppert, Ein Verschlossenes Land Reisen nach Korea, Leipzig, 1880(韓㳓劤 譯,≪한국기행≫, 한국번역도서주식회사, 1959), 166쪽 이하 참조. DB주 - 본문에 기입된 오페르트의 first name 'Ernest'는 영어식 표기로서 독일어식 원표기는 'Ernst'이다. 그의 이러한 만행은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일층 강화시키는 역작용을 했다. 한편 고종 7년 5월 3일 駐日獨逸代理公使 브란트(Max August Scipio von Brandt)가 독일 군함 헤르타號(The Hertha)를 타고 부산에 입항하여 대한 통상교섭을 시도했으나 거절 당하자, 砲를 쏘고 일본으로 돌아갔다.776)李泰永,<韓·獨 수호통상조약의 성립>(≪韓獨修交100年史≫, 韓國史硏究協議會, 1984), 32쪽.

 요컨대 17세기 이후 청의 漁採船이었던 황당선의 출현으로 인해서 조정에서는 이에 대한 대비책을 논의하기도 했다. 조정에서는 황당선에 관한 문제와 관련하여 조선 연해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가고 있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18세기 말엽부터 19세기 후반 개항 이전에 이르기까지 조선에서는 유럽이나 미국의 무장상선이거나 포경선 또는 군함 등을 지칭하는 이양선이 본격적으로 출몰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이양선이 출몰한 횟수는 각종 기록을 통해서 대략 35회 정도가 확인된다. 그러나 이러한 회수보다는 헌종 14년(1848) 이래 조선 연해에 출현했던 이양선은 ‘그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라는 표현이 오히려 더 정확할 것이다. 이 이양선의 출현으로 인해서 조선 조정에서는 해안 방어의 중요성을 감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에 관한 구체적 정책들이 시행되기 전에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겪게 되었다. 양요 이후 개항에 이르기까지도 이양선의 출현은 지속되고 있었다.

 한편 일본의 사례를 검토해 보면 서양 이양선의 출현으로 인해서 대단한 위기의식이 그 사회를 강타했던 듯하다. 그러나 조선의 경우에는 이양선의 출현에 따라서 이에 대한 대책이 논의되지 않은 바는 아니지만, 그에 대한 대비책 등을 검토할 때 조선이 받은 ‘서구의 충격’은 상대적인 의미에서 약했다고 생각된다. 물론 조선의 경우에 있어서도 이양선의 무력시위를 목격했고 그 이양선의 출현이 洋擾로 연결되었다. 그러나 조선은 양요를 겪은 이후 이양선의 침략을 물리쳤다는 자족감이 위기의식을 능가했다. 그리고 이양선을 통해서 형성된 구미제국에 대한 인식은 결코 긍정적인 것이 될 수가 없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서 개항기에 이르러서야 뒤늦게 구미 선진문물을 수용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어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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