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4. 대외무역의 전개
  • 1) 청과의 무역
  • (2) 17세기말 18세기 전반 무역별장의 등장과 역관·상인 간의 대립

(2) 17세기말 18세기 전반 무역별장의 등장과 역관·상인 간의 대립

 17세기초 이래 부연역관들이 대청무역을 주도해왔지만 17세기 후반부터는 私商들도 사행무역에 침투하기 시작하였다. 사상들이 사행무역에 가담할 수 있는 길은 사행원역들과 결탁하거나 京·外官衙에 청탁하는 방법이었다. 서울의 富商들은 주로 사행원역과 결탁하여 사행무역에 참여하고 있었다. 이들이 사행무역에 참여하는 일반적인 형태는 3사신의 子弟軍官이나 사행원역들의 마부나 노자의 명의로 잠입하는 것이었다.1138)≪通文館志≫권 3, 事大 渡江狀. 그러나 대부분은 사신이나 역관들이 거느리고 있었다. 사신은 그들의 지위를 이용하여 사상들을 수시로 대동하였고1139)≪承政院日記≫282책, 숙종 7년 4월 28일.
≪謄錄類抄≫숙종 16년 2월 17일.
역관들은 행중의 인마를 장악하고 있어 사상을 거느리기 쉬웠으며 특히 咨官 등의 略使로 연경에 갈 때는 馬稅를 받고 사상을 잠입시켰다.1140)≪備邊司謄錄≫47책, 숙종 19년 4월 5일.

 정부는 현종초에 勅使와 사행의 迎送費를 염출하기 위하여 管餉 5필, 運餉 8필, 雇馬廳 5필 등 18필의 貿販馱馬를 부연사행편에 入送토록 허가한 뒤 현종 7년에는 개성부의 요청으로 이상 3곳의 태마를 1필씩 덜어 내 개성부에 3필을 지급하였다.1141)≪謄錄類抄≫현종 7년 정월 11일. 이들 지방관아에 배정한 태마수는 곧 8포의 窠數를 의미한다.1142)≪備邊司謄錄≫82책, 영조 3년 11월 17·19일. 당시 한 태마에 실었던 은의 정액이 2,000냥이므로 한 태마는 곧 당하관의 8포정액에 상당하였다. 결국 정부는 지방관아의 비중에 따라 적게는 3과, 많게는 7과의 ‘別包’를 배정한 것이며 이같은 별포무역은 중앙관아의 별포와 마찬가지로 부연역관이 주관하였다.

 그러나 점차 무역로에 접한 평양·의주·개성의 부상들이 관장들에게 청탁하여 무역을 전담할 貿易別將으로 등장하였다. 곧 숙종 7년(1681)에는 관·운향에 이어 개성부에서도 무역별장을 入送하였고,1143)≪承政院日記≫283책, 숙종 7년 5월 23일. 이어 같은 왕 10년경에는 황해·평안도 兩西의 감영과 경기감영에까지 무역별장제가 확대·적용되었다. 이 무렵에 정식화한 각 관아의 무역별장수는 경기감영별장·개성부별장·황해감영별장·補闕廳別將·평안감영별장·관향별장·병영별장·운향별장 각 1명씩 모두 8명이었다. 이들은 각 관아의 ‘庫’나 ‘廳’의 정식 별장에 임명되었기 때문에 때로는「實別將」이라 불리었다. 관아에서는 이들에게 資金銀을 지급하여 사행무역에 참여시켰으므로 이들의 무역형태를「公貿易」으로 지칭하고 있었다.1144)≪備邊司謄錄≫47책, 숙종 19년 4월 5일.

 그런데 숙종 12년(1686)에 <南北蔘商沿邊犯越禁斷事目>이1145)≪備邊司謄錄≫40책, 숙종 12년 정월 6일. 제정된 후 그해 5월에 무역별장의 別送이 금지되었다가 평안감사의 요청으로 무역별장을 다시 들여 보내기로 하였다. 그러나 그 해 9월에 다시 特進官 金德遠에 의해 그 해의 동지사행에는 관·운향의 무역별장 각 1명만 복마 1필씩을 지급하여 보내기로 하고 다른 아문의 무역별장은 보내지 않기로 하였다.1146)≪承政院日記≫318책, 숙종 12년 9월 21일.
≪謄錄類抄≫숙종 12년 9월 22일.
이후 앞에 적은 8개처의 별장은 여전히 입송되었으나, 숙종 19년에 이르러 경기감영과 평안감영 및 황해도의 보궐청별장 등 3명이 삭감되었다.1147)≪備邊司謄錄≫47책, 숙종 19년 4월 5일.

