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1. 상인층의 성장과 도고상업의 전개
  • 2) 사상도고의 활동
  • 다. 상품생산지 및 집산지에서의 사상도고의 활동

다. 상품생산지 및 집산지에서의 사상도고의 활동

 사상도고중에는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서울과 그 외곽지대에서 활동하면서 시전상인의 상권을 위축시키고 상업계의 새로운 주역으로 떠오른 사람들도 있었지만, 상품생산지와 집산지를 주무대로 전국적인 범위에서, 나아가 대외무역에 종사하면서 도고상업을 벌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상인들은 누구보다도 일찍부터 행상활동을 벌이면서 전국적인 유통망을 형성하고 있던 개성상인일 것이다.

 개성사람들은 알려져 있듯이 조선왕조 개창 이래 계속해서 정치적 진출을 차단당하고 있었고 지역적 차별을 받아 왔다. 군인의 習操時 행상이 많은 지역 사정을 고려하여 춘추로 시행토록 되어 있는 다른 지역과 달리 연 1회만 실시하는 행정적 특례를 적용받았다고는 하여도,0919)≪承政院日記≫939책, 영조 17년 12월 25일. 이들이 받아야 했던 정치적 차별과는 비교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활로를 경제적 진출에서 찾게 되었고, 스스로를 결속시키면서 여느 도시와는 다른 독특한 도시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었다.0920) 吳 星,<韓末 開城地方의 戶의 構成과 戶主-南部 都助里 戶主의 職業分布와 관련하여->(≪李基白先生古稀紀念 韓國史學論叢≫下, 一潮閣, 1994), 1708쪽. 양반관료로서의 출세보다는 대자본을 소유한 物主·錢主가 되는 것이 대부분 개성사람들의 소망일 정도였다.

 개성상인들은 왕조 초기부터 행상에 나서고 있던 까닭에 전국의 상품생산지와 집산지를 연결할 수 있는 조직적 연락망과 유통망을 지니고 있었다. 松房이라는 지점망을 형성할 수 있었던 것도 그와 같은 장기간에 걸친 상업활동의 결과였다. 개성의 富商들은 대개 그들의 差人을 전국 각지의 상업중심지에 파견하여 송방이라는 지점을 설치해 놓고 각지의 상품생산과 가격의 동향을 파악하여 매점·판매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일제시대의 경우이기는 하지만 개성에서 지방으로 出商하는 4,000∼6,000명 정도 가운데 절반은 자영업자이고 나머지 절반은 송방에 파견되는 차인들이었던 것으로 미루어 보면,0921) 吳 星, 위의 글, 1725쪽 주 33). 송상의 상업조직의 규모가 대략 짐작 간다.

 개성상인의 도고활동 대상으로는 우선 포물류를 들 수 있다. 이들은 원산에 근거지를 두고 서울로 반입되는 포물을 중간에서 매점하여 가격을 조종하여 시전인에게 큰 타격을 주고 있었다.0922)≪備邊司謄錄≫201책, 순조 11년 3월 19일. 또한 평안도와 황해도지역의 목면을 매집하기도 하였으며,0923)≪備邊司謄錄≫206책, 순조 17년 11월 11일. 경기도지방은 물론 멀리 경상도지방까지 그들의 활동범위에 넣어 포물을 교역하였다.

 개성상인의 도고상업은 凉臺(갓) 교역에서도 두드러졌다. 제주도에서 대량 생산된 양대는 康津과 海南 등지를 거쳐 중간상인의 손에 의해 서울의 양대전에서 판매되고 있었다. 그러나 19세기에 들어와 개성상인들이 강진·해남에 진출하여 제주도의 양대를 매점, 전국 각 지역에 판매함으로써 서울의 시전이 물품을 구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0924)≪備邊司謄錄≫200책, 순조 10년 정월 10일. 앞서의 포물 교역이나 양대의 매점과 판매 모두 송방이라는 전국적 상업조직에 바탕을 두었음은 물론이다.

 포물과 양대 교역에서의 개성상인의 도고상업에 대하여 언급하였지만, 개성상인이 취급하였던 물품 가운데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졌던 것은 어느 무엇보다도 인삼이었다. 오래 전부터 신비의 靈藥으로 인식되어 온 인삼은 국가에 의해 철저히 보호받던 귀중품으로서 수출 금지품으로 지정되어 있었다. 인삼상인은 누구나 호조와 관서, 송도 등지에서 帖文을 받아야만 인삼의 매매가 가능하였다.0925)≪備邊司謄錄≫59책, 숙종 34년 3월 29일. 또한 인삼상인은 당시 최대의 자연삼 산지였던 江界에 들어가기 전 강계부에 1/10세를 선납해야 했으며, 입거한 다음에는 관에 첩문을 올리고, 관은 이를 일일이 살펴 成冊토록 되어 있었다.0926)≪增補文獻備考≫권 132, 刑考 6, 숙종 14년 江界禁蔘節目. 뿐만 아니라 산지민과의 거래에도 일정한 한도가 있었으며, 京人에게 1근 이상을 매각할 경우에는 매매자를 반드시 관에 보고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를 어길 경우에는 潛商으로 간주되어 처벌되었다. 인삼상인은 국가의 철저한 통제와 엄격한 규제에 놓여 있었다.0927) 吳 星, 앞의 책, 24∼30쪽 참조.

