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1. 상인층의 성장과 도고상업의 전개
  • 1) 관상도고의 활동
  • (1) 시전도고의 활동

(1) 시전도고의 활동

 시전도고는 서울에 설치되었던 시전이 중앙정부와 관계를 맺으면서 특권상인화함으로써 이루어졌다. 즉 시전상인의 도고상업은 정부로부터 부여받은 禁亂廛權을 바탕으로 형성된 것으로, 시전상인의 금난전권 행사가 곧 도고상업행위였던 것이다.0793) 姜萬吉, 위의 책, 169쪽. 금난전권이란 조선정부가 시전에게 부여한 특정 물종의 독점적 유통권으로서, 금난전권을 갖게 되면 平市署와 漢城府의 廛案에 등록되어 해당 물품은 금난전권을 가진 시전만이 독점적으로 취급할 수 있게 된다. 즉 시전상인에게만 주어진 상업적 특권이었던 셈이다.0794) 시전상인의 특권을 舊特權과 新特權으로 나누고, 公貿 등 국가적 물자 수요에 의해 지급되는 특권을 구특권, 관아·궁방과 유착하여 발생한 특권을 신특권으로 분류한 견해도 있다(須川英德,<十八世紀朝鮮における經濟動向について-亂廛·辛亥通共の再檢討->,≪朝鮮學報≫143, 1992, 4쪽). 따라서 전안에 등록되지 않은 사람이 임의로 해당 물종에 관한 상행위를 벌일 경우, 시전은 이를 亂廛으로 규정하여 이들의 행위를 금지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소유 물품까지도 압수, 혹은 거래 물품에 대한 일정액의 수세를 가할 수가 있었다.0795) 금난전권이 수세권으로 전환되는 것은 신해통공 이후에 나타난 일반적 경향이었다(高東煥,≪18·19세기 서울 京江地域의 商業發達≫, 서울大 博士學位論文, 1993;卞光錫,<18세기 市廛商人과 商權>,≪國史館論叢≫59, 國史編纂委員會, 1994).

 시전의 금난전권은 ‘一物一市’의 원칙에 따라,0796)≪各廛記事≫地卷, 신미 2월 일. 하나의 물종에 대하여 주어지는 것이 상례였으나, 반드시 이 원칙이 지켜졌던 것은 아니었다. 동일한 물종을 여러 시전이 매매하는 경우도 있었고, 특정 시전의 취급 물종이 점차 증가하는 예도 있었다. 米廛의 경우 국초부터 上·下·門外米廛이 있었고, 이후 西江미전과 麻浦미전이 설립되기도 하였다. 刀子廛의 경우도 처음에는 粧刀類의 전매권만을 가지고 있었으나, 점차 전매물종이 증가하여 나중에는 方物廛으로 불려지기도 하였다.0797)≪漢京識略≫권 2, 市廛.

 한편 시전상인의 도고상업은 정부와 시전 양측의 필요가 일치되어 나타난 결과였다. 壬亂 이후 극심한 재정 곤란을 겪고 있던 조선정부는 17세기 초엽 六矣廛과 같은 대규모 시전으로부터 國役이라는 명목으로 일종의 특별세를 징수하게 되었다. 이후 국역 징수의 범위가 확대되어 감에 따라 종래의 상업세보다 훨씬 부담이 무거워진 국역을 부과하고, 그 대가로 정부는 금난전권이라는 독점적 상업특권을 시전상인에게 부여한 것이다.

 한편 시전상인들은 새로이 일어나고 있던 비시전계 상인과의 경쟁을 배제하기 위하여 독점적 상업권을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었다. 조선 초기에도 서울의 종로 일대에 시전상인 이외의 상인이 있었고, 場市도 열리고 있었으나, 이 무렵만 하더라도 상업인구가 그리 많지 않았고 상거래도 활발한 편은 아니었다. 시전상인과 일반 私商人들 사이에 상권 다툼을 벌여야 하는 상황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16세기 이후부터 서울 등 대도시지역에는 상업인구가 급증하게 되었고, 그 결과 지금까지 평온하던 도회지 상업계에는 심한 商權 경쟁이 야기되었다. 농민층의 분화에 따라 농촌인구의 일부가 도시로 유입되었고, 금속화폐의 유통과 민간수공업의 발달, 對淸·對日무역 등 대외무역의 성행에 의해 상업인구가 급격하게 늘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심지어는 군인·아전·노복까지도 상행위에 가담하고 있던 형편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시전상인들은 商利를 독점하기 위한 수단으로 정부와 결탁, 법제적으로 사상인들을 규제코자 하였다. 금난전권은 바로 위와 같은 상업계의 변화의 산물이었다. 결국 시전상인들은 금난전권을 바탕으로 특권적 매점상업을 영위하려 하였던 것이다.

 시전의 금난전권은 처음에는 육의전과 같은 대규모 시전에게만 주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특권은 일상 생활용품을 취급하는 군소시전에게도 주어져, 지방의 소도시와 농촌에서 생산되어 대도시로 유입되는 상품을 특권적으로 매집함으로써 농민과 수공업자의 소생산품을 시장에서 차단, 상업적 이익을 독점할 수 있도록 하였다.0798) 姜萬吉, 앞의 책, 171쪽. 결국 시전상인의 도고상업은 16세기 이후의 상업 발전을 배경으로 정부와 시전상인 간의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상황속에서 형성된 특권적 매점상업의 한 형태였다.0799) 姜萬吉, 위의 책, 171쪽.