 이처럼 경기·황해·평안도의 富商들 중 일부가 일찍부터 각 관아의 정식별장 곧「실별장」으로서 사행무역에 참여한 반면, 일부의 부상들은 官長들에게 뇌물을 바치고 임시로 사행무역에 참여하고 있었다. 이들은 때로는 돈을 바치고 실별장을 대신하여 보내지기도 하고,1148)≪通文館志≫권 3, 事大 渡江狀. 때로는 관아에 馬稅를 납부한 뒤 별장이라 불리며 참여하기도 하였다. 마세는 각 관아에 공인된 사행마필을 商賈가 빌려가는 대가인 셈이다. 이들은 사상들로서 별장 행세를 한 데 불과하므로,「실별장」과 구분하여「假別將」으로 지칭하려 한다.1149)≪備邊司謄錄≫47책, 숙종 19년 4월 5일. 똑같은 부상출신이지만 전자는 관상적 성격이 농후하였고 후자는 관아와 결탁한 관허사상들이었다.

 이상과 같이 숙종 7년경부터는 서울과 지방의 부상들이 사행원역과 결탁하거나 각 관아에 의탁하여 사행무역에 참여하였고 이들은 부연역관과 더불어 연화를 수입, 왜관을 통해 일본에 수출하였다. 이 사상들을 통하여 연화를 수입한 관아에서는 이들을 별장으로 삼아 차인이란 명목으로 關文을 발송하고 왜관으로 내려 보냈다. 차인들은 관아의 공무역품에 덧붙여 자신들의 연화까지 ‘公貨’라 칭하고 왜관의 상고들보다 먼저 대금을 받아냈고1150)≪承政院日記≫272책, 숙종 5년 9월 5일.
≪備邊司謄錄≫35책, 숙종 5년 9월 6일.
연화는 면세되었다. 이 면세는 흉년으로 인한 관아의 재정적 보충이나 軍門의 군수품 조달을 위한 재원확보를 이유로 주어진 특권이었다. 호조는 각 아문들의 연화에 대한 면세권을 박탈하려고 노력하였지만1151)≪承政院日記≫297책, 숙종 9년 3월 9일. 군수품의 조달이나 支勅費의 마련 등을 이유로 내세운 경·외아문의 반발을 꺾을 수 없었다. 따라서 경·외의 관아와 결탁한 赴燕商賈들은 差人의 칭호를 띠고 수출업무상의 유리한 여건을 누리고 있었다.

 이처럼 서울·개성·황해도·평안도의 사상들은 사행원역이나 경·외의 관아와 결탁하여 연경무역에 가담하는 한편 산해관 동쪽 곧 관동의 물화를 국내에 수입·판매할 기회를 노렸던 것이다. 그것은 17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관동에서도 상품생산이 증가하였고 金州·復州·海州·盖州 등지의 면화와 심양·山東의 大布三升, 中後所·遼陽의 모자 등의 상품가치가 높았기 때문이다. 상인들은 이들 상품을 조선 사행로인 심양·요동·책문 등지로 집하시켜 양국 상고들의 상혼을 자극하였다.1152)≪通文館志≫권 3, 事大 開市.

