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3. 금속화폐의 보급과 조세금납화
  • 1) 금속화폐의 보급과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1) 동전유통 정착의 경제적 기반

(1) 동전유통 정착의 경제적 기반

 17세기말에 이르러 명목화폐인 동전이 전국적으로 유통되기 시작하였다. 숙종 4년(1678) 조선봉건정부가 동전유통을 결정한 이래 십수 년이 지나지 않아 동전은 가장 우월한 가치척도·교환수단·지불수단·축장수단, 곧 일반적 等價形態로 정착함으로써 조선 후기 사회경제적 변동에 다대한 영향을 끼쳤다.1020) 조선 후기 화폐유통사 연구성과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이 참조된다.
오미일,<조선후기 상품유통 연구현황>(≪韓國中世社會 解體期의 諸問題≫下, 한울, 1987).
元裕漢,<朝鮮後期의 貨幣經濟發達과 그 影響>(≪朝鮮後期 社會經濟史硏究入門≫, 民族文化社, 1991).
이 시기 이와 같이 동전유통이 급속히 정착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동전을 수용할 수 있는 유통경제적 기반과 함께 동전유통이 불가피하게 요구되는 유통경제적 조건이 조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봉건사회 내에서 명목화폐가 일반화되기 위해서는 자급자족적 생산과 소비형태를 벗어나 시장판매를 목적으로 하는 일정한 농민층의 상품생산과 교환관계의 발달, 어느 정도 안정된 유통기구의 성장과 시장가격의 형성 등이 요구된다. 이러한 기반은 16세기 이래 점진적으로 형성되었고, 17세기 사회적 생산력이 회복되고 발전하는 가운데 한층 확대되었다. 요컨대 그것은 場市의 발달과 이 시기 일반적 등가형태로 기능했던 추포의 광범위한 유통이었다.

 15세기말 호남에서 발생하여 16세기 삼남과 중부지방으로 확산된 장시는 농민·수공업자 등 직접생산자들이 주체가 된 소상품생산의 출현과 이에 따른 교환관계의 진전에 기반을 두고 성립한 農村市場이었다.1021) 李景植,<16세기 場市의 成立과 그 基盤>(≪韓國史硏究≫57, 1987).
李泰鎭,≪朝鮮儒敎社會史論≫(지식산업사, 1989) 제5장.
장시는 15·16세기 科田法·職田法 등 收租權分給制度의 약화·소멸과 사적 토지소유의 안정·강화, 綿業을 중심으로 한 농업생산력의 증대, 이에 따른 소농경영의 성장과 지주제의 발달, 농민층의 토지이탈과 상인화, 인구의 증가, 사회적 분업의 촉진과 민간수공업의 발달 등 상호 유기적으로 연관된 여러 측면의 사회경제적 변동이 그 배경이 되는 가운데 출현하고 확대되었다. 장시는 조세나 지대에 기초하여 형성되는 전형적인 봉건적 교환관계·유통기구와 달리 직접생산자가 잉여생산물을 임의로 처분할 수 있는 경제적 조건 위에서 새로이 성립한 농민적 유통기구이자 몰락농민·소상인들의 資生機構였다. 그러한 전제 속에 향촌의 지주층 또한 지대 처리를 목표로 장시의 상품유통에 참여하였다.

 장시 출현과 발달의 배경이 이러하였기 때문에 유통경제의 독점과 소농민의 안정을 추구하는 봉건정부의「抑末策」에도 불구하고 장시는 계속 확대되어 17세기초 개설이 엄금되던 서울근교와 경기에까지 남설되었다. 봉건관료들 역시 “곳곳에 사사로이 장시가 열리는 것은 끝내 금할 수 없을 것”1022)≪仁祖實錄≫권 21, 인조 7년 9월 을유.이라고 자인하고, 이러한 가운데 농업을 보완하는 의미에서 상업의 성장을 수용하고자 하는「務本補末論」이 대두하였다.1023) 白承哲,≪朝鮮後期 商業論과 商業政策≫(延世大 博士學位論文, 1996) 제2장. 특히 이 때에는 移秧法이 보급되기 시작하고, 면업을 비롯한 상업적 농업의 성장과 함께 농업생산력의 급속한 발달이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농민층의 상품생산과 교환경제는 더욱 활발히 전개되어 한 군현 내에 여러 장시가 5일마다 번갈아 장을 여는 정기 5일장이 보편화되었다. 그리하여 17세기 후반경에는 군현 단위로 엮어진 상설시장권이 중부 이남 곳곳에 형성되었다.1024) 홍희유,≪조선상업사≫(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1989), 349쪽. 봉건정부는 점차 장시의 발달을 현실로 인정하였고 대신 場稅를 수취하여 재정에 충당하였다.

