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6. 광업의 발달
  • 1) 18세기「별장」제하의 광업 실태
  • (1)「별장」제의 성립과 군수광업의 몰락

(1)「별장」제의 성립과 군수광업의 몰락

 17세기에 번창했던「監官」制下의 은광업은 동세기말에 가서 쇠퇴해갔고 새로운 광산 경영형태인「別將」제하의 군수광업이 성장하였다.

 감관제에서 별장제로의 이행에는 감관제가 지닌 비현실적인 구조적 모순을 극복하려는 광산 종사자들의 끈질긴 노력과 국내외의 정세변화에 따른 정부의 정책전환이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감관제하의 광산 경영형태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은 軍·營門 소관의 鉛店이 아닌 戶曹 소관의 銀店에서부터 비롯되었다. 광산 종사자들의 부역노동에 기초한 관영광업형태를 무너뜨려간 움직임은 두 갈래로 진행되었다.

 하나는 광산의 부역농민들이 身役으로 부과된 광물을 採納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동시에 당해 광산의 사적인 생산도 허락할 것을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부역농민의 이러한 요구는 조선 후기 최초의 관영광업장인 端川貢銀店에서 비롯되었다. 단천은점은 선조 26년(1593)에 재개발되어 단천민의 부역노동으로 채굴되어 왔는데, 같은 왕 36년에 이르러 정부가 단천민의 土貢과 民役으로 채납하도록 규정한 곳이다.0444)≪萬機要覽≫財用編 4, 金銀銅鉛. 그런데 단천민의 줄기찬 요구와 저항에 부딪히자 정부는 인조 3년(1625) 貢銀을 채납하는 여가에 사적인 생산을 허용하고 일정량의 稅銀을 수취하기로 양보하였다.0445)≪仁祖實錄≫권 9, 인조 3년 6월 신묘. 그리하여 단천은점은 호조 소관이지만 단천민으로부터 공은과 세은을 수취하면서 단천민의 사적 생산을 허용하는 일종의 分益制 형태의 운영체제로 전환한 것이다. 단천공은점의 분익제적 운영형태는 군·영문 소관 연점의 경영형태에도 영향을 미쳐 胡亂과 북벌정책기를 지낸 17세기 후반에는 연점의 募軍들도 자신의 신역가로 부과된 연액을 채납하는 여가에 사사로이 은을 채취하였고 군·영문 또한 모군이 私採한 은의 양에 따라 세은을 수취하였다.0446) 南九萬,≪藥泉集≫疏箚 五十度呈辭後乞免兼論採銀事箚.

 이처럼 감관제하의 경영형태를 내부로부터 와해시키는 분익제적인 운영형태가 발생하던 시기에 또 하나의 새로운 광산 경영형태가 은점에 적용되어 감관제의 존립을 위협하였다. 倭亂 후 은의 화폐적 가치가 증대됨에 따라 민간인의 은광업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갔고, 정부에서도 官採에 의한 재력과 인력의 손실없이 세은을 수취할 목적으로 17세기초부터 민간인의 은광개발을 허락해왔다. 따라서 민간인에 의한 은광의 채굴이 시도되었고0447)≪度支志≫外篇 8, 版籍司 財用部 金銀事實, 선조 38년. 진보적인 관원들에 의하여 은광의 民採制 적용이 주장되기도 하였다.0448) 柳夢寅,≪黙好考≫中, 安邊三十二策贈咸鏡監司韓益之令公序 其七 博採銀. 그러나 17세기 전반에는 정부의 수세가 과중하고 민간자본이 성숙하지 못한 단계에서 은광의 민채가 성공하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정부는 호조에서 은점을 설치한 뒤 민간인으로 하여금 ‘納稅採銀’토록 한다면 富商大賈들이 기꺼이 참여할 것이라는 의도하에 이른바「設店收稅法」을 제정하였다.0449)≪承政院日記≫120책, 효종 2년 8월 11일. 그러나 부상대고가 은점의 경영자로 참가하는 사례는 볼 수 없었다. 그것은 광업의 속성이 사업의 성패를 미리 가늠하지 못하는 투기사업인데다가 또 당시로는 은광개발의 분위기가 그들을 유치할 만큼 전혀 조성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후 숙종 10년(1684)경에 이르는 30여 연간 군·영문은 호조와는 달리「各邑月課鉛丸」의 防納權을 흡수하면서 자체 내의 수용 연환과 각읍월과연환을 조달하기 위해 감관제하의 은광개발을 경쟁적으로 추진하였다. 여기서도 募軍들에 의한 은의 사적 생산이 이루어졌고 은의 생산성도 점차 높아지고 있었다. 곧 숙종 10년을 전후한 시기에 이르면 모군들의 요구로 부역노동이 점차 분익제하의 부역노동으로 전환되었고 모군들은 더 나아가 부역노동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위해 광산의 민영화를 지향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점차 서울의 부상대고들도 은광업을 하나의 利源으로 인식하게 되었고 앞 시기에 실현하지 못했던 은점의 설점수세법을 준용할 기회를 모색하였다. 그러나 당시에 개발된 전국의 연·은광산은 모두 군·영문에서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군·영문으로부터 광산을 탈취하지 않는 한 그들은 어떤 형태로도 참여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 무렵의 국내외 정세는 이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전환되고 있었다. 淸나라가 숙종 7년에 三藩의 亂을 평정하고 국력이 신장되자 국내의 北伐論 또한 명분론으로 흘렀으며0450) 柳承宙,<朝鮮後期 鑛業政策論>(≪韓國思想大系≫Ⅱ, 社會經濟思想篇, 成均館大 大東文化硏究院, 1976), 594쪽. 따라서 정부의 관심도 군사상의 문제에서 벗어나 외교무역상의 문제로 기울어져 갔다. 淸使 접대비와 使行 경비 및 公私貿易費가 모두 은으로 지불되었고 이 외교무역상의 경비를 분담하고 있던 호조와 常平倉은 경비 마련을 위해 허덕이고 있었다.0451)≪增補文獻備考≫권 160, 財用考 7, 附金銀銅.
≪備邊司謄錄≫23책, 현종 4년 3월 8일.
≪承政院日記≫309책, 숙종 11년 6월 3일.
이 때 서울의 부상대고들은 이들 관서와 결탁하여 군·영문의 鉛店을 탈취할 계획을 추진하였다. 군·영문 중에서도 특히 대부분의 연점을 장악했던 군문의 연점을 탈취하려는 계획이었고 그 방법은 군문의 연철수요를 격감시켜 더 이상 연점을 많이 보유해야 할 명분이 없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같은 계획하에 부상대고들은 상평창과 결탁하여 三南各邑月課鉛丸契를 조직한 후 숙종 11년(1685) 군문의 각읍월과연환 방납권을 탈취하였다.0452) 柳承宙,<朝鮮後期 貢人에 관한 一硏究-三南月課火藥契人의 受價製納實態를 中心으로-(上)>(≪歷史學報≫ 71, 1976), 22∼23쪽. 이에 따라 군문들은 소속군사의 수용 연환만 조달하면 되었기 때문에 그 이상의 연환을 보유해야 할 명분을 상실하였다. 이러한 상태에서 서울의 부상대고들은 요로와 결탁하여 호조로 하여금 군·영문의 연점을 탈취하도록 종용하고 자신들이 기존 은점의 수세청부업자가 되거나 신설 은점의「設店」·「收稅」업무를 대행하려 하였다.