 당시 사상들은 부연사행에 가담하지 않는 이상 관동물화를 수입할 수 있는 기회가 세 가지였다. 첫째는 團鍊使制, 둘째는 餘馬制, 셋째는 延卜制였다.1153) 柳承宙, 앞의 글, 232∼234쪽. 숙종 3년(1677)에 사행로가 우가장에서 심양으로 바뀐 뒤부터 단련사는 심양에서 세폐·방물의 운송인마를 이끌고 귀국하였다. 단련사는 원래 의주부윤이 파견한 부내의 군관으로서, 수하에 몇 명의 從人을 거느렸으며 단련사와 종인에게는 각각 自騎馬와 刷馬가 지급되었다. 이 단련사일행에 황해·평안 양도의 감영에서는 海西庫·管餉庫·運餉庫의 監色을 파견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단련사 및 그 종인들과 함께 回還空馬를 끌고 올 임무를 띠고 파견되었지만 250여 필의 空刷馬를 이끌고 심양-요동-봉황성-책문을 거쳐 의주로 오는 과정에서 밀수가 이루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1154)≪英祖實錄≫권 11, 영조 3년 4월 16일.

 다음, 여마제는 세폐방물을 실은 쇄마가 의주에서 책문으로 가는 도중에 사고가 있을까 우려하여 의주부가 공쇄마 수십 필을 책문까지 딸려 보낸 제도였다. 여마제가 책문무역의 기회로 변모되기 시작한 것은 숙종 10년경이었다. 여마제는 이에 편승한 사상들의 출입이 확대되자 숙종 12년 청에서 그 폐지를 요구하여 한때 혁파되기도 하였지만 곧 복구되었고 여마의 수는 날로 늘어나 같은 왕 16년에는 300여 필에 달하였다.1155)≪備邊司謄錄≫44책, 숙종 16년 10월 13일.

 연복제는 사행이 귀국할 때 책문에서 의주로 오는 동안 敗傷할 馬匹이 있을까 염려하여 의주부가 역시 공쇄마를 파견한 제도였다. 이 연복제 또한 여마제와 더불어 사상들의 책문무역을 가능케 한 기회였다.1156)≪承政院日記≫664책, 영조 4년 6월 28일.
≪通文館志≫권 3, 事大 開市.

 이처럼 서울·개성·황해도·평안도의 사상들이 단련사·여마·연복제에 편승하여 심양 특히 책문무역을 실현시킨 데는 청상들의 역할 또한 컸다. 청상들의 심양·책문무역을 조종한 것은 청의「攔頭」輩들이었다. 난두는 숙종 15년에 요동과 봉황성의 車戶 12명이 조직한 운송청부업체였다. 이들이 심양·책문 간의 雇車業으로 재부를 축적하자 청의 戶部侍郞은 內帑銀을 사사로이 대여하여 이익을 늘렸다. 난두배들은 또 심양의 奉天府에 商稅를 수납하기로 약속하고 부연사행의 往還을 기회로 이용하거나 심양에서 돌아가는 단련사 일행을 상대로 관동의 상고와 물자를 심양으로 끌어들여 後市의 상리를 취하고 있었다.1157)≪承政院日記≫546책, 경종 2년 10월 19일.
≪通文館志≫권 3, 事大 開市.
책문후시도 이들에 의하여 조장되었다. 조선의 사상들은 이들과 결탁하고 단련사 일행이나 여마제 및 연복제에 편승하여 그때그때 관동 각지의 상고를 책문으로 유치하여 후시무역을 실현시켰던 것이다.

 이처럼 국내의 사상들이 청의 난두배와 결탁하여 후시무역을 감행함에 따라 그에 따른 폐단 또한 적지 않았다. 연복제의 경우 사행이 책문에 도착하면 감시를 받지 않기 위하여 3사신을 먼저 귀국케 하고 연복마를 이용, 대대적인 밀수를 감행하였다. 이에 정부는 숙종 20년부터 사신이 연복마와 함께 귀국토록 하였고 연복제에 의한 책문후시를 철저히 봉쇄하였다.1158)≪承政院日記≫664책, 영조 4년 6월 28일.
≪通文館志≫권 3, 事大 開市.
그러나 여마제는 여마가 책문에서 사신과 헤어진 뒤 귀국하기 때문에 어떠한 제재도 받지 않고 후시무역을 실현할 수 있었다. 여마제에 편승한 사상들의 책문후시는 의주부윤의 비호하에 날로 번창해갔다. 숙종 16년 정부는 방물여마 수십 필 외에는 들여보내지 못하도록 하였지만1159)≪備邊司謄錄≫44책, 숙종 16년 10월 13일. 사상들에 의한 여마의 수가 날로 증가되자 부득이 같은 왕 26년에 이르러 여마제 자체를 혁파하고 말았다.1160)≪謄錄類抄≫숙종 26년 3월 26일.

