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5. 수공업의 발달
  • 2) 상업자본의 생산적 전회와 선대제의 발생

2) 상업자본의 생산적 전회와 선대제의 발생

 조선 후기에는 상품화폐경제의 발전에 조응하여 상업자본이 광범하게 축적되었다. 그 중 몇 가지 형태를 든다면 서울·개성·수원 등에서의 市廛을 토대로 한 시전자본, 시전에 대항하면서 새롭게 성장한 亂廛자본, 시장과 시장 사이를 연결하는 褓負商자본, 시장과 都邑에 정주하는 客主·旅閣자본, 봉건정부에 필요한 상품을 조달하는 貢人자본, 농촌시장과 도시 사이를 편력하는 私商자본, 청국 및 일본과의 교역을 담당하는 무역자본 그리고 이러한 각종 형태의 상업자본에서 더욱 성장·발전하여 대자본을 이룩한 都賈자본 등이 있다. 그리고 그러한 상업자본을 소유한 상업자본가는 흔히 ‘富商大賈’라고 불렸다.

 원래 상업자본은 봉건적 생산양식의 寄生者이면서 동시에 그 蠶食者이다. 이러한 기생적 기능과 잠식적 기능의 모순에서 타인의 생산물의 유통과정을 장악하여 轉渡된 이윤을 축적하던 상업자본은 점차 유통과정에만 머무르지 않고 생산과정에 침투하게 된다. 상업자본이 생산으로 전회하는 데 있어서 흔히 수공업자에게 원료나 자금을 미리 선대(Putting-out)하거나 직접적으로 장악하는 선대자본으로 나타나고 그러한 선대자본을 운영하는 경영형태로서 선대제(Putting-out system)가 발생하였다. 이리하여 범주적으로는 상업자본-선대자본-산업자본이라는 역사적 계보가 형성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이러한 범주가 엄격히 단계지워 나타난다고 할 수 없다. 오히려 선대제와 매뉴팩처가 동시에 병행해서 나타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최근의 경제사학의 연구성과에 의하면, 서구에서의 이른바「매뉴팩처기」(16세기 후반∼18세기 전반)에도 선대제가 지배적이었다고 한다. 조선 후기에도 18세기 전반부터 이미 선대제에서 벗어나려는 수공업자들의 노력이 줄기차게 나타났지만, 19세기에도 선대제는 아직 단계적으로 극복하기에는 먼 형편에 있었다.

 정조 12년(1788)에 禹禎圭는≪經濟野言≫에서 부상대고들이 제각기 재물을 분담하고 고용노동자를 모집하여 銀店을 경영하게 할 것을 제의한 바 있다.0396) 禹禎圭,≪經濟野言≫銀店勿禁之議. 또한 순조 17년(1817)에 함경감사를 지낸 李羲甲은 “銀鑛은 사상의 채취에 맡길 것”0397)≪備邊司謄錄≫206책, 순조 17년 4월 5일.을 제안한 바 있다. 이것은 상업자본을 산업자본에 전환시키는 하나의 방법이라고도 볼 수 있다. 물론 광업이 제조업은 아니지만 우정규의 상소에 나타난 바와 같이 은의 채광과 제련을 함께 한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으므로 산업자본으로의 전화를 시도한 것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그런데 상인으로 하여금 은점을 경영하게 하자는 제안은 실상은 이미 사상들이 현실적으로 은점을 경영하고 있는 사실을 공식화하려는 것이었다. 그 실례로, 영조 51년(1775)에 한 松都富商이 遂安에 있는 은광의 물주로 있었으며0398)≪英祖實錄≫권 125, 영조 51년 9월 계유. 洪景來亂에 자금을 대었던 부상대고 李禧著 역시 광산을 경영하고 있었다.0399)≪辛壬錄≫. “여러 도에서 은점·동점·鉛店 등의 각 점을 신설하는 자는…이미 허다한 재력을 쓰고 있다”0400)≪備邊司謄錄≫173책, 정조 12년 11월 20일.고 하는 경우의 재력가는 상당한 부분이 상인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이 밖에 시전인의 상업자본이 생산부문에 투하된 경우도 엿볼 수 있다. 가령 縇廛은 중국에서 白絲를 수입하여 그것으로 비단을 짜서 팔았으며 綿紬廛은 국내에서 생산되는 常絲로 명주를 짜서 팔고 있었다.0401)≪備邊司謄錄≫173책, 정조 12년 11월 7일. 이 때 선전에서 비단을 짜는 생산형태나 면주전에서 명주를 짜는 생산형태는 알 수 없으나 상업자본이 생산부문을 그의 지배하에 두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순조 29년에는 선전의 상인들이 장인들과 ‘부동하여’ 몰래 중국 것과 같은 비단을 짜서 팔고 있었다.0402)≪備邊司謄錄≫217책, 순조 29년 2월 1일. 이 때 선전상인이 수공업자들과 부동했다는 것의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선전의 상업자본이 생산부문에 침투했던 것은 틀림없고 그것도 그 규모가 전국의 원료를 ‘一並都聚’할 정도이고 보면 매우 컸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條里木廛의 경우에도 비슷한 형태를 찾아볼 수 있다. 철종 8년(1857)의 기록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조리목전에서 수공업자를 고용하여 생산활동을 하고 있었다.

