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2. 상품의 유통
  • 2) 포구상업의 발달
  • (3) 외방포구의 상업발달

(3) 외방포구의 상업발달

 포구상업의 발달에 따라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에 걸쳐서 해상이나 강상교통의 요지에 포구를 신설하거나 또는 폐기되었던 포구를 다시 설치하고, 동일한 항만에 선박의 접안시설을 증설하는 사례가 늘어나게 되었다. 이 사업에는 축항사업, 준설 또는 암초제거사업 등이 병행되었으므로 막대한 자금과 인력이 동원되었다. 이러한 사업에 투자하는 자들은 대부분 포구 주위의 재력가들이었다. 대규모 자본을 투자하는 사업은 중앙정부나 지방권력의 용인하에 이루어지고 있었다. 관청에서는 이들에게 포구에서 독점적으로 상품유통을 담당할 수 있는 권리인 浦口主人權을 인정하였다. 포구주인층이 막대한 자금을 투자하는 이유도 바로 상품유통의 독점권을 이용한 이익을 얻기 위해서였다.

 이들 포구주인층들은 자신이 설치한 포구에 상선들이 많이 드나들어야 이익을 크게 남길 수 있었으므로 적극적으로 선상을 유치하고자 노력하였다. 이와 같은 노력에 의하여 신설포구들도 이전부터 발달했던 대포구와 마찬가지로 상업중심지로 변모하였고, 그 결과 18세기 이후 포구는 장시와 더불어 대표적인 상업중심지로 성장할 수 있었다.

 조선 후기 포구상업의 발전으로 대포구와 그 주변의 소포구, 그리고 장시를 연결하는 유기적 유통권이 형성되었다. 대포구 주변의 소포구들은 대체로 대포구의 시장권 안에 포섭되면서 발전하였다. 예컨대 江景浦는 전라도와 충청도의 평야과 바다를 연결하는 대포구였으며, 그 주위에 論山浦, 臨陂의 西浦·羅浦, 咸悅의 熊浦, 龍安의 黃山浦와 礪山의 羅岩浦 등이 강경포의 영향력 아래서 발전하였다.0984) 李榮昊,<19세기 恩津 江景浦의 商品流通構造>(≪韓國史論≫15, 서울大, 1986). 이처럼 강경포의 영향력 아래서 발전하고 있었던 소포구들은 19세기 중엽 이후부터 점차 성장하여 강경포로 가는 선박을 자신의 포구로 유치함으로써 강경포의 상대적인 쇠퇴를 초래하고 있었다. 이제 대포구와 소포구 사이에 상선을 유치하기 위한 경쟁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강경포의 경우 각종 궁방이나 지방권력, 그리고 주인층의 침탈로 인하여 대부분의 선상들이 기피하는 바가 되었으며, 소포구의 포구주인들은 이를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선상들을 끌어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대포구와 소포구 사이의 상선유치경쟁은 강경포만이 아니라 원산포 주위에서도 나타났으며, 다른 소포구들 사이에서도 나타나고 있었다.0985) 高東煥, 앞의 글(1985), 297∼303쪽.

 이와 같이 19세기 포구상업은 포구와 포구 사이의 시장권대립이라는 형태를 취하면서 포구간의 경쟁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이러한 포구 사이의 상선유치경쟁은 조선사회 내에서의 상품화폐경제의 성숙도를 나타내는 징표라고 보여진다. 대포구가 지역간 상품유통의 중심기능을 담당하였다고 한다면, 소포구는 지역내 상품유통의 중심지로서 기능하였다고 볼 수 있다. 소포구의 발전은 당시 5일장으로 체계화되고 있었던 장시와의 유기적 연계망을 형성함으로써 지역내 시장권의 토대를 구축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처음에 대포구에 종속되어 있는 소포구가 대포구의 시장을 잠식하면서 새로이 성장하였다는 사실은 지역내 시장의 충분한 발전을 반영하는 것이었다고 하겠다. 지역내 시장은 조선 후기 이래 사회적 분업의 발전에 따라 시장을 향한 생산을 추구하던 소상품생산자 양성의 토양이었다. 다시 말하면 소포구를 중심으로 한 지역내 시장이 지역간 시장의 중심인 대포구와 서로 대립하면서 발전하였다는 사실은 조선 후기 상품화폐경제가 도달한 수준이 점차 우연적이고 계절적인 가격차에 의한 상품유통을 극복하고 소상품생산자를 자립할 수 있게 하는 시장을 지향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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