 이처럼 시전의 금난전권이 확대되어 감에 따라 새로이 생겨나는 시전도 증가하게 되었고 시전상인들이 취급하는 물종도 다양해져 갔다.≪萬機要覽≫에 따르면, 국역의 의무를 지는 有分各廛으로 線廛(10), 綿布廛(9), 綿紬廛(8), 紙廛(7), 苧布廛(6), 布廛(5), 靑布廛(5), 內魚物廛(5), 外魚物廛(4), 生鮮廛(3), 煙草廛(3), 雜穀廛(3), 上米廛(3), 下米廛(3), 床廛(2), 綿子廛(2) 등 37개의 시전이 있었다.0800) ( ) 안의 숫자는 국역을 100으로 했을 때 부과된 할당 비율을 의미한다. 즉 선전의 경우 10/100에 해당되는 국역을 부담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또한 국역의 부담을 지지 않는 無分各廛이 채소전, 刀子廛, 雜鐵廛, 鹽廛, 木器廛, 針子廛, 簇頭里廛, 種子廛 등 50여 개에 이르고 있었다. 이들 시전은 도성내뿐만 아니라 남대문밖·龍山·마포·서강 등 성밖에도 존재하고 있었다.

 시전상인들은 금난전권을 이용하여 특정한 상품을 독점적으로 매점, 시세의 차이를 보아 매각함으로써 상당한 상업적 이익을 누리고 있었다. 백성들의 생활필수품 가운데 하나였던 소금의 경우 염전인이 이익을 독점하는 까닭에 魚鹽船商들이 실업할 지경이라든가0801)≪備邊司謄錄≫127책, 영조 30년 9월 15일. 가격이 전보다 5∼7배나 뛰었다는 이야기0802)≪備邊司謄錄≫151책, 영조 44년 2월 5일. 등은 시전상인들의 독점적 매매와 그에 따른 이윤의 수취를 말해 주는 좋은 예일 것이다. 유푼각전으로서 1푼의 의무를 지고 있던 內長木廛이라든가 門外長木廛·條里木廛 등의 시전도 목재 판매의 독점권을 쥐고 뚝섬 등지에 집하되는 목재를 매집, 소비자에게 매각함으로써 목재와 관련된 상업적 이익을 전유하고 있었다.

 시전상인들은 그들만이 지니고 있던 금난전권의 적용 범위를 이미 상품화된 물품에만 그치려 하지 않았다. 즉 가공상품의 원료에 대해서도 금난전권을 발동, 원료를 매개로 상품을 생산하고 있던 수공업자들을 자신들에게 예속시키려 하였던 것이다. 육의전이면서 국역의 부담이 가장 많았고, 또한 그만큼 영업규모가 컸던 선전이 휘양을 만들어 팔고 있던 毛衣匠을 고발하였던 것은0803)≪備邊司謄錄≫163책, 정조 5년 11월 12일. 휘양의 재료에 선전이 취급하는 물종인 비단이 들어가기 때문이었다. 이 사건은 모의장이 비단으로 휘양을 제조하는 것 자체를 위법으로 규정함으로써 결말을 보게 되었지만, 궁극적으로는 시전상인들이 수공업자의 생산품에 대하여 전매권을 확보하고 그것을 매점하여 수공업자와 소비자를 격리시키고자 한 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즉 시전상인들은, 장인은 물건을 만들고 전인은 장인에게서 그 물건을 사서 상품화하는 것이 법칙인데, 만약 장인이 스스로 시전을 개설하면 전인은 상품을 구할 수가 없어 모두 파산하게 된다면서 장인이 제조한 물품의 판매권을 독점하고자 하였던 것이다.0804) 최완기,≪조선시대 서울의 경제생활≫, 서울시립대 서울학연구소, 1994), 55쪽. 이후 시전상인들은 수공업자들의 제품판매를 난전으로 규정하고, 그 물품을 저가에 매점해 나갔다. 도자장이 장도를 만들어 팔면 도자전에서, 驄匠이 말총제품을 만들어 팔면 상전에서, 가칠장이 소반을 만들어 팔면 칠목기전에서, 冶匠이 철물을 만들어 팔면 잡철전에서 난전이라 고발하여 그 물건들을 매점, 폭리를 취했던 것이다.0805) 崔完基, 위의 책, 63쪽.

 위와 같은 시전상인의 금난전권 행사는 도시의 영세상인들은 물론 소비자들에게도 커다란 문제를 던져주었다. 도시민의 생활용품의 대부분이 시전의 전매품이 됨에 따라 물가가 앙등하게 되어 도시민의 생활에 큰 지장을 주게 된 것이다. 또한 민간수공업자나 소상품생산자들 역시 이들의 원료품과 생산품이 시전의 금난전권으로 말미암아 직접적인 자유 매매가 저지되어 커다란 타격을 입게 되었다. 이에 따라 도시의 영세상인층과 소비자·민간수공업자들의 금난전권에 대한 반발과 저항이 거세지기 시작하였다. 이들의 움직임은 결국 시전상인의 금난전권 행사와 정부의 상업정책에 적지 않은 변화를 가져오게 하는 계기로 작용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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