 이처럼 정부가 연복제와 여마제에 편승한 사상들의 책문후시를 봉쇄하자 사상들은 점차 단련사행에 파고 들었다. 이들은 부연상고들인 ‘燕商’과 구별하여 ‘瀋商’이라 불리었다. 심상의 수가 늘어나면서 단련사는 이들로부터 사사로이 商稅를 수취하기 시작하였다. 단련사의 수세는 곧 의주부윤과 결탁한 비합법적인 수취행위로서 그들 상호간에는 상당한 이득이 보장되었겠지만 국가의 재정에는 조금도 보탬이 될 것이 없었다. 따라서 숙종 31년(1705) 정부는 이를 규제하고 재정에 충당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결정하였다. 곧 “단련사는 의주부 내의 군관 대신 부근의 邊將들을 輪差토록 하고 사상에 대한 수세도 상고들이 직접 의주부에 납세하여 雇馬費에 충당하되 세은액을 각각 4∼5냥 정도로 책정하라”1161)≪備邊司謄錄≫56책, 숙종 31년 11월 7일.
≪通文館志≫권 3, 事大 開市.
는 것이었다. 이 때의 수세대상은 심상이었고 과세대상도 연화가 아니라 관동물화였다. 그러나 숙종 34년에는 연상일지라도 관동물화를 수입할 경우에는 과세키로 결정하였다.1162)≪備邊司謄錄≫59책, 숙종 34년 12월 6일. 어떻든 이상과 같은 정부의 시책은 단련사 일행뿐 아니라 부연역관·상인에게 심양은 물론 책문후시까지도 사실상 공인한 처사였다.

 숙종 31년에 후시무역이 합법화되면서 심양보다는 우리 나라에 근접한 책문이 더욱 번창해갔다. 관동물화로 이름난 면화나 大布3升·모자 등을 실은 車馬가 책문에 폭주할 뿐 아니라 남방의 商船이 우가장 海口로 올라왔으며 부연역관·상인들만이 수입할 수 있었던 백사도 연경의 상고가 직접 책문까지 싣고 왔다. 따라서 봉황성 내의 점포들도 산해관 서쪽의 대도회에 있는 점포와 다를 것이 없었다.1163)≪通文館志≫권 3, 事大 開市.

 그간 연상들이 인력과 재력을 소모해가면서도 부연사행을 따라 연경을 왕래한 것은 소주·항주산의 백사나 匹緞을 수입하기 위함이었는데 이제 남방의 상선이 우가장에 來泊하고 연경의 상고들이 책문까지 오는 한 굳이 연경까지 가야 할 이유가 없었다. 이들은 소관 아문에 요청하여 단련사제에 편승하기를 원하였고 각 아문에서는 이를 정부에 건의하였다. 정부는 숙종 33년 松都·海西·管餉·運餉·平安兵營 등 5처에 한하여 貿販別將 각 1명씩을 파견토록 허락하였다.1164)≪通文館志≫권 3, 事大 渡江狀. 그리고 이 때 각 아문에 허가한 8포의 수를 보면 개성부 2과, 황해감영 1과, 평안감영 2과, 평양병영 1과, 의주부 6과 등 모두 12과였다.1165)≪備邊司謄錄≫82책, 영조 3년 11월 17·19일.

 단련사의 인솔하에 5처의 무역별장들은 소속 관아에 배정된 8포은을 가져가 심양이나 책문에서 공무역을 담당하였다. 정부는 무역별장에게 自騎馬 1필만 이용토록 허가하고 驅人을 데려가지 못하게 하여 사무역을 허용치 않으려 하였다.1166)≪通文館志≫권 3, 事大 渡江狀. 그러나 이 무렵에는 이미 단련사가 심양에서 이끌고 온 공쇄마가 모두 상고들의 무역품을 싣고 오는 운송수단으로 변질된 상태였다. 부연원역들이 심양·책문에서 구입해 두고 간 상품과 함께 무역별장 및 사상들의 공·사무역품 등이 모두 단련사의 공쇄마에 실려 귀환하였다. 오히려 250여 필에 달했던 공쇄마로도 부족하여 사행의 귀국시에나 파견하던 연복마를 책문으로 들여 보내야 할 지경이었다.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부연원역과 단련사 일행의 8포은을 제외하고도 매번 후시에 유출되는 은만도 10만여 냥이며 후시가 해마다 4∼5차례씩 열렸으므로 40∼50만 냥에 달하는데다 8포은까지 합한다면 연간 총 50∼60만 냥이 청나라로 유출되고 있었다.1167)≪通文館志≫권 3, 事大 開市.

