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5. 수공업의 발달
  • 3) 매뉴팩처의 발생
  • (3) 직물산업부문

(3) 직물산업부문

 직물수공업은 전국의 각 지방에서 농촌부업의 형태로 광범하게 발전하였으나 도시에서는 직물을 자급자족하지 않고 시장에 의존하는 경향이 커져 갔고 이에 따라 18세기말 이래 보다 대규모로 직물을 생산하는 직물제조장이 나타나고 있었다. 정약용은 그것을 ‘織稍家’라고 하였다.

요즈음 직초가에서는 새로운 紡車를 쓰고 있다. 이것은 西關에서 흘러들어온 것인데 제도가 비교적 편리하고 민첩해서 잠사·면사 모두 이로 해서 거리낌이 없다. 향촌에는 아직 이런 것이 없다(丁若鏞,≪丁茶山全書≫1집 9권, 詩文集 文 應旨論思政疏).

 이로 미루어 보건대 ‘직초가’는 絹織과 면직을 겸하고 있었으며 종래의 물레와는 다른 새로운 방거를 도입하여 실을 대량으로 뽑고 그것으로 다시 織造하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 비단 등 직물을 짜는 노동분업은 대략 다음과 같이 3개의 공정으로 나뉘어져 있었다.0431)≪大典續錄≫工典 雜令.
古老들의 회고담과 현지답사에 의해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한 직물수공업의 분업이 제사과정, 정리·加糊과정, 織布과정으로 나뉘어져 있었다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는데(權丙卓,<李朝末期의 織物手工業>, 앞의 책) 여기에 대해서는 좀더 엄밀한 분석과 문헌적 방증이 필요하다.

織造工程  織匠: 약간 명 引紋工程  引紋匠: 약간 명 緯工程  緯奉走: 약간 명

 각 공정에 필요한 노동자의 수는 생산규모에 따라 달랐다. 정약용이 말하는 ‘직초가’의 경우에는 몇 명의 노동자를 고용하였는지 알 수 없으나 방거를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 또 하나의 생산공정으로서 製絲공정이 있었다.

 그리고 앞에서도 본 바와 같이 순조 29년(1829)에는 서울의 立廛 상인들이 국내의 常絲를 전국적인 규모로 都聚하여 활발하게 판매하고 있었다.0432)≪備邊司謄錄≫217책, 순조 29년 2월 1일. 이 경우 상사를 원료로 하고 있으므로 제사공정은 없다고 할지라도 직조공정·인문공정·위공정은 당연히 있었을 것이다. 원료를 전국적인 규모로 대량 구입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들의 비단생산의 규모가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들 때문에 당시 綿紬廛이 크게 낭패를 당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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