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4. 임노동의 발생
  • 1) 농민층의 분화
  • (2) 노동력 수요의 증대

(2) 노동력 수요의 증대

 둘째로, 사회적 분업이 분명해지고, 상품화폐경제가 발달하는 속에서 노동력의 수요가 크게 증대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우선 노동력의 수요는 국지적이었지만 농촌에서 나타났다. 조선 후기 농촌사회에서는 지배층의 억압과 횡포, 그리고 상품화폐경제의 보급으로 농민계층이 분화되어 대다수의 농민들이 영세한 소작농이 되거나 농토에서 방출되어 갔고 이와 아울러 일부 농민들이 경영방법의 개선으로 경작지를 확장하고 상업적 농업을 영위하는 모습도 보여지고 있었다.

 이른바「經營型富農」또는「庶民地主」라고 불리우는 부농층은,「地主型富農」또는 封建地主들이 농토를 빌려주는 대가로 소작료를 거두어 富를 축적함에 대하여 경영확대와 상품생산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자 했다.0269) 金容燮,<朝鮮後期의 經營型富農과 商業的 農業>(≪朝鮮後期農業史硏究-農業變動·農學思潮-≫Ⅱ, 一潮閣, 1971), 135쪽.
허종호,≪조선봉건말기의 소작제연구≫(사회과학원출판사, 1965;한마당, 1989), 78쪽.
그들은 自作地나 小作地를 막론하고 토지를 늘려 갔는데, 그 방법으로 황무지를 개간하거나 토지를 매입하였고, 때로는 退賭地도 매입하여 경영을 확대하였다. 18세기의 경영형부농들은 3, 4정보 이상을 경작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때로는 20여 정보의 농지를 경영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와 같은 경영규모는 가족노동의 능력범위를 넘어서는 것이다. 특히 농법이 移秧法으로 바뀌면서 이앙기에는 단시일에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였다. 18세기 전반의 실학자 李瀷은 농촌 실정을 말하면서 재력있는 자는 일이 없는 자들을 고용하여 넓은 땅을 갈고 많이 심어서 많은 수확을 거둔다고 했다.0270) 李 瀷,≪星湖僿說≫人事門 什一賦. 같은 무렵 충청도 농촌실정을 보고한 朴文秀도 불과 10마지기의 소작지를 경영하는데도 세 번 김매고, 벼베고 타작하는 데 소요되는 노동력이 연 50명이나 된다고 하였다.0271)≪備邊司謄錄≫82책, 영조 3년 10월 22일.

 한편 경영형부농층은 이 시기 유통경제의 발달에 부응하여 잉여생산물을 시장에 내놓았고, 더 나아가 시장을 대상으로 한 농산물을 재배하기에 이르렀다. 농민들이 생산한 상품작물에는 미곡을 비롯한 곡물이 큰 비중을 차지하였는데, 조선 후기에는 이 밖에도 목화·담배·인삼·약재·채소 등이 인기있는 상품작물로 재배되었다.0272) 金容燮, 앞의 책, 153∼180쪽.
李永鶴,<18세기 煙草의 生産과 流通>(≪韓國史論≫13, 서울大, 1985), 207쪽.
그런데 이들의 생산에는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였다. 씨뿌리기, 김매기, 웃순 잘라주기, 수확물 채취 등에 있어 집약성이 높아 많은 노동력이 소요되었다. 특히 목화·담배·인삼을 재배하는 데 드는 노동력은 일반 곡물농사를 하는 것보다 배가 더 소요되었다. 開城을 중심으로 성행한 인삼재배의 경우를 보면, 인삼재배는 토양·온도·햇빛에 민감하기 때문에 재배과정에는 매우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였는데, 늘 蔘床에 물을 주며 온도와 햇빛을 조절하는 데 항시 유의해야 했다. 더구나 인삼을 옮겨 심을 때나 땅에서 캘 때는 한꺼번에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였다.

