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3. 금속화폐의 보급과 조세금납화
  • 2) 조세금납화와 봉건적 수취체제의 해체
  • (3) 19세기 전반 화폐수탈의 급증과 사회적 모순의 심화

가. 법외적·지방적 동전수탈의 급증

 18세기말을 분기로 19세기에 접어들면서 국가가 공인하는 상납조세의 금납은 한계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러한 금납 추이가 당시의 실제 조세수취의 실상을 반영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19세기 이후 향촌에서는 합법적 조세금납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대규모의 비합법적·지방적 형태의 동전수탈이 진행되었다. 그것은 稅目에 따라 각기 독특한 형태를 취하며「三政」은 물론 雜役稅에 이르기까지 모든 조세 영역에서 발달하였다. 전결세와 군역세에서의 代錢防納·都結·私募屬, 환곡에서의 還耗作錢, 그리고 잡역세에서의 殖利 등이 그 대표적인 예였다.1108) 이하 方基中, 앞의 글(1990) 참조.

 대전방납은 향촌의 吏胥輩가 서울 役員이나 倉吏·營吏 등과 결탁하여 중앙상납 조세를 미곡이나 면포 대신 동전으로 징수한 뒤 서울·조창·포구 또는 장시의 상인으로부터 미곡과 면포를 구입하여 중앙에 납부하고 이로부터 생기는 이득을 챙기는 조세청부이자 모리행위였다. 상납조세 전반에 걸쳐 무차별적으로 전개된 대전방납은 18세기말 이미 커다란 사회문제가 되었고, 19세기 이후 더욱 일반화되었다. 경기도·황해도는 서울이나 근교에서「貿米上納」하고 삼남은 주로 조창과 포구를 이용하였으나, 방납이 일반화되면서 서울까지「무미」영역이 확대되었다. 결세미 방납만큼 규모가 크고 조직적이지는 못했지만 상납 면포의 방납도 성행하였다. 특히 정조 9년 군포수봉법 개정 후 면포의 대전방납이 급증하였다.

 대전방납을 주도하는 주체는 말단 수세실무자, 특히 향촌의 이서배·戶首輩들과 미곡·면포유통을 장악하고 있는 상인들이었다. 그러나 방납이 조직적으로 발달할 수 있었던 것은 조세부담자·농민층도 일정하게 방납을 수용하고 이에 협조하였기 때문이다. 방납이 성행하면서 야기된 문제는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일시에 이루어지는 대량의 貿米가 만성적인 미가등귀(穀荒)를 초래하여 서울과 조창 등지의 미곡유통구조를 크게 악화시키고 있는 점이었다. 다른 하나는 조세부담과 직결되는 방납가문제였다. 18세기말 방납가는 세미 1석당 10냥 이상, 군보미 6두당 6∼7냥, 군포 1필당 4∼5냥 등 법정 작전가의 2∼3배에 이르고 있었다.

 都結은 방납이 향촌의 일반적 징세관행으로 자리를 잡아가면서 나름대로의 운영체계를 갖추어감에 따라 성립되었다. 19세기초에 나타나기 시작한 도결은 순조 후반경 전국 각지로 확산되었고, 헌종·철종연간에는 전결세와 도결이 동의어로 사용될 만큼 보편화되었다.1109) 도결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이 참조된다.
安秉旭,<19세기 賦稅의 都結化와 封建的 收取體制의 解體>(≪國史館論叢≫7, 1989).
鄭善男,<18·19세기 田結稅의 收取制度와 그 運營>(≪韓國史論≫22, 서울大, 1990).
高錫珪,≪19세기 鄕村支配勢力의 변동과 農民抗爭의 양상≫(서울大 博士學位論文, 1991).
高東煥,<19세기 부세운영의 변화와 그 성격>(한국역사연구회,≪1894년 농민전쟁연구≫1, 역사비평사, 1991).
도결은 이서배·호수배의 모리행위 차원을 넘어서서 守令을 책임자로 하는 지방관부 스스로 주체가 되어 방납을 행하는 것이었다. 즉 각종 전결세의 총액에 해당하는 都結價를 정하여 돈으로 징수한 뒤 각 세목을 주관하는 담당 色吏들이 米木을 구입하여 중앙에 납부하는 한층 조직화된 대전방납형태였다. 도결은 수령 관장하에 방납행위를 하는 것으로, 그만한 명분과 목적이 내세워지고 있었다. 도결에서 생기는「剩餘條」를 가지고 군역의 虛額을 보충하거나 환곡 逋欠을 메꾸고 부족한 官用에 충당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점 때문에 도결은 여타 조세의 結納化를 동반하였고, 또한 수령이 作夫 작업에 간여하여 戶首·養戶의 이익을 탈취함으로써 봉건적 수취구조를 스스로 해체시켜 나갔다.