 16·17세기 농민적 상품유통과 교환시장이 성장하고 거래관계가 等價化하는 과정에서는 필연적으로 화폐유통도 발달하여 장시에 조응한 독특한 화폐유통체계가 형성되었다. 곧「麤布流通經濟」의 확립이었다.1025) 方基中,<17·18세기 前半 金納租稅의 성립과 전개>(≪東方學志≫45, 延世大 國學硏究院, 1984), 143∼145쪽. 추포는 의류품으로서의 사용가치를 완전히 상실한 2, 3升의 粗惡綿布로서 오직 화폐로서만 사용된 布貨였다.1026) ‘升’은 면포의 날을 세는 단위로서 ‘새’라 하며, 1升은 80올(縷)의 날로 구성된다. ‘升’數는 면포품질(木品)을 결정하는 기본요소인데, 옷감으로 최소한의 가치를 갖는 목품은 5승포이다. 당초 조선정부가 國幣로서 정한 正布의 품질은 5승 35척이었으나 15세기 후반부터 16세기에 걸쳐 면포를 짧게 잘라서 거래수단으로 사용하는「斷割使用」과 함께 2, 3승의 추포유통이 보편화되었다.1027) 金柄夏,<李朝前期의 貨幣流通>(≪慶熙史學≫2, 1970).
宋在璇,<16세기 綿布의 貨幣機能>(≪邊太燮博士華甲紀念 史學論叢≫, 1986).
일종의 소액 명목화폐로서 유통된 추포는 장시를 중심으로 하는 민간 교환관계에 적합한 화폐였다. 장시의 유통체계가 항상화·등가화하고 있으면서도 그 거래 성격은 아직 농업생산을 보완하고 농민생활을 보충하는 생활필수품의 소규모거래가 일반적이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추포는 농민에 의해 직접 직조되고 저열한 면직조건에서도 쉽게 생산할 수 있었기 때문에 농민층이 주도하는 장시의 교환수단으로서 급속히 확대되었다. 추포의 이러한 성격과 관련하여 17세기 전후하여 빈민층이 증가하고 비특권적 소상업이 서서히 형성되고 있었던 서울 변두리나 전통적으로 상업이 발달한 開城·平壤 등지에서도 추포가 일반적인 가치척도·교환수단으로 광범하게 유통되었다.

 추포유통경제는 부세체계의 변동과도 관련하여 확립되고 있었다. 즉 16세기에는 貢納 및 身徭役 등 각종 부세가 면포수취로 전환되고 貢物防納이 발달하는 등 부세수취에서의 대규모 면포징수가 진행되었는데,1028) 田川孝三,≪李朝貢納制の硏究≫(東洋文庫, 1964).
李泰鎭,<近世朝鮮前期 軍事制度의 동요>(≪韓國軍制史≫朝鮮前期篇, 陸軍本部, 1968).
李智媛,<16·17세기 前半 貢物防納의 構造와 流通經濟的 性格>(≪李載龒博士還曆紀念 韓國史學論叢≫, 1990).
농민층·피지배층은 이에 대한 하나의 저항수단으로서 추포를 조세지불수단으로 활용하였다. 사용가치가 상실된 추포는 봉건정부 입장에서는 쓸모없는 것이었지만 농민층은 이를 교환수단뿐만 아니라 조세지불수단으로까지 확대시켜 나갔다. 요컨대 추포는, 효종 2년(1651) 金堉의 주도로 동전유통을 위해 추포유통을 금지시켰을 때 이를 반대한 남인관료 洪宇遠의 다음 언급과 같이, 유통경제 전반에 걸쳐 일반적 등가형태로서 기능하고 있었다.

麤木이 통용된 지 오래되어 近中外에 모두 사용되고 있는데 지금 이를 금하면 이는 그 貨泉의 근원을 막는 것입니다.…무릇 추목은 국가에서 볼 때 실로 無用한 것이나 農工이 이를 사용하여 교역을 하고 商賈가 이를 사용하여 재물을 불릴 뿐 아니라 養生送死나 租賦와 徭役을 바치고 모든 일상용품을 구하는데 모두 추목으로 取辦하니 그 무용함이 유용함이 되는 것이 크다고 하겠습니다.…그리하여 추목 禁令이 행해진 후 場市가 크게 동요하고 인민들이 놀라고 두려워하고 있으며…상고가 실업하고 물화가 모이지 않아 市가 비고 稀疎한 기상이 쓸쓸합니다(洪宇遠,≪南波先生文集≫권 4, 疏 應旨封事).

 이와 같이 16·17세기에는 농민층·소상인이 주도하는 교환시장과 화폐유통이 전개되어 동전유통이 정착할 수 있는 기반이 형성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실학자 柳馨遠은 “지금 추포가 교역되고 있는 것을 보면 동전은 의심할 바 없이 통용될 것”1029) 柳馨遠,≪磻溪隨錄≫권 8, 田制後錄攷說 下.이라고 확신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7세기 중반까지 동전유통이 실현되지 못한 것은 동전 원료 부족에도 원인이 있었지만 주로 정부의 고식적인 화폐정책 때문이었다.1030) 元裕漢,<朝鮮後期 金屬貨幣流通政策>(≪東方學志≫13, 1972).
宋贊植,≪李朝의 貨幣≫(한국일보사, 1975) 제1장.
봉건정부는 추포유통의 기반과 그 의미를 적절히 수용하지 못하고 기존 봉건적 유통기구에 의존하여 동전유통을 재정보전의 한 방편으로 삼는 조선 초기 이래의 화폐정책을 반복하였다.