 노동시장은 이 시기의 상공업 활성화에 힘입어 농촌에서보다도 수공업장이나 광산·浦口 등지에서 더 확장되고 있었다. 조선 후기에는 부역제에 토대하여 운영되던 官營手工業이 쇠퇴하고, 자유롭게 제품을 생산·판매하는 民營手工業이 성장하고 있었다. 대동법의 시행은 민영수공업의 발달을 더욱 촉진하였다. 민영수공업은 종이·자기·철물·가구·농기구·직물 등에서 발달하였는데, 생산규모가 커지면서 매뉴팩처적 경영으로 발전해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 생산과정에는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였다. 노동시장은 鍮器店·鐵器店·沙器店 등의 店村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0273) 宋贊植,≪李朝後期 手工業에 관한 硏究≫(서울大, 韓國文化硏究所, 1973), 95쪽.
金泳鎬,<朝鮮後期 手工業의 發展과 새로운 經營形態>(≪大東文化硏究≫9, 成均館大, 1972), 119쪽.

 한편 수공업 제품의 유통 및 수요의 증가는 그 원료 생산을 위해 광업의 발달을 촉진시켰다. 광산경영 역시 조선 전기에는 부진하였으나, 17세기 이래로 금·은·동에 대한 수요가 급속히 증대하면서 광산의 개발이 촉진되었는데, 17세기 말엽에는 은광의 경우 70개소에 이르는 銀店이 설치되기도 하였다.0274) 柳承宙,<朝鮮後期 鑛業 經營形態에 관한 一硏究-17·8世紀 別將制下의 銀店을 中心으로->(≪歷史敎育≫28, 1980), 81쪽. 광산개발은 위험성이 많기는 했지만, 수익성이 높아 자본을 집적한 사람들은 이 부문에 적극 진출하여 큰 자본을 모으기도 하였다.0275) 林炳勳,<朝鮮後期 鑛業經營의 發展-金·銀鑛業을 中心으로->(≪韓國史硏究≫32, 1981), 135쪽. 이같은 광산에서는 채취과정에서 많은 노동력이 소요되었다. 광산에서의 노동은 고되고 험한 것이었지만, 깊은 산 속에서 작업하기 때문에 봉건국가 또는 탐관오리들의 통제와 억압이 덜 미치고 있어 농민들은 오히려 선호하였다. 노동조건이 비교적 좋고 수익성이 높은 금광 같은 곳은 노동수요가 컸다. 금광의 생산공정은 채굴·운반·건조·분쇄·선별·도금 등으로 나뉘어지는데, 18세기말 황해도 遂安금광의 경우 550여 명의 광부들이 39개의 金穴에서 일하고 있었다.0276)≪備邊司謄錄≫188책, 정조 22년 7월 27일.

 노동시장은 포구나 장시와 같은 상업기지에서도 형성되고 있었다. 농업·수공업 등에서의 생산력 증대는 자연히 物貨의 유통을 활발히 하였고, 그러한 속에서 서울을 비롯한 각지에서 상인들의 활동이 분주하였다. 곡물·어염·과일·목재 등을 판매하여 큰 이득을 보는 상인들이 적지 않았는데, 그들 중의 일부는 都賈로 성장해갔다. 상업이 활성화되면서 장시와 장시, 포구와 포구를 연결하는 원격지교역이 이루어지고, 운송·창고·금융의 전문업자도 생겨났다. 장시와 포구가 상업기지로 발전해가면서 물화를 옮겨 싣고, 실어나르고, 관리함에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였다.0277) 高東煥,<18, 19세기 外方浦口의 商品流通發達>(≪韓國史論≫13, 서울大, 1985), 239쪽. 특히 포구에는 대량의 화물을 실은 선박이 드나들고 있어서 부두노동자들이 항시 필요하였다. 19세기 중엽 전라도 沃溝의 群山浦의 경우에는 매일 60∼70명의 인부가 고용되고 있었다.0278)≪宗親府謄錄≫무신 5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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