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3. 금속화폐의 보급과 조세금납화
  • 1) 금속화폐의 보급과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2) 17세기말∼18세기 중엽 금속화폐의 유통

가. 숙종대의 동전유통정책

 숙종 4년(1678) 정월 봉건정부는 호조·진휼청·상평청 등 중앙 7개 아문에서 일제히 동전을 주조하여 전국에 유통시킬 것을 결정하였다. 이 때 주조된 동전이 葉錢으로 불리는 常平通寶였다.1034) 동전 1개의 액면가치는 1文이며, 10문은 1錢, 100문은 1兩이다. 그리고 그 해 윤3월에는<行錢節目>을 마련하고 4월부터 정식으로 동전을 법화로 사용할 것을 결정하였으며, 6월에는 평안도와 전라도의 감영·병영에서도 주전하도록 하였다. 이 때의<행전절목>은 효종연간에 시행하였던 行錢策을 바탕으로 작성된 것이었다. 그 주요 원칙은 ① 동전가치를 銀價를 기준으로 정하여(銀錢相準) 동전 400文(4兩)을 은 1냥으로 折定하고, ② 市廛을 동전유통의 기반으로 삼아 市廛出物은 반드시 동전으로 上下하며, ③ 부세의 代錢納(作錢)은 各樣贖木과 賑恤廳 還上만 허용한다는 것 등 크게 세 가지였다.1035)≪備邊司謄錄≫34책, 숙종 4년 윤3월 24일.
숙종대의 동전유통정책에 대해서는 元裕漢,≪朝鮮後期貨幣史硏究≫(韓國硏究院, 1975);宋贊植, 앞의 책, 제2장 참조.

 이같은 동전유통 원칙은 기존의 고식적인 화폐정책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었다.「銀錢相準」의 원칙과 어용상인 중심의 행전책은 동전유통을 추포에 기반을 둔 지방 장시망과 연계시키기보다 주로 특권상업이 발달한 은화통용지역에 한정하고 은가를 기준으로 동전가치를 정해 주전이익을 보장받기 위한 것이었다. 동전에 대한 불신은 자연히「銀貴錢賤」현상과 서울에서의 동전적체 현상을 심화시켰고, 동전의 실제 가치는 은 1냥 대 동전 800문까지 폭락하였다.1036)≪承政院日記≫272책, 숙종 5년 9월 13일. 유통 초기의 일시적 현상이라 하더라도 이는 정책의 한계로부터 발생하는 문제였기 때문에 봉건정부는 동전유통 정착을 위해 적극적인 대책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봉건정부의 초기 동전유통정책의 중요한 전환점이 된 것은 숙종 6년(1680)에 단행한「은전상준」원칙의 폐기였다.1037)≪肅宗實錄≫권 9, 숙종 6년 5월 신해. 이는 정부가「은전상준」을 통한 주전이득을 포기하고 동전을 명실공히 법화로 삼는 조치였고, 동시에 동전유통의 경제적 기반을 지방 장시권으로 확대시킨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 조치 이후 동전유통의 확대를 위한 여러 작업이 추진되었다. 우선 동전유통의 기반을 장시까지 확대한 이상 삼남에서의 동전유통을 적극 추진하여 추포유통을 구축시키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정부는 숙종 7년부터 주전사업을 본격화하여 숙종 23년에 이르기까지 중앙과 지방에서 지속적으로 대량의 주전사업을 벌여 나갔다. 각 아문과 군문들은 재정을 보충하기 위한 목적에서도 주전을 도모하였다. 더욱이 이 때에는 私貿易을 통해 다량의 日本銅이 수입되었기 때문에 동전의 원료난도 크게 해소되었다.1038) 元裕漢, 앞의 책, 35∼36쪽.

 17세기말 이와 같이 동전발행이 급증하는 가운데 추포유통이 위축되어 있는 유통경제 현실과 관련하여 동전의 유통범위는 급속히 확대되었다. 물론 그 정착과정에서는 동전관리체계가 확립되지 못한 데 따라 여러 문제가 발생하였다. 짧은 시기에 다량의 동전이 발행됨으로써 동전가치가 안정되지 못하였고, 특히 주전이익을 증대하기 위한 동전의 惡鑄와 불법적인 私鑄(盜鑄) 행위가 이를 더욱 부추겼다. 정부는 이를 막기 위해 동전주조관리의 획일화를 모색하고 私鑄에 대한 처벌규정을 강화해 나갔지만 큰 효과를 보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폐단에도 불구하고 동전은 대체로 숙종 15년을 지나면서 일반적 등가형태로 정착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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