 숙종말인 재위 46년경부터 대청무역상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청·일 양국 간에 直交易이 활발해진 것이다. 청나라는 초기부터 海禁을 엄격히 실시하여 외국과의 무역을 봉쇄해왔는데 숙종 10년에 해금령을 해제하였다. 그리하여 그 이듬해부터 福州·廈門의 상선들이 일본의 장기로 渡航하기 시작하였고 숙종 15년에는 청 정부가 장기에 商館을 설치하였다.1168)≪承政院日記≫318책, 숙종 12년 9월 21일.
≪謄錄類抄≫숙종 12년 9월 22일.
≪備邊司謄錄≫44책, 숙종 16년 10월 13일.
이로부터 30여 년이 지나자 그동안 백사나 필단을 수입하기 위해 왜관으로 몰려들었던 일본상인들이 대부분 청상들과의 직교역을 도모하였다. 따라서 부연역·상들이 청·일 간의 중계무역으로 많은 差益을 얻어 왔던 연화의 수출로가 막히게 되었다. 倭商들의 來航이 줄고 구매력이 떨어지자 왜관에는 연화가 쌓여 갔고 대가의 지불 또한 지연되어 중앙과 지방의 각 아문에서 역관과 상인들에게 대여한 무역자금을 회수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따라 경종 2년(1722)에는 정부가 償債廳을 설치하기에 이르렀다.1169)≪備邊司謄錄≫56책, 숙종 31년 11월 7일.

 청·일과의 중계무역이 쇠퇴해짐으로써 가장 타격을 받게 된 것은 부연역관들이었다. 앞서 숙종 31년(1705)에 瀋陽·柵門後市가 공인된 뒤 단련사 일행을 위시한 사상들에 의하여 관동물화뿐 아니라 백사나 필단들이 대량으로 수입되어 이웃 일본으로 수출되기도 하였지만 국내에도 판매되기 시작하였다. 사상들의 淸貨는 국내의 각 도시뿐만 아니라 농촌의 鄕市를 통하여 깊은 산골에까지 침투하였다. 이처럼 청·일 간의 중계무역로가 막히고 국내의 판로도 사상들이 독점하자 부연역관들은 상리를 얻을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부연역관들은 활로를 타개하기 위하여 사신들을 통하여 정부에 요구하거나 자신들이 직접 도모하여 사상들의 무역로를 차단하기 시작하였다.