 그러나 17세기 중엽을 전후하여 추포의 화폐 기능이 약화되는 조건이 형성되면서 추포유통은 한계를 맞이하였다. 그 조건은 크게 두 측면에서 조성되었다. 우선 봉건정부의 재정정책·부세정책과 관련하여 추포의 조세지불수단 기능이 급속히 약화되었다. 17세기 이후 봉건정부는 국가재정 악화를 타개하기 위한 한 방편으로 재정 악화에 일익을 담당하고 있는 추포의 조세지불 기능을 배제하고 良布 징수를 강화하였다. 추포에 대응하여 봉건정부가 통제할 수 있는 새로운 명목화폐를 창출하지 못한다면 다른 유일한 대책은 조세에서라도 양포수탈을 강화하는 방법뿐이었다.1031) 농민에 의해 화폐가 직접 직조되고 유통되는 추포경제하에서는 ‘貨權在上’이라는 봉건적 화폐정책 원리는 무의미하였고, 이러한 화폐통제력 상실과 추포의 조세지불수단화는 그대로 국가재정 악화와 직결되는 것이었다. 여기에 방납의 발달이 재정악화를 가중시켰다. 봉건정부는 이에 대해 세 가지 타개방안을 추구하였다. ① 공납제 개혁(대동법), ② 동전유통의 시도, ③ 포납의 확대와 양포수탈의 강화 등이 그것이었다. 대동법은 17세기 전반부터 경과적으로 구체화된 반면 동전유통은 계속 실패하였고, 이러한 가운데 부세에서의 양포수탈이 급증하였다(方基中, 앞의 글, 145∼156쪽). 그리하여 17세기 중반 이후 양포수탈이 일약 사회문제로 등장한 바와 같이, 조세부담자·농민층은 면포로 납부해야 하는 조세의 경우 대부분 法定布貨 木品(5승 35척)보다도 고급인 6∼8승의 면포를 강요당하였고, 조세부담은 크게 증가하였다. 양포수탈은 17세기 후반 삼남지방에서 大同法 실시가 완료되고 군역의 군포제가 정리되는 등, 이른바「國家綿布收取體系」가 전면적으로 확립되는 가운데 절정에 다다랐다.

 이와 더불어 화폐로서 갖는 추포의 한계 역시 심화되었다. 추포는 일반적 교환수단·가치척도로서 유통되었지만 國幣로 인정받지 못하고 오히려「法貨」와 대립하는 취약성을 안고 있었다. 또 명목화폐의 기능을 발휘하면서도 그 본질은 사용가치를 상실한 물품화폐였다. 요컨대 추포는 화폐축장 기능을 결여한, 16세기 농업생산력 수준과 유통경제 수준에 조응하여 발달한 민간화폐였다. 따라서 추포는 농업생산력과 유통경제가 발달할수록 불완전한 명목화폐로서의 한계를 드러내지 않을 수 없었다. 17세기 이후 그러한 조건은 농업생산과 유통경제의 양면에서 형성되었다. 특히 후자와 관련해서는 대동법의 실시와 함께 도시상업이 발달하고 서울·지방을 막론하고 비특권상인인 私商이 크게 성장하였다. 對外貿易·潛商·船商活動 등을 통하여 대규모 상업자본을 형성한 사상은 점차 장시와 상품생산지와의 연계를 강화하면서 지방 시장권에 적극 진출하기 시작하였다.1032) 柳承宙,<朝鮮後期 對淸貿易의 展開過程>(≪白山學報≫8, 1970).
姜萬吉,≪朝鮮後期 商業資本의 發達≫(高麗大 出版部, 1973).
高東煥,≪18·19세기 서울 京江地域의 商業發達≫(서울大 博士學位論文, 1993).
교환거래의 규모가 점차 확대되고 상인들의 자본축적 활동이 활발해지는 가운데 추포의 기능과 역할은 축소되어 갔다.

 이와 같이 17세기 중엽을 전후하여 양포수탈이 극대화하고 유통경제가 전반적으로 발달하는 과정에서 추포유통은 현저히 위축되었다. 대신 “근년 이래 추목이 단절되고 公私百物의 매매가 오로지 銀貨에 의존하여 柴炭·菜蔬같은 微物도 반드시 은화가 있어야 교역할 수 있다”1033)≪備邊司謄錄≫34책, 숙종 4년 윤3월 24일.라는 말과 같이, 일시적으로 은화유통이 급증하였다. 그러나 당시 대외무역의 특성과 관련하여 다량의 국내은화가 중국에 유출되었고 이 때문에 서울을 중심으로 유통시장에는 심각한「銀貴」현상이 나타났다. 17세기 후반의 유통경제적 조건은 법화로서 추포에 대신할 수 있는 새로운 소액 명목화폐의 출현을 불가피하게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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