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3. 서양과의 관계
  • 6) 지도 제작과 조선 인식의 확대

6) 지도 제작과 조선 인식의 확대

 서양인의 조선 인식 가운데 중요한 부분으로는 지도를 통한 조선에 대한 인식을 들 수 있다. 한 장의 지도는 당대 지리적 지식의 결론이었고, 특정 지역에 대한 관념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大航海 시대 이래로 서양에서 제작된 지도를 검토함으로써 우리는 서양인의 조선에 대한 인식의 진전상황을 명확히 알 수 있을 것이다.804)여기에서 검토하고 있는 지도들은 주로 Lutz Walter, Japan-A Cartographic Vision, Munich : New York, Prestel, 1994 및 서정철,≪서양 고지도와 한국≫(대원사, 1991)에 수록되어 있는 자료들이다. 또한 서양인들이 불렀던 고유명사로서 ‘조선’에 해당하는 지명에 대한 검토를 통해 그 지리적 위치 내지는 지형에 대한 인식의 전개과정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서양인들은 16세기 이후 조선의 지명을 Kauli, Cauli, Cory, Corai, Coray, Corey, Coreia, Corea, Corée, Korea 등으로 일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조선’이란 국명의 한자음에 따라서 이를 Tioxen, Tiosencouk, Chaosen, Khaosen 등으로 표기한 경우도 나타나고 있다. 여기에서 조선을 가리키는 고유명사의 어원은 ‘高麗’에 있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즉 Kauli, Cauli 등은 ‘高麗’의 한자음을 서양어로 옮긴 것으로서, 14세기 아라비아 지리학자들도 高麗를 ‘Kauli로 표기한 바 있었다.805)金定慰, 앞의 글, 41쪽. 이 단어에 근거하여 아라비아에서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주로 Cory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806)서정철, 앞의 책, 40쪽. 한편 Corai, Coray, Corey 등의 표기는 ‘高麗’의 일본음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중세 이래로 서양의 지리 지식은 아라비아 지리학의 영향을 많이 받았음을 감안해 보면, 서양인들은 아라비아 지리학자들이 지칭하던 Cory라는 용어를 라틴語 식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Corea로 표기하게 되었고, 여기에서 다시 Coreia, Corée, Korea 등이 파생되어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1589년 뻬드로 마훼이오(Pedro Maffeio)는 ≪印度史≫에서 인도 일대의 지리를 논하는 과정에서 조선(Cori)이라는 지명을 언급하고 있었다.807)Pedro Maffeio, Histiriaum Indicarum, Venetia, 1589, p.20. 그러나 조선이 Corea라는 지명으로 나타난 것는 1590년 제작된 랑그렌(Langren)의<동양지도>를 들 수 있다. 이 지도에는 조선의 국명이 ‘Corea’, ‘Tiauxen’, ‘Cory’라는 세 가지로 동시에 표기되어 있다.808)서정철, 앞의 책, 39쪽. 그리고 1594년에 제작된 플란치오(Plancio)의 지도에서도 ‘Corea’라는 표기가 나타나고 있다.809)홍시환,≪지도의 역사≫(전파과학사, 1977). 그러나 그 이전에 작성된 지도에서는 아라비아 지리학의 전통에 따라서 조선을 Cory로 표기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1601년 헤레라(Herrera)는<서인도지도>(Description de las Yndias Ocidentalis)를 간행했다. 이 지도는 1575년에 제작된 手寫本 지도를 바탕으로 하여 작성된 것이라 하며, 여기에서는 조선을 ‘Cory’로 표기하고 있었다. 이로써 16세기 후반기 유럽에서는 조선을 ‘Cory’로 불렀음도 확인하게 된다. 한편 16세기 이래로 중국 및 일본에 진출한 서양인들은 조선을 가리키는 고유명사로 ‘高麗’의 중국음이나 일본음에 근거하여 ‘Caoli’나 ‘Corai’ 類로 표기함으로써 이를 조선을 지칭하는 고유명사로 삼았다. 그러다가 15세기 당시 지리학계의 관행이었던 라틴語式 지명표기 방식이 적용되는 과정에서 서양인들이 조선을 지칭하는 Corea라는 단어가 확정되어 갔다.