 부연역관들은 조·청상고들과 결탁해 있던 청의 난두배를 해체하였다. 난두배들은 관동의 상고들뿐만 아니라 연경상고와 남방의 상선까지 책문으로 불러 모으는 등 청상들을 장악하고 있었으며, 한편으로는 조선상고들과도 결탁하여 부연사행과 단련사 일행 및 연복제에 편승한 상고들로 하여금 책문후시를 열게 하였다. 역관들은 경종 2년에 盛京의 예부에 난두의 혁파를 요청하였고1170)≪增補文獻備考≫권 176, 交聘考 경종 2년. 이듬해에는 역관 韓永禧·金慶門·劉在昌·金澤 등이 직접 청의 査官과 담판하여 난두를 해체시켜 버렸다.1171)≪增補文獻備考≫권 176, 交聘考 경종 3년. 그리고 영조 원년(1725)에는 연복제에 의한 책문후시를 엄금하고 범법자를 압록강변에서 梟示토록 규정하였다.1172)≪備邊司謄錄≫84책, 영조 4년 7월 3일. 이리하여 역관들은 책문후시를 조종하던 난두배를 무력화시켰으며 사상들의 책문후시를 봉쇄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심양 8포를 비롯한 단련사 일행의 공·사무역을 봉쇄하지 않는 한 역관들의 상리가 보장될 수 없었다. 기회를 노리던 역관들에게 명분을 준 것은 영조 3년에 발생한「淸債辱國」사건이었다. 심양·책문후시가 공인된 뒤부터 조·청상인 간에는 무역이 활발해졌고 외상거래도 이루어졌었는데 후시를 봉쇄함에 따라 청상들이 채무변제를 요구한 것이다. 청채의 총액은 은 7만여 냥에 달하였고1173)≪備邊司謄錄≫81책, 영조 3년 3월 27일. 청나라는 조선정부에 통보하여 조속히 이를 상환토록 강경하게 요구해왔다. 청채욕국사건은 역관들이 단련사 일행의 무역행위를 규제하도록 정부에 요청하는 계기도 되었지만 정부로서도 상고들의 무역을 禁除할 수밖에 없게 한 사건이었다. 영조 3년 정부는 심양 8포제를 혁파하기로 결정하고 이듬해 進奏使行時에 역관 김경문을 청에 특파하여 심양 8포무역을 폐지시켰으며 이어 단련사제도 혁파하였다.1174)≪英祖實錄≫권 15, 영조 4년 정월 신유. 그리고 같은 왕 5년에 정부는 역관의 8포은 외에 은이 청나라로 유출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엄격한 법규도 제정하였다. 곧 “개시나 사행시를 막론하고 400냥 이상을 소지하였다가 江上搜檢時에 들켜서 잡히거나 窺察당해 고발당한 자는 모두 강상에서 효시한 뒤 啓聞토록 하고 300냥 이하는 3차 嚴刑한 뒤 全家를 徙邊하되 赦典을 베풀지 아니한다”1175)≪備邊司謄錄≫88책, 영조 6년 11월 17일.는 내용이었다.

 이와 같이 역관들은 그들이 의도한 대로 청의 난두를 해체하고 연복제에 의한 사상들의 책문후시를 금지하였으며 단련사제와 무역별장들에 의한 심양 8포무역마저 폐지하여 사실상 상고들에 의한 일체의 대청무역을 봉쇄하였다. 이에 상고들은 다각도로 보복과 저항을 하였다.

 우선 의주부에서는 보복적인 차원에서 역관들의「包外持銀」에 대한 譏察을 강화하였다. 곧 영조 5년에는 역관 玄有鋼이 체포된 데 이어 金文慶은 天銀 586냥을, 韓斗綱은 천은 94냥과 丁銀 15냥을, 각각 8포은 외에 소지하고 있다가 기찰장교에게 체포되었다.1176)≪承政院日記≫698책, 영조 5년 12월 10일. 이처럼 보복적인 차원에서의 기찰행위가 가혹해지자 영조는 의주부인들의 기찰을 중지시키고 서장관과 의주부윤이 검찰하도록 지시하였다.1177)≪備邊司謄錄≫88책, 영조 6년 10월 6일. 그리고 금령을 강화하여 “이 뒤부터는 作門 내에서 잡힐 경우 은 100냥 이상을 소지한 자는 강변에서 효시하고 100냥 이하는 3차 엄형한 뒤 전가를 사변한다. 작문 밖에서 잡히면 100냥 이상 소지자는 3차 엄형한 뒤 전가를 사변하고 100냥 이하는 1차 엄형한 뒤 定配한다”1178)≪備邊司謄錄≫88책, 영조 6년 11월 17일.고 규정하였다. 결국 搜銀法이 강화됨에 따라 부연사행의 역관들은 물론 역관·상인들과 결탁하던 마부·노자 등의 밀수행위도 이루어질 수 없게 된 것이다.

 역관들에 대한 보복행위는 책문후시가 폐지됨에 따라 이익을 상실하게 된 청국측에서도 나타나고 있었다. 영조 4년(1728) 동지사가 회환할 때 상고들이 수행하지 않고 연복제에 편승한 사상들의 책문무역이 이루어지지 않자 鳳城將軍은 역관들에게 “우리들이 책문에서 수세해왔던 2,000냥을 무엇으로 충당하란 말이냐. 연복매매를 한 뒤라야 너희들의 卜馱를 출급하겠다”고 협박하였고 복물이 이미 책문을 나온 뒤에도 청의 章京·甲軍들이 城將의 분부라면서 복물을 가로막고 길을 방해하였다.1179)≪備邊司謄錄≫84책, 영조 4년 7월 3일.