조리목전 시전상인이 말하기를, 引鉅匠은 즉 우리 시전이 돈을 주고 고용한 工匠인데 매월 9냥씩의 임금을 지급해온 것이 상례였으나 작년에는 갑자기 매월 26냥씩 받겠다고 하여 鐥工監에 고소하였다(≪備邊司謄錄≫244책, 철종 8년 정월 28일).

 그런데 그 때 수공업자가 받는 임금이 한 달에 9냥이었으니 하루 30문이 되는 셈이다. 이것은 그 당시의 하루 평균 노임 25문보다 높았던 것이다. 기록에는 조리목전에 고용된 임금노동자의 수효가 명시되어 있지 않으나 급료를 당시의 평균액보다 더 많이 주고 그것도 월급제로 실시하였다고 하니 매우 주목되는 사실이다.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광주의 分院에서도 沙器匠은 ‘遂遡給料’로 사역하고 있었다.

 또한 紙廛의 경우에도 製紙匠과의 관계가 깊었다.≪貢弊≫에 나타난 造紙署 紙匠들의 호소에 의하면, “試紙의 조성은 모두 지전상인의 物力에서 나오고 우리들이 사적으로 갖추어 이익을 취하는 것이 아니다”0403)≪貢弊≫4책, 造紙署紙匠.라고 하여 지전상인의 자금을 前貸받고 완성품은 그대로 지전에서 가지고 간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만으로는 지전상인과 수공업자와의 관계가 선대제로 제도화되었다고 말하기는 어려우나 그러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음은 분명하다. 그런데 정조 23년(1799)의 지전인들의 상소에 의하면, 당시 지전에 화재가 발생하여 저장해둔 科紙 등이 불에 타버려 목하 房事를 수리하고 종이를 만들 원료 확보에 고심하고 있었다고 한다.0404)≪備邊司謄錄≫189책, 정조 23년 12월 17일. 여기에서 말하는 방사는 곧 지전에 부설된 수공업장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한말 러시아 大藏省에서 발간한≪韓國誌≫에서도 서울의 각 시전에는 뒷편에 따로 ‘助工場’을 갖고 있는 것이 상례라고 하고 있는 것을 보면 크든 적든 상업자본과 수공업자와의 직접적인 관계를 알 수 있다. 그 관계의 경제사적 성격은 역시 선대제적인 한 형태로 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한편 개성상인의 상업자본이 생산부문에 침투하는 경향도 많아졌다. 앞에서 광산투자의 경우를 보았거니와 정조 12년(1788)에는 송상들이 종이를 제조하는 중들과 ‘締結’하여 최우량의 종이를 독점해갔다.0405)≪備邊司謄錄≫172책, 정조 12년 정월 8일. 이 때 송상과 제지수공업자인 중들이 ‘체결’하고 있다고 하는 것의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송상이 자본을 그들에게 선대하고 완성된 종이를 독점적으로 확보했으리라는 것, 그리고 가격면의 협정 등과 관련된 내용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송상의 무리가 각 사찰에 屯聚하여 방물지를 몰래 구입하고 있다”0406)≪備邊司謄錄≫170책, 정조 11년 정월 1일.고 하는 기록도 거의 비슷한 사정을 말해주는 것 같다.

 개성상인은 무엇보다도 인삼장사로 이득을 보았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동시에 순조 21년(1821) 개성유수 吳翰源이 “개성에 사는 사람은 種蔘을 業으로 삼는 자가 많다. 매년 청나라에 가는 홍삼은 이 지방에서 전적으로 나간다”0407)≪純祖實錄≫권 24, 순조 21년 11월 병자.고 한 것을 보면 송상의 상업자본이 인삼의 재배와 가공에 상당히 투자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순조 10년에는 包蔘製造所로서의 蒸包所가 서울에서 개성으로 옮겨져0408)≪中京誌≫2, 土産.
姜萬吉,<開城商人硏究>(≪韓國史硏究≫8, 1972)참조.
송상은 인삼의 판매만이 아니라 그 재배와 가공을 공식적으로나 비공식적으로나 장악하게 되었다. 고종 3년(1866)에는 개성상인 朴京琰이란 자가 청주에서 암암리에 홍삼제조장을 만들다가 발각된 일도 있었다.0409)≪備邊司謄錄≫251책, 고종 3년 8월 18일.

 한편 京主人의 자본이 인삼제조업에 선대되어 있는 것도 볼 수 있다.

江界의 경주인인 金重瑞가 매우 간교한 사람으로서 수십년 동안 貿蔘을 빙자하여 강계에 오래 체류하면서 蔘戶에 미리 싼값으로 지급하여 下山한 후에 官納은 하지 않고 몰래 사고 팔면서 마침내 都賈가 되었으니 이로 인하여 근래에 강계에 인삼이 絶貴해졌다(≪備邊司謄錄≫160책, 정조 13년 정월 10일).

 일찍이 유수원은 상업자본의 전환투자에 의해 경영되는 수공업「店」을 설명하면서, 그 점주는 자금을 내어 傭保를 모집하여 상품을 제조·판매하고 월말에는 執役者와 점주가 각각 ‘各受機分’을 받게 된다고 밝히고 있다.0410) 柳壽垣,≪迂書≫권 8, 論商販事理額稅規制. 이러한 유수원의 ‘造店’ 구상에서 우리는 점주와 집역자가 구성적으로 대립되어 있고 거기에 각기 이윤범주와 임금범주가 설정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점의 경영문서로서 店歷을 들고 점역에 의거하여 월급제가 실시되고 있는 것도 주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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