 그런데 16세기 중엽까지만 하더라도 서양에서 간행된 세계지도 내지는 아시아지도에서 조선이 수록되어 있지 않은 경우가 자주 확인된다. 예를 들면 1550년에 제작된 메르카토르의<아시아지도>에는 조선이 아예 빠져 있었다. 이 지도에는 중국과 일본 사이에 조선이 기재되어 있지 않고 바로 중국해(Mare Sin)가 자리잡고 있는 것으로 표기되어 있을 뿐이다. 그러나 동아시아에 대한 관심이 점차 강화되는 과정에서 중국과 일본 사이에 ‘조선’이 있다는 사실을 서양인들은 점차 인식해 갔다. 여기에서 그들의 지도에는 조선이 도서나 해안 혹은 반도의 형태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조선이 지도에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대략 16세기부터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당시에는 조선을 섬으로 표기하기도 했다. 16세기 서양에서 조선을 섬으로 파악하고 있던 것은 아마도 아라비아 지리학의 영향일 것으로 생각된다. 14세기 아라비아의 대표적 지리학자들은 高麗(Kauli)를 중국 건너편에 있는 섬으로 기술한 바가 있기 때문이다.810)金定慰, 앞의 글, 41쪽. 이와 같은 지리적 관념에 입각하여 저술된 지도로는 우선 랑그렌(Langren)이 1595년에 제작한<동인도지도>에서는 둥근 섬 모양의 지형에 ‘조선도’(Isla de Corea)라는 명칭과 함께 ‘도둑섬’(Isla dos Ladrones)이라는 별칭을 함께 제시해 주었다. 그러나 랑그렌은 1590년에<동양지도>를 제작하면서 조선을 좁은 반도의 형태로 나타낸 바도 있으니, 이는 그에게 있어서 조선에 관한 지리적 지식이 아직 확정되어 있지 못했음을 나타내는 일이다.

 또한 1595년 테세라가 아랍 상인들의 지도를 참고하여 간행한<日本島圖>(Iaponiae Insulae Descriptio)에는 조선이 기다란 섬 형태의 朝鮮島(CoreaInsula)로 표기되어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조선을 섬으로 파악했던 16세기 말 유럽인들의 오해가 아라비아 지리학의 오류에서 기인한 것임을 확인하게 된다. 조선을 섬으로 인식했던 것은 17세기의 지도에서도 일부 나타나고 있으며, 심한 경우에는 17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도 조선을 섬으로 파악한 지도가 있다. 즉 1601년 헤레라는<서인도지도>를 간행했다. 이 지도는 1575년 손으로 그려진 지도를 바탕으로 하여 작성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서는 조선을 ‘Cory’로 표기하면서 대륙과는 약간 떨어진 위치에 비정하고 있다. 또한 1650년에 제작된 고드빌의<아시아지도>(Carte de l'Asie)에는 중국과 일본 사이에 타원형에 가까운 형태의 섬이 놓여 있다. 이 섬을 당시인들 가운데 일부는 조선으로 상정했을 것이다. 그리고 1667년 에손(Eson)이 작성한<일본지도>(Iaponiae Terrae)에도 조선은 대륙에 근접해 있는 섬으로 그려져 있으며, ‘조선도’(Corai Insula)라는 명칭이 표기되어 있다.811)서정철, 앞의 책, 71쪽. 이렇듯 17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서양의 지도 제작자들에게 조선에 대한 충분한 정보가 전해지지 못했고 이 과정에서 그들은 조선을 섬으로 파악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한편 16세기 중엽에 작성된 서양의 지도에서는 조선을 해안의 일부로 파악한 듯한 지도들도 나타나고 있다. 이는 국가 단위로서의 ‘조선’에 대한 지식이 명확하지는 않았지만, 조선의 지리적 특성이 섬이 아니라 대륙의 일부라는 인식으로 바뀌어 가는 과도적 단계에서 출현한 것이다. 포르투갈의 해도에도 ‘조선’에 관한 지식이 명확히 나타나지는 않고 있다. 그러나 1568년에 제작되어 현재 마드리드의 알바(Alba)家에 소장되어 있는 해도에서 조선은 일본(Japan)의 서북쪽 대륙에 콘라이 해안(costade Conrai)이라는 지명으로 표기되어 있다.812)Conray 혹은 Conrai와 같은 지명 표기는 ‘高麗’를 지칭하는 아랍어인 Cory에서 유래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이 Cory가 서양 항해자들에게 전달되는 과정에서 Couray와 같이 표기되다가 Couray에서의 u가 n 혹은 m 등으로 잘못 轉寫된 결과 Conray나 Comray로 잘못 기록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서정철, 앞의 책, 70쪽). 그리고 1571년과 1573년의 해도에서는 ‘꼼라이’(Comrai) 해안이라는 표기가 다시 나타나고 있다.813)서정철, 위의 책, 39쪽. 또한 일부의 지도에서는 조선을 섬으로 보던 개념과 해안으로 보던 개념을 서로 결합시켜 놓기도 했다. 이러한 예를 랑그렌이 1595년에 제작한<동인도지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이 지도에서 조선을 섬으로 표시해 놓고, 이 섬의 북쪽 해안에 ‘꼼라이 해안’(costa de Comray)이라는 지명을 기록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해안 북쪽의 바다에 꼬레아(Corea)라는 작은 섬을 다시 그려 넣었다. 이는 조선에 대한 지리지식이 그만큼 약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16세기 말에 이르러 조선을 대륙과 연결된 반도로 인식하고 있는 지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는 아라비아 지리학의 전통이 아니라, 지리상의 발견 이후 새롭게 인식된 지리 지식에 근거한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을 반도로 표시한 예는 이미 1590년에 제작된 랑그렌의<동양지도>를 통해서도 확인되고 있는 바이다.814)위와 같음. 그러나 조선이 반도임을 확실히 해 주고, 조선에 대한 구체적 지리 인식을 심어준 작업은 1602년에 마테오 리치가 제작한<坤輿萬國全圖>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이 지도는 지명이 한자로 기재되어 있기는 하나, 중국뿐만 아니라 서양인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쳐 준 지도였다. 이 지도에서는 반도 형상의 지형을 가진 ‘朝鮮’이라는 국명과 함께 함경도·평안도·황해도 등과 같은 지명도 기록되어 있어서, 당시까지 서양인이 제작한 지도 가운데 가장 정확한 지식을 담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1615년 예수회 선교사 삐에르 뒤 쟈릭(Pierre du Jarric)은 중국과 일본 사이에 있는 반도로서 조선(Coraiana)의 존재를 확인해 주고 있다.815)Du Jarric, Thesaurus Rerum Indicarum, Colonae ; Petri Henning, 1615, p.585.