 한편 영조 4년에 심양 8포제가 혁파된 뒤 황해·평안감사와 의주부윤은 8包貿易權을 회복하기 위하여 정부에 요청하였으며 같은 왕 7년에는 개성부윤도 中江開市의 재원 마련을 구실로 당시 京軍門에서 이용하고 있던 包外越送制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정부는 개성부윤의 요구가 반드시 개시 재원을 마련하는 데만 있지 않고 이면에는 관내의 사상들, 이를테면 무역별장으로 참여했던 상고들의 요구가 반영된 것으로 파악하였다. 따라서 개성부윤의 요청을 받아들일 경우 양서와 의주부에도 허락해야 하고 결국 사상들의 무역로를 열어주는 결과가 초래될 것이라고 우려하여 묵살하였다.1180)≪備邊司謄錄≫90책, 영조 7년 7월 7일·10월 23일.

 이상과 같이 사상들의 무역이 봉쇄되자 역관들에 대한 의주인들의 보복행위가 뒤따랐고 청측에서는 책문후시를 강요하였으며 지방의 상고들은 소속 관장을 종용하여 무역권을 되찾으려 노력하였다. 그러나 어느 경우도 무역로를 재개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에 조·청 양국의 상고들은 일정하게 지방관원의 비호를 받으면서 비합법적인 국경무역을 감행하였다. 영조 9년 평안감사 權以鎭이 압록강변의 사정을 염탐한 뒤 보고한 내용을 간추려보면 그 사정을 잘 알 수 있다.

江界郡과 渭原郡의 조·청 국경지대 중 高山鎭과 伐登鎭의 압록강 건너에 있는 細洞·九郞哈洞·古道水洞·秋洞·乫軒洞·屯洞·皇帝城坪 등지에는 청인의 이주자가 날로 증가하여 많은 곳은 16∼17호에 300∼400명에 달하며 이들의 창고에는 청화가 충만해 있다. 이 지역의 主胡인 山西人 李登四와 瀋陽人 王三平 및 唐 또는 湯이란 성을 가진 자 등 3명은 모두 萬金大賈들로서 범법했거나 사업에 실패하여 도망온 자들이다. 이들의 수하에는 조선에서 도망한 자 3∼4명씩을 두어 양국 간에 밀무역을 실현하기 위한 정보교환과 문서의 처리를 맡기고 있었다. 그들은 조선상인들로부터 물화를 구입하여 심양 등지에 가서 팔고 있는데 양국상인들 간에는 물화를 교역하기 위해 매일같이 왕래하는 실정이다(≪英祖實錄≫권 35, 영조 9년 7월 임진).

 이처럼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조·청상인들 간의 밀무역이 성행했던 사실은 그 후의 기록에서도 누누히 언급되고 있다. 이를테면 영조 10년에 “滿浦鎭 부근의 압록강 중에 있는 작은 섬에는 청상들이 通貨하는 폐단이 크다”1181)≪備邊司謄錄≫95책, 영조 10년 3월 2일. 고 하였고 “평안도의 상인·僧釋訓 등이 錢帛을 소에 싣고 昌城을 지나다가 소가 강에 빠졌는데 청인이 건져주었다”1182)≪英祖實錄≫권 35, 영조 9년 7월 임진.고 하였다. 또 吏曹參議 李宗城은 “청채욕국 이후 연복무역을 철저히 금지해왔기 때문에 조·청 잠상들이 상리를 잃은 지가 오래되었다. 이 때문에 기회만 있으면 한 번이라도 통화하고자 밤낮으로 상리를 추구하는 무리와 팔 곳을 갈구하는 상인들이 떼지어 있다”1183)≪英祖實錄≫권 39, 영조 10년 12월 계축.고 하였다. 황해·평안 양도는 “唐物·銀·紬가 모두 나오는 곳이며 모든 물화가 폭주하는 곳”1184)≪備邊司謄錄≫99책, 영조 12년 6월 3일.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분위기가 조성될 수 있었던 이면에는 그 곳의 관장들이 사상과 결탁하여 비호했기 때문이다. 한두 사례를 든다면 영조 10년에 평안감사 朴師洙는 “관서인으로 京城人物을 유인한 자는 사형에 처함이 마땅하지만 청상에게 전매한 사실이 드러나지 않았는데도 청상과 매매한 것으로 단정하여 사형에 처한다는 것은 王政에 어긋나는 처사”1185)≪英祖實錄≫권 10, 영조 10년 6월 무오.라고 하면서 관서상인을 옹호하였다. 영조 15년(1739)에는 關西御史 李性孝가 復命時에 보고하기를 “朔州府使 李萬囿가 의주부의 상고에게 緞을 구입하기로 약속하고 쌀 수백 석을 지급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신이 몰래 상고들이 자주 출입하는 장시 내의 妓家에 들어가 상고들의 文蹟을 搜檢하려 하였는데 이만유가 이 소식을 듣고 捕校를 풀어 신이 데리고 간 書吏를 포박해 버렸다”1186)≪英祖實錄≫권 50, 영조 15년 9월 계축.고 하였다.