 이와 같은 국가의 금삼정책이 제대로 지켜졌다면 인삼의 매매는 극히 소량에 그쳐야 하였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倭館을 통한 일본과의 무역에서 인삼은 가장 많은 商利를 남길 수 있는 품목이었고, 일본으로부터의 수요도 매우 높았다. 인삼은 중국산 白絲와 더불어 이 시기 대외 중개무역을 성행케 한 중요한 물품이었다.0928) 金鍾圓,<朝鮮後期 對淸貿易에 대한 一考察-潛商의 貿易活動을 중심으로->(≪震檀學報≫43, 1977). 특히 17세기 중엽 이후 인삼에 대한 인식이 보편화되어 가면서 일본으로부터의 수요는 폭발적인 증가 현상을 보였다.0929) 姜萬吉, 앞의 책, 120쪽.
吳 星, 앞의 책, 33∼35쪽.
―――,<朝鮮後期 人蔘貿易의 展開와 蔘商의 活動>(≪世宗史學≫1, 1992), 29∼34쪽.

 인삼상인은 점차 국가의 규제와 통제를 피해 잠상화되기 시작하였고, 이러한 상인들 가운데 대표적인 사람들이 바로 개성상인이었다. 인삼잠상은 모두 송도인인데 蔘權과 8包가 모두 松都富人에게 돌아갔다는 말0930)≪承政院日記≫918책, 영조 16년 8월 5일.을 들어보아도 개성상인과 인삼매매와의 관계가 어떠하였는가를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개성상인이 얼마만큼 활발하게 인삼매매활동을 벌이고 있었는가는, 京外의 蔘路가 모두 끊긴 것은 관서와 송도의 잠상 때문이라는 이야기0931)≪承政院日記≫889책, 영조 15년 4월 23일.에서도 짐작된다. 인삼무역의 주도권을 장악한 개성상인들은 인삼의 판매처인 동래의 상인 및 역관들과 결탁되어 있었으며, 京商·安州상인, 강계의 삼상 등 각지의 상인들과도 연결하여 인삼 밀매에 나서고 있었다.0932) 吳 星, 앞의 책, 40∼43쪽. 자연삼이 주였던 이 시기의 對日 인삼무역은 개성상인의 주도하에 18세기 중엽까지 약 1세기 가량 전개되었다.

 개성상인들의 활동과 자본 집적은 대일 인삼무역이 가장 큰 요소로 작용하고 있었지만, 이들은 義州상인과도 연결하여 對淸무역과 관련된 국내 상품의 도고활동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즉 개성상인들은 종래 공인들의 전유물처럼 되어 있던 동해안의 水獺皮를 獵夫들에게 미리 값을 지불하고 물품을 확보하는 선대제적 지배를 통하여 수달피를 매점, 중국에 수출함으로써 이윤을 취득하였을 뿐만 아니라, 공인의 물품 구입에 타격을 주어 상세를 크게 위축시켰다.0933)≪備邊司謄錄≫168책, 정조 10년 정월 5일. 개성상인과 의주상인이 부상대고 등과 결탁하여 수달피를 다량으로 매점하여 중국에 수출하는 까닭에 狗皮契貢人들이 方物用 수달피를 구할 수가 없는 실정이라는 말0934)≪日省錄≫정조 16년 11월 20일.에서도 짐작되듯이, 공인을 제압하고 국내의 수달피시장의 상권을 장악해 나갔던 것이다.

 이처럼 개성상인들은 국내의 각 상품생산지와 집산지를 우세한 상업조직망과 자본력을 바탕으로 장악해갔으며, 동래상인과 의주상인을 조종하여 대일무역과 대청무역에서 주도권을 행사하고 있었다.0935) 姜萬吉, 앞의 책, 122쪽. 이와 더불어 개성상인들은 수달피시장의 예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관상도고의 상권을 제압하면서 국내시장의 상품유통권을 장악해 나가는 동시에, 청·일본 간의 중개무역을 주도하면서 여기에서 얻어지는 상업적 이윤의 획득을 통하여 자본을 축적해 나갔다.