 이처럼 제반여건이 조성된 단계에서 비로소 호조는 숙종 13년 군·영문 소관 연점에 대한 專管收稅權을 주장하였다. 호조는 부상대고를「別將」으로 파견하여 관리·수세토록 하였다. 호조는 우선 군문의 반발을 막기 위하여 각 연점으로부터 은과 연을 함께 수세한 뒤 은은 호조에서 차지하고 연은 군문에 이송할 것을 약속하였다.0453)≪備邊司謄錄≫41책, 숙종 13년 정월 2일.
南九萬,≪藥泉集≫4, 疏箚 五十度呈辭後乞免兼論採銀事箚.
이 수세 방안은 일단 호조와 군문의 이해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합리성을 지녔기 때문에 군·영문의 반발이 다소 있었지만 결국 실현되었다.

 호조는 이 때의 수취규정에 의거하여 군·영문의 연점을 흡수해갔지만 호조만이 독점적으로 연·은점을 설치·수세할 권한을 획득한 것은 아니었다. 연점을 호조로 빼앗긴 군·영문에서는 다시금 경쟁적으로 연·은광을 개발하여 호조의 은광개발을 제약하였다. 이 때문에 호조는 군·영문과의 분쟁을 계속하였고 마침내 숙종 28년에는 군·영문의 연·은점을 모두 흡수하였을 뿐 아니라 독점적인 설점수세권을 입법화하였다.0454)≪備邊司謄錄≫52책, 숙종 28년 6월 26일.

 같은 시기에 군·영문의 硫黃店과 鐵店에 대한 침탈정책이 병행되고 있었다. 정부는 진휼청의 경비를 보충하기 위하여 숙종 30년대에 이르러 삼남월과총약가의 대부분을 진휼청에 이속하고 소관하의 三南月課鳥銃契와 火藥契로 하여금 각 읍에 방납토록 하였다.0455) 柳承宙,<朝鮮後期 貢人에 관한 一硏究(上·中·下)>(≪歷史學報≫ 71·78·79, 1976∼1978) 참조. 군·영문의 월과총약 방납권을 탈취함으로써 군·영문이 여러 곳의 유황점과 철점을 보유할 이유를 상실케 한 것이다. 이러한 정부정책의 의도는 진휼청의 경비 보충과 군·영문의 광산보유 규제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정부에서는 군·영문의 유황점과 철점에 속한 屯土 등 각종 재원과 수많은 모군들을 수괄하여 재정과 인력을 확충하려 하였다. 이러한 정책은 강력하게 추진되어 18세기초에 이르러서는 訓鍊都監의 慶州·求禮·忠原 유황점0456)≪備邊司謄錄≫86책, 영조 5년 6월 20일·윤7월 29일. 외의 모든 유황점이 潛採鑛山化하고, 훈련도감 소관 鐵峴鎭 鐵店과 禁衛營 소관 葛山屯 철점0457)≪備邊司謄錄≫111책, 영조 18년 12월 15일. 외의 철점들은 민영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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