 17세기 후반기에 이르러 조선은 계속해서 중국지도 내지는 아시아지도의 일부로 표기되어 나타나고 있다. 즉 1655년에는 마르띠니(Martini)가 간행한<中國新圖>(Imperii Sinarum Nova Descriptio)에 조선이 길다란 형태의 반도로 기록되어 있고, 이러한 형태의 조선 地勢는 후대의 서양 지도 제작자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1670년에 간행된≪만주족의 중국침공사≫에는 중국과 주변의 지도가 제시되어 있다. 이 지도에서 조선은 마르티니가 표시한 형태와 유사한 조선(Corea) 지도를 제시해 주고 있었다.816)Palafox, Histoire de la Conqueste de la Chine par Tartares, Paris ; Antoine Bertier, 1670, 圖板. 그리고 1673년 러시아에서 제작된 레메쪼프(Remezov)의<東北아시아 民族誌地圖>에도 반도의 형태로 조선(Korea)이 표기되어 있다. 이는 러시아에서 간행된 지도 가운데 처음으로 조선의 존재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817)朴泰根, 앞의 글(1984), 11쪽.

 17세기 후반의 지도제작자들도 조선이라는 생소한 지역을 설명해 주기 위한 방법으로 종전부터 ‘조선’을 지칭해 오던 여러 가지 명칭을 동시에 기록해 주기도 했다. 예를 들면 1674년에 간행된 쟈이오의<아시아지도>에는 카올리(Caoli)와 조선국(Tiosencouk)과 고려(Coree)라는 지명이 기다란 반도 형태의 지도와 함께 제시되어 있다. 그리고 1669년에 제작된<아시아지도>에서도 조선(Corey)이 좁고 기다란 반도의 형태로 묘사되어 나타나고 있다. 한편, 1680년에 제작된 샤틀랭의<교회사지도>(Carte de Histoire Sacrée)에는 중국과 일본 사이에 기다란 반도 형태의 지형이 나타나 있지만 조선이라는 명칭은 기재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같은 해에 제작된 그의<아시아지도>(Carte de Asie)에는 조선(Corea)이 기다란 반도로 표시되어 그 형태에 있어서는 문제가 있지만, 조선의 위도는 비교적 정확하게 나타나 있다. 이렇게 17세기 후반에 이르러 조선은 대체적으로 좁고 기다란 반도 형태의 지형으로 서양인들이 제작한 지도에 나타나게 되었다.