 한편 18세기 중엽 이후 자연삼이 絶種되고 대일무역도 쇠퇴하게 되자 개성상인들은 또 다른 영업 활로를 모색하게 되었다. 그것은 인삼의 인공재배와 가공을 통한 대청무역에의 종사였다. 더욱이 18세기 중엽부터 청국 내에서는 자국의 蔘種이 고갈되어 가고 있었고, 이에 따라 청인이 인삼 채취를 위해 조선으로 犯境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던 형편이었다.0936)≪萬機要覽≫財用編 4, 江界蔘把. 이러한 시기에 조선에서는 인삼이 인공으로 재배되어 점차 확산되어 가고 있었다.0937) 인삼의 인공재배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이 참고된다.
姜萬吉, 앞의 책, 123∼124쪽.
吳 星, 앞의 책, 48쪽.
―――, 앞의 글(1992), 42∼48쪽.
재배삼의 보급과 확산은 청국이라는 거대한 인삼시장의 존재와 결합되어 개성상인을 비롯한 인삼상인으로 하여금 대청 인삼무역을 전개시켜 나갈 수 있는 확실한 바탕을 제공하게 되었다.

 개성인들은 蔘圃를 설치하여 대량으로 인삼을 재배하기 시작하였고, 그 결과 개성은 대표적인 인삼 생산지로 떠오르게 되었다. 인삼을 홍삼으로 가공하는 蒸包所가 개성에 설치되게 되었고, 청국으로 수출되는 包蔘額이 급격히 증가하면서 개성상인의 삼포 및 증포소 경영도 더욱 활기를 띠어 갔다. 정조 21년(1797) 120근이었던 포삼액은 그 후 급증되어 철종 2년(1851)에 와서는 무려 40,000근으로 증가되었다.0938)≪中京誌≫권 2, 土産. 이러한 과정에서 개성상인들은 의주상인과 결탁하여 대청 홍삼수출권을 쥐게 되었다. 즉 의주상인이 包蔘別將을 담당하였고, 개성상인은 포삼주인, 즉 包主로서 청나라에 수출하는 인삼의 조달을 맡았던 것이다.0939) 姜萬吉, 앞의 책, 127쪽.
吳 星, 앞의 글(1992), 53쪽.

 하지만 개성상인들의 보다 큰 자본 집적의 배경은 공식적인 포삼수출보다 홍삼의 밀조와 밀수출에 있었다. 밀삼의 수출이 성행하게 된 것은 정부가 허가하는 포삼액으로는 청국의 수요를 충족시킬 수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개성인들이 밀매하는 홍삼가가 포삼가의 1/3에 지나지 않는 염가였기 때문이다. 정부가 홍삼의 밀조와 밀수출을 금단하려 했지만, 송상의 홍삼 밀조·밀매는 더욱 보편화되어 갔다. 육로에서의 취체가 심해지면 해상에서 조직적으로 밀매가 행해졌다.0940)≪松營啓錄≫고종 원년 6월 9일 갑자.
≪右捕盜廳謄錄≫15책, 신유 11월 10일.

 개성상인이 대량으로 인삼을 재배하고 가공할 수 있었던 것은 개성의 토양과 기후가 인삼재배에 적합한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재배삼 출현 이전부터 개성상인들이 인삼의 국내외 상업의 주도권을 가지고 상업자본을 집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0941) 姜萬吉, 앞의 책, 132쪽. 또한 18세기 중엽 이후 인삼의 인공재배에 따른 상품생산과 판매의 확대는 기왕에 축적되어 있던 개성상인의 자본이 상업자본으로부터 산업자본으로 전화되어 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보다 주목되어야 할 것이다. 19세기 말엽 개성지방의 1,000간 이상의 대규모 삼포가 상인이나 농업자본가들에 의해 추진되고 있던 사실들은0942) 洪淳權,<한말시기 開城地方 蔘圃農業의 전개양상(上·下)>(≪韓國學報≫49·50, 1987·1988).
吳 星,<韓末 開城地方의 蔘圃主>(≪古文書硏究≫3, 1992) 참조.
개성상인들이 인삼재배에 성공한 뒤 지속적인 성장을 이루어 온 결과였다.0943) 李泰鎭,<國際貿易의 성행>(≪韓國史市民講座≫9, 一潮閣, 1991), 83쪽. 인삼재배와 가공이라는 개성상인에 의한 농업분야에서의 산업자본주의화는 개성상인 자체의 성장이라는 차원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조선 후기 사회경제의 역사적 성과물의 하나로 보다 적극적인 평가가 요망된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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