 이처럼 사상들의 밀수행위가 관장과 결탁하고 그 비호하에 있었다고는 하지만 무역이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없었고 또 당국에 발각될 경우에 처벌이 가혹하였다. 따라서 사상들은 정부가 공인한 무역권을 획득하기 위하여 관장들에게 청탁하였고 관장들 또한 소관 아문의 재원을 확보하기 위하여 이를 정부에 요청해왔다. 이러한 관아의 요구는 영조 30년 “灣府의 蕩債와 邊民의 聊活”1187)≪備邊司謄錄≫170책, 정조 11년 5월 15일.을 강력히 주장하는 의주부의 요청에 의해 관철되었다. 의주부는 조·청사행의 運餉을 맡으면서 빚을 졌기 때문에 정부에서 運餉庫의 재원을 확보할 수 있도록 책문후시에 의한 1/10의 상세를 수취토록 요구했던 것이고 정부는 심양 8포 12과 중 6과를 의주부에 허가했던 것이다. 그러나 정부가 책문후시를 허가한 데는 ‘변민료활’이란 명분의 이면에 만상들의 끈질긴 요구가 깔려 있었다.

 이 때의 책문후시는 만상에게만 허용되었기 때문에 ‘灣商後市’로 불려졌다. 그리고 역관의 8포정액과 같이 일정액의 정액무역권을 만상에게 허가했기 때문에 ‘灣包’라고도 불렸다. 만포정액은 정기사행인 節使에 1만 냥, 임시사행인 別行에 5천 냥, 咨行에 1천 냥을 초과하지 못하도록 규정하였다.1188)≪萬機要覽≫財用編 5, 柵門後市.
≪備邊司謄錄≫170책, 정조 11년 5월 25일.
만포의 정액무역을 규제하는 시행세칙이<比包節目>이었다.<비포절목>을 마련한 목적은 종래의 책문후시 때 의주부가 사상들의 수출액만을 검사하고 수입액은 불문에 붙였기 때문에 잠상행위를 도모하는 자들이 압록강을 건널 때만 무사하면 뒷 일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어 奸弊가 百出하자 수출·수입시에 모두 검사하여 잠상행위를 근절시키고자 한 데 있었다.1189)≪萬機要覽≫財用編 5, 燕行八包 比包.
≪備邊司謄錄≫127책, 영조 30년 8월 5일.
이러한 조처는 한편으로는 수출품보다 수입품에 과세하는 것이 더욱 유리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1190)≪備邊司謄錄≫167책, 정조 8년 10월 19일. 그리고<비포절목>을 제정하면서 수출품목도 제한하였다. 곧 은과 인삼의 수출을 금하고 紙地·紬·苧·布·綿 등의 잡화를 은가로 환산하여 절사 1만 냥, 별행 5천 냥, 자행 1천 냥에 충당토록 규정하였다.1191)≪萬機要覽≫財用編 5, 柵門後市.
≪備邊司謄錄≫170책, 정조 11년 5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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