 18세기에 이르러 지도를 통해서 확인되는 서양인들의 조선에 대한 인식은 전단계에 비하여 월등히 발전되어 갔다. 17세기의 지도제작에 있어서 가장 큰 역할을 했던 국가는 네덜란드였지만, 18세기에 들어와서는 프랑스가 세계지도의 제작에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다. 프랑스인들이 제작한 지도에서 조선에 관한 기록이 비교적 정확히 드러나게 되었다. 18세기에 접어든 직후인 1703년 작성된 드 페르(De Fer)의 지도에서 조선(Corée)은 긴 모양의 반도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이 지도에서는 ‘東海’(Mer Orientale)라는 지명이 처음으로 등장하고 있다. 한편 1720년에 간행된 호만의<아시아 最新地圖>(Asiae Recentissima Delineatio)에는 조선이라는 국명의 표기가 없이 중국과 일본 사이에 있는 반도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1733년도에 간행된 티리온의<아시아 新地圖>(Nieuwe Kaart van Asia)에는 조선(Corea)이라는 지명과 함께 경기(Kin-ki) 및 제주도가 표시되어 있었다. 이렇듯 18세기 초에 이르러서는 조선이 섬이 아니라 반도라는 사실에 서양의 지도제작자들 대부분은 동의하게 되었지만, 조선의 지형이 좁고 가느다란 반도 형태일 것이라 상정하고 있었다.

 조선의 지리적 특성에 관한 이해는 19세기의 30년대 중국에서 선교하던 예수회 계통 선교사들의 노력에 의해서 더욱 명확히 유럽사회에 알려지게 되었다. 선교사들은 중국의 조정에서 仕宦하면서 지도 작성에 종사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강희제는 1707년 예수회 선교사들에게 중국 전 지역에 대한 측량과 지형도의 작성을 명했고, 그들은 1708년부터 1716년까지 측량을 마치고<皇輿全覽圖>의 작성을 완료했다. 여기에 조선의 지도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책은 프랑스로 보내져서 당빌(D'Anville)의<中國新地圖>(Nouvel Atlas de la Chine)가 1737년에 간행될 수 있었다. 당빌의<중국신지도>에는 ‘조선왕국’(Royaume de Corée)이 별도의 全圖로 다루어지고 있다. 이로 인하여 조선에 관한 첫 전도가 유럽에 소개될 수 있었다. 이 지도는 비교적 정확한 것으로서, 유럽에서 후대에 제작된 지도들의 모형이 되었다. 여기에서는 조선의 명칭이 Sila에서 Cory, Caoli, Corée, Corea, Korea 등으로 쓰이는 과정을 차례로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조선의 지형도 점차 실제적인 모습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또한 당빌의 지도에는 조선 주요 지방의 지명들이 중국식 발음을 기준으로 한 알파벳 표기로 제시되어 있다.818)서정철, 앞의 책, 35쪽. 당빌의 이 지도는 1787년 헤이그에서 다시 간행되었다.819)러시아 대장성,≪韓國誌 附錄≫(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84), 237쪽.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조선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어 갔다. 이 관심에 비례하여 그들은 지도 작성에도 힘을 기울였다. 특히 동아시아 지역에 대해서는 프랑스와 영국이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프랑스에는 東아시아 지역에 관한 기록과 보고들이 속출하게 되었다. 영국에서도 1767년에는 조선에 관한 레지스의 기록을 번역한 책자를 간행한 바 있었다. 이 때 이 책에는 당빌의 지도를 기초로 하여 작성한<조선지도>(A Map of Kau-li or Korea)가 수록되었다.820)A New General Collection of Voyage and Travels, Vol, Ⅳ, London ; Thomas Astley, 1767, p.319. 그리고 19세기에 접어든 이후 개항에 이르는 사이에 작성되었거나 간행된 조선지도로는 1832년 프랑스 빠리에서 클라프로트(Klaproth)가 번역하여 간행한 바 있는≪三國通覽圖說≫에 수록된 지도와 도판에 포함된 조선지도가 있다.821)러시아 대장성, 앞의 책, 184쪽. 1845년경에는 金大建이 작성한<조선전도>가 프랑스인들에게 전해졌다.822)한국교회사연구소 편,≪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서한≫(1996), 396쪽. 따라서 1874년 빠리에서 간행된 달레의≪조선천주교회사≫에<조선전도>가 수록되어 있는데, 이 지도는 金大建의 조선지도에 이어서 조선의 지명을 조선식 발음으로 정확히 표기해 주고 있다. 또한 개항 직전인 1875년 일본 동경 육군성에서는<조선전도>(1:960,000)를 제작하여 한국에 대한 군사활동에 대비하고자 했다.

