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8. 운수업의 발달
  • 2) 수상운송
  • (2) 사물의 운송

가. 소작료의 운송

 조선 후기에 세곡운송을 중심으로 船運業이 일정한 수준에 이를 만큼 발달하고 있었음이 확인되었는데, 이 시기에 선운업은 관부용역에서뿐만 아니라 민간용역에서도 그 위치를 어느 정도 굳혀가고 있었다. 민간용역은 주로 小作料운송과 상품운송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것도 초기에는 소작료운송이 중심이었는데, 소작료의 금납화가 행해지고 상품화폐경제가 보다 활발해지면서는 상품운송이 주목되어 갔다.

 소작료의 운송은 地主制가 널리 보급되면서 활기를 띠었다. 조선 후기의 토지소유는 일부 봉건지주 또는 경영형부농에게 집중되었고, 대다수의 농민들은 영세한 소작농이었다. 당시의 지주제는 조선사회의 농촌을 규제하고 반영한 토지소유관계로서, 16세기 收租權的 토지지배가 약화되고 양반·토호층이 소유권에 의해 토지를 집중하면서 전면적으로 확대되어 갔다.0760) 李載龒,<科田法의 崩壞와 土地私有化의 進展>(≪한국사≫10, 국사편찬위원회, 1974), 262∼268쪽. 즉 職田法이 16세기 중엽 완전히 폐지되면서 현직관료들은 녹봉에만 의지할 수 없음을 알고 토지를 개간하기도 하고, 사들이기도 하며 때로는 강탈하기도 하여 私有地를 확대해갔다. 그리하여 이미 당시에 남방 여러 지방에서는 수백 결의 땅을 차지한 지주들이 생겨났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정부의 개간정책을 토대로 양반·토호들이 토지를 더욱 방대하게 소유하였다. 지주의 대토지소유, 즉 농장에서의 소작료는 그 대부분이 처분되어야 했다. 소작료는 殖利活動, 전답의 매입, 생필품의 구입 등 현지에서 처분되기도 하였지만, 서울에 거주하는 不在地主의 경우에는 상당량이 서울로 운송되었다.

 소작료의 운송도 세곡의 운송에서와 같이 船運에 의존하였다. 왜냐하면 당시로서는 별도의 운송수단이 없어 선운에 의하는 것이 가장 용이하였기 때문이다. 지주들이 소작료를 운반하기 위하여 필요한 선박을 독자적으로 확보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소작료의 운반을 위하여 대개 두 가지의 방법을 택하였다. 하나는 국가의 세곡선을 은밀히 이용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당시 역량을 보이고 있던 사선을 세내어 운송하는 것이었다.0761) 崔完基, 앞의 책, 80∼82쪽. 그런데 국가의 세곡선에는 원칙적으로 私物의 첨재가 금지되어 있었다.≪大典會通≫에 의하면 私穀 10석 이상을 첨재한 자는 3년의 금고형, 100석 이상을 첨재한 자는 5년의 금고형에 처하고, 그 사곡은 모두 몰수한다고 하였다.0762)≪大典會通≫권 2, 戶典 漕轉. 세곡선의 사물 첨재를 금지한 것은 過積으로 인한 침몰사고의 염려 때문이었다. 당시 漕軍들은 조운 도중에 부당 이익을 꾀하여 배의 하중을 고려하지 않고 ‘貪價重載’하고 있었다. 사선인 경우에는 그 현상이 보다 심했다. 현종 9년(1668) 宋時烈의 보고에 의하면, 뱃사공들은 요행을 바라고 불법적으로 사물 첨재를 거침없이 자행하고 있었는데, 그 수량은 公物보다 배나 된다고 하였다.0763)≪增補文獻備考≫財用考 4, 漕運.