 도결이 일반화되면서 가장 큰 분쟁거리가 된 것은 도결가문제였다. 도결은 방납을 보다 체계화한 것이었기 때문에 조세부담자·농민층의 입장에서 도결 자체를 반대할 이유는 없었다. 문제는 결가에 있었다. 결가의 책정은 크게 두 가지 관례에 의해 이루어졌다. 鄕會의 공론을 거쳐 결가를 책정하는 관행과 미곡 시가에 따라 결가를 정하는「從市價」관행이었다. 특히 종시가 관행은 수탈기구로서 도결의 본질을 규정하는 것이었다. 加結·가렴으로 인해 도결가가 증가하기도 하였지만,「종시가」자체만으로도 도결가는 항상 고가를 유지하였다.1110) 주 34) 참조. 특히 도결가 책정은 방납 貿米價를 감안하여 미가가 높은 서울이나 조창지역을 기준으로 삼을 수밖에 없기 떄문에 향촌의 시가보다 훨씬 웃도는 것이 보통이었다. 도결가는 각 읍마다 가결 내용이나 시가 차이가 많아 읍마다 차이가 있었다. 19세기 전반에는 낮은 곳이 결당 12∼13냥에서 15∼16냥, 높은 곳은 20여 냥을 상회하였고, 철종 13년(1862) 농민항쟁 시기에는 낮은 곳이 15∼20냥, 보통 30냥 전후의 수준을 보이고 있었다. 도결가는 정액금납의 두세 배 또는 그 이상이 되는 셈이었다.

 균역법 실시 이후 나타난 軍政의 문란 가운데 하나는 군액수(軍摠)의 급증이었다. 18세기 후반경 군총은 그 이전에 비해 40여만 명 가까이 증대하였는데, 이러한 군액의 증대는 대부분 지방 감·병영과 군현의 額外保率·私募屬의 증대에 의한 것이었다. 外案 군액이 급증하게 된 것은 중앙 중심적인 봉건정부의 재정운영에 의해 늘 압박을 받은 지방재정 사정이 균역법을 계기로 더욱 악화되었기 때문이다. 지방관부는 재정보전을 강구하기 위해 군액을 증가시켰고, 군역민들 또한 이를 피역활동의 한 방법으로 활용하였다. 사모속은 전적으로 재정보전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거의 대부분 동전으로 징수되는「錢保軍」의 형태를 취하였다. 그리하여 이미 18세기말 전국의 외안 군역의 80%가 동전으로 징수되었으며, 그 수취량은 강원·함경도를 제외한 6도만 계산해도 중앙상납분을 능가하는 70여만 냥에 이르고 있었다.1111) 方基中, 앞의 글(1986), 160∼172쪽. 그 경향은 19세기 이후 더욱 확대되어 군정문란 심화의 한 요인이 되었다.

 환곡의 耗穀作錢은 환총의 증대가 사회문제로 등장하는 영조 후반부터 이미 성행하였다.1112) 金容燮, 앞의 책(1984上), 제2장. 환모 수입이 재정보전에서 주요한 위치를 점하게 되면서 중앙과 지방의 아문, 특히 지방 감·병영이 중심이 되어 이를 이용한 화폐수입을 추구하였다. 환곡작전은 18세기 후반 환곡의 가장 큰 폐단으로 지목되었던 환곡불균문제, 즉 ‘山多沿少’ 현상을 심화시켰고, 이 결과 작전은 더욱 증대하였다. 還政의 문란은 정조연간을 분기로 구조적으로 심화되었는데, 이는 모든 還弊가 전적으로 화폐수탈을 기반으로 하였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예가「從市價」작전과「加數作錢(加作)」·「移貿立本」이었다.

 환곡 詳定價는 본래 還米 1석당 3냥, 小米 1석당 3냥, 太 1석당 1냥 5전이었으나, 미가상승과 더불어「종시가」작전이 성행하여 19세기 중엽에는 작전가가 1석에 6∼7냥에 이르렀다. 순조 초엽에 나타나 급속히 확대된「가수작전」은 곡가가 높은 지역에서 정해진 모곡뿐 아니라 그 이상, 심지어는 원곡까지 작전하여 이익을 취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원곡을 채우기 위한「이무입본」까지 동반하였다. 따라서 가작과 이무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山沿을 막론하고 민들은 이중적 수탈을 받았다. 그것은 곧 징세기구에 의해 강제적으로 자행되는 고리대·상행위와 다를 바 없었다. 19세기 조세에서의 동전수탈은 여기에서 그 극에 달하였고, 소농민을 만성적인 채무자로 몰아넣어 파산시키고 있었다.

 19세기 조세수취가 고리대적 화폐수탈이라는 측면까지 체현하고 있는 가운데 실제 조세의 일부는 이미 고리대로 운영되었다. 이것이 지방관부의 殖利였다.1113) 吳永敎, 앞의 글.
金容燮, 위의 책.
사채와 더불어 오랜 전통을 가진 식리는 동전유통의 정착과 함께 한층 성행하였다. 특히 18세기 후반 이후 지방재정이 악화되고 闕額과 逋欠이 늘어나자 그 보전을 위한 民庫稅나 군역세 징수가 늘어나고 가렴이 증대하였는데, 많은 경우 이를 식리로 운영함으로써 안정된 수입을 꾀하고자 하였다. 식리는 邑例에 따라 시행되었기 때문에 그 실상은 다양하나, 일반적으로는 摠額制에 기초한 面里 단위의 共同責納制로서, 洞契 등 계와 연계되어 운영되었다. 또한 식리는 강제성을 속성으로 하기 때문에 取息이 용이한 饒戶富民이 주요 수탈대상이 되었으며, 그 이자율은 대개 3∼5할에 달하였다. 식리는 화폐수탈 자체가 목표인 강제적인 고리대수탈이었던 것이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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