 한편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전반에 이르러서는 조선 연해에 대한 직접적인 항해가 진행되면서 좀더 정교한 조선 지도들과 실측에 입각한 海圖들이 간행되기 시작했다. 조선 연해의 해도 가운데에는 1797년에 라 뻬루즈(La Pérouse)가 작성한<항해도첩>을 대표적인 것으로 들 수 있다. 그는 1787년 5월에 제주도 남단에 접근했고 울릉도를 확인했으며, 제주도 근해와 남해 및 동해의 수심을 처음으로 실측했다. 그가 작성한 해도에 따라서 이 이후 유럽의 항해자들은 조선에 좀더 손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 실측에 입각한 해도의 작성은 19세기 중엽을 전후하여 더욱 활발히 전개되었다. 예를 들면 프랑스 海軍水路局에서는 개항 이전에 모두 19편의 조선에 관한 해도를 작성했다. 그들은 이미 유럽 어느 나라보다도 먼저 ‘1787년 5월에 관찰한 조선의 섬들 또는 군도의 일부분을 나타낸 지도’라는 제목의 해도를 작성한 바 있었다.

 그 후 프랑스인들은 1848년에는 한반도 지도를 작성했고, 1859년에는 동해안 영흥만 일대의 지도와 해도를, 1863년에는 대한해협 지도를 작성했다. 그리고 1866년 병인양요를 전후해서 조선의 서해안 및 강화도와 鹽河, 漢江 등의 해도를 작성했다. 프랑스 해군이 거문도의 해도를 작성한 것도 이 해였다. 그리고 그들은 대동강 입구의 海圖도 1867년·1868년·1870년·1872년 등 4회에 걸쳐 작성 보완한 바 있다. 그리고 1868년에는 ‘빠리지리학회지’(Bulletin de la Société de Géographiques de Paris) 에 로스땡(Rostaing)이 ‘조선의 한강에 대한 최초의 탐사기록’을 발표하여 프랑스 함대가 한강을 실측했던 사실을 보고했다. 이와 함께 19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영국 런던의 해군수로국에서 간행한 각종의 해도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1845년부터 1876년 사이에 조선의 연근해를 측량한 6편의 해도가 출판되었다.823)러시아 대장성, 앞의 책, 243∼244쪽. 영국 海軍水路局에서는 1845년에 제작하여 1863년과 1873년에 걸쳐서 수정 보완한 ‘朝鮮群島 남쪽부분’을 제작했다. 이에 이어서 1860년에 ‘조선 부산항과 그에 인접한 해안들’이 제작되었다. 1863년에 ‘일본제도·대한해협과 이끼섬’, ‘일본·대한해협·대마도와 부근 한국해안을 포함한 큐우슈와 일본 서쪽해안들’이 제작되었다. 1867년에는 ‘황해 鹽河와 한강진입로’를, 1876년에는 ‘조선 동해안·라자레프만·부로우튼항’ 등을 제작했다.

 요컨대 서양인의 조선에 대한 인식이 확대되어 나가는 과정은 지도를 통해서도 검증될 수 있다. 16세기의 서양인들은 조선의 존재를 전혀 알지 못했거나, 아라비아 지리학의 영향 아래 조선을 도서로 생각해 왔다. 이러한 오류는 17세기 말엽에 간행된 서양의 지도에까지도 간헐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한편 16세기 후반의 일부 지도에서는 조선을 해안의 일부로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17세기 말엽부터 조선을 반도로 인식하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이와 같은 견해는 17세기 대부분의 지도에서 동의를 얻게 되었다. 그들은 조선을 좁고 긴 반도 모양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19세기 전반기에 이르러서야 조선의 지형이 오늘날의 지도에 가깝게 인식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선 연해에 대한 항해가 빈번해지는 과정에서 18세기 말엽부터는 조선 연해의 해도들이 작성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조선에 대한 서양인들의 인식은 강화되어 조선을 직접 항해하기도 하여, 조선이 이양선에 대한 경계를 강화하도록 자극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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