 양반관료들은 소작료운송을 위해 그들의 권력을 이용하여 관선을 이용하기도 하였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합법적인 방법이 아니어서 일시적 수단일 수밖에 없었다. 조선 후기 소작료의 주요 운송수단은 당시 나름대로 위치를 확보해가던 사선이었다. 사선은 일찍이 조선 전기에도 소작료운송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중종 때의 沈貞·申公濟 등은 이같은 사선의 역량에 주목하여 사선의 활동을 지원해 주어야 한다고까지 하였다.0764)≪中宗實錄≫권 65, 중종 24년 5월 을묘. 외방의 소작료가 서울에 운송되어야 물가가 안정되는데, 그 운송을 사선이 맡고 있음을 상기시키고 있다. 이들 사선이 어떠한 선박이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확실히 경강선이 소작료의 운송에서 그 역할을 증대시켜 나가고 있었다. 관계 자료가 官撰記錄 중심이어서 세곡이나 군량미운송과는 달리 소작료운송에 대하여는 그 자세한 전말을 알 수가 없다. 숙종 28년(1702) 기록에 의하면, 당시 경강선 300여 척 가운데 약간의 선박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宮房·衙門에 소속된 선박으로서, 그 소유는 실제로는 船稅의 징수가 목적이었다고 하더라도 표면상의 이유는 해당 궁방과 아문 소유의 농장에서 수취하는 소작료의 운송에 있었다.0765)≪承政院日記≫408책, 숙종 28년 12월 18일. 위정자들이 경강선의 확보를 위해 노력한 이유의 하나도 세곡의 운송과 아울러 소작료운송에 있어서 경강선의 역할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위정자들은 경강선인의 부정행위 등이 문제화되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의 생업인 운송용역의 길을 막는 조처를 취할 수가 없었다. 정조 5년(1781) 기록에 의하면, 당시 전라도관찰사가 조선 29척을 더 건조하여 선박의 부족 현상을 해결하고 나아가 경강선인의 병폐를 제거하자고 건의한 데 대하여, 정조는 이는 경강선인의 생업과 직결되어 있는 문제라면서, 비록 국가로서는 다소 이득이 있다 할지라도 경강선인들로서는 잃는 바가 크니, 백성들의 삶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고 대답하였다. 나아가 그는 차라리 수천 석의 곡물을 잃을지라도 어찌 수만 선인들의 생업을 잃게 하겠느냐면서, 船利가 끊어지면 장차 선박이 없어질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京中의 사대부들 역시 장차 소작료를 운송하는 길이 막힐 것이라고 하면서, 소작료운반에 있어서의 경강선의 역할을 환기시켰다.0766)≪日省錄≫정조 5년 9월 24일.

 정조 9년(1785) 좌승지 柳義養의 보고에 의하면, 당시 서울에 거주하는 양반지주들이 외방농장에서 거두어오는 秋收穀은 대략 20만 석 가량이었던 것 같다.0767)≪承政院日記≫1540책, 정조 9년 9월 9일. 즉 한양의 연간 쌀 소비량 1백만 석의 20%가 소작료로 충당되었다고 보이는데, 그 대부분이 경강선에 의해 운송되고 있었던 것이다.

 소작료운송에 있어서 경강선의 역할이 증대됨과 상응하여 경강선인들은 실제로 그 생업의 일부를 소작료의 운송용역에서 찾고 있었다. 소작료의 운송은 세곡운송과 더불어 당시 가장 큰 운송용역이었다. 영조 4년(1728) 기록에 의하면, 경강선인의 부정행위가 극심해지자 호남어사 李匡德이 경강선인의 호남지방 왕래를 금한 바 있었다. 그리하여 세곡은 물론이거니와 소작료를 비롯한 곡물의 운송용역이 불가능해졌고, 이로 인하여 경강선인들은 생업을 잃게 되었다. 이에 경강선인 1백여 명은 궁궐문 밖에서 입궐하는 대신의 길을 막고서 그 조처의 철회를 요구하였다.0768)≪備邊司謄錄≫83책, 영조 4년 정월 23일. 이같은 움직임은 경강선인의 생업이 세곡운송뿐만이 아니라 소작료운송에도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것으로서, 그들은 활로의 확보를 위해서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영의정 李光佐는 당시 70∼80%의 서울 성민들이 호남지방의 私穀에 식량을 의존하고 있다고 밝히고 경강선의 활동을 일체 금지시킨다면 서울은 식량난에 허덕이게 될 것이라면서 선인들의 편을 들었다.0769) 위와 같음. 즉 소작료의 운송은 그 운송물량에 있어서도 세곡의 운송물량에 버금갔으니, 그것은 세곡의 운송과 더불어 경강선인이 보유하고 있던 중요한 생업수단의 하나였던 것이다. 더구나 소작료운송에 있어서는 세곡의 운송보다도 선가가 후하였다고 보이는데, 운곡선이 부족한 현실 속에서 그것은 당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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