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2. 양반서얼의 통청운동
  • 2) 서얼통청운동의 확대
  • (2) 19세기의 서얼통청운동

(2) 19세기의 서얼통청운동

 일반적으로 19세기는 조선왕조의 동요기 내지 해체기로 인식되어 왔다. 그것은 왕건의 약화와 관료의 부정부패가 심화되어 농민들에 대한 수탈이 가속화되었고 그리하여 전국적으로 농민봉기가 일어나고 있었지만 지배계층인 양반관료들이 개혁을 통한 문제해결보다는 중세체제의 유지에만 급급하여 모순이 누적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역사적 격동기를 맞이하여 서얼들은 소통운동을 더욱 활발히 전개하였다. 그 결과 그들은 집단적인 陞班化를 도모하였고 사회경제적인 처우개선을 부르짖었다. 그들은 순조 원년(1801)의 영상 沈煥之·좌상 李時秀·이판 尹行恁 등의 동정에 영향받아193)≪純祖實錄≫권 2, 순조 원년 정월 정해. 대대적인 소통운동을 일으켰는데 특히 순조 23년 7월에는 경기·호서·호남·영남·해서·관동 등지로부터 서얼유생 金熙鏞 등 약 1만 명이 집단적으로 상소를 올렸다.194)≪純祖實錄≫권 26, 순조 23년 7월 신묘.

 이 때에 순조는 서얼들의 가련한 형편을 잘 알겠으며 묘당에서 좋은 방법을 찾아서 처리하도록 하겠다고 비답하였다. 그러나 그 다음달에 서얼소통을 반대하는 성균관 유생들의 捲堂이 있었다.195)≪純祖實錄≫권 26, 순조 23년 8월 무술. 그들이 불만의 표시로 일제히 관을 비우고 물러난 데 대하여 순조는 서류들의 호소는 열성조에 항상 있었던 일이며, 서얼금고가 천리와 인정의 떳떳한 도리에 맞지 않는 것은 여러 유생들도 알지 않느냐고 하면서 그들의 용렬함을 개탄하였다.

 그 당시 조정에서는 서얼허통에 대하여 격렬한 토론을 벌였다. 그 해 l1월<癸未節目>을 만들어 서얼들의 한품을 종래 정3품에서 종2품으로 올리고 청직으로는 臺職을 허용하는 등 지위향상을 도모하였다.196)≪大典會通≫권 1, 吏典 限品叙用庶孼疏通更正節目 純祖癸未 그러나 그것이 잘 시행되지 않자 헌종 14년(1848) 11월 경향의 유생 李鎭宅 등 8,000인이 상소하여 서얼소통을 청원하였다.197)≪憲宗實錄≫권 15, 헌종 14년 11월 무인.
≪備邊司謄錄≫235책, 헌종 14년 11월 8일.
이에 대하여 헌종은 묘당에서 잘 논의하도록 하라고 지시하였으나 별다른 후속조치가 없었다. 그리하여 3년 후인 철종 2년(1851) 4월 유학 崔濟京 등이 상소하여 연전의 상소에 대한 조치를 촉구하며 다음과 같이 호소하였다.198)≪備邊司謄錄≫238책, 철종 2년 4월 15일. 서얼들은 아비 생전에는 아비라 부르지 못하고 아비가 죽은 후에는 아비에 대한 제사를 지낼 수 없다. 서얼들은 문과급제 후에도 본종의 華閥·冷族의 여부에 관계없이 모두 교서관으로만 분관하기 때문에 명현·故家와 사대부가의 후예이면서도 시골의 미천한 자들보다 하대받고, 승적된 후에도 음서의 혜택을 못받으니 매우 부당하다고 하였다.

 이러한 서얼들의 호소에 대하여 조정 중신들은 긍정적으로 논의한 후 영의정 權敦仁이 아뢴 바에 따라 서얼들도 족성의 閥閱을 참작하여 ‘槐國宣薦’199)문과급제 후 문벌이 좋은 집의 자제는 槐院(承文院)에 分館하고 鄕班들은 國子監(成均館)에 분관하며, 무과급제자 중 사족자제는 宣傳官으로 추천하는 것을 의미한다. 등을 통하여 개별적으로 수용하도록 하였다.200)≪哲宗實錄≫권 3, 철종 2년 4월 신미.

 이 무렵 전국의 서얼들은 대구 達西精舍를 중심으로 조직적인 소통운동을 전개하였다. 철종 9년 정월에는 역대의 서얼에 관계되는 사실을 모은≪葵史≫를 펴냈고 또 같은 해에 율곡 이이 등을 모시는 서원을 달서정사에 세우고자 통문을 돌렸다. 통문의 내용은 수많은 서얼들이 선현의 후손으로 무고하게 금고된 지 수백 년이 되었는데 선조 때 이이가 서얼소통을 힘껏 주장한 이래 金祖淳이 「癸未獻議」를 하는 등 애를 써서 근래 서얼허통의 길이 넓어졌으므로 이 두 선생을 영세토록 모시는 祠宇를 건립하자는 것이었다.201)≪葵史≫권 2, 철종 9년 4월. 영남은 남인계 당색인들의 본고장인데도 그 중심부인 대구에서 남인계와 적대관계에 있었던 서인 내지 노론의 대표적 인물이었던 율곡과 楓皐를 모시는 서원을 세우고자 한 것이다. 이는 서얼들이 근친인 적계사족과 혈연관계를 끊고 철저히 대립하겠다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19세기에 들어와 60여 년간 지속되었던 노론계 安東金氏 척족정권의 지지기반으로서 전국인구의 과반수에 해당하는 서얼들이 있었다는 점은 결코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철종 10년 11월에는 서얼유생들이 다음과 같이 격렬한 내용의 통문을 발송하였다.202)≪葵史≫권 2, 철종 10년 11월. 국법상으로는 처·첩 모두에게 아들이 없을 경우에만 양자를 허용하지만 세속은 친생자가 있어도 적출이 아니면 법을 위반하면서 양자를 들여 제사를 받든다. 李珥·趙憲·周世鵬·鄭光弼·張晩·李浣 등은 서자를 승적시켜 후사로 삼았다. 양반들은 본심으로 자기의 혈육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습속이 고루하여 자기 홀로 서자를 후사로 삼지 못할 뿐이며, 설혹 그럴 마음이 있어도 그렇게 하면 종족들이 서자를 후계자로 못하게 한다. 앞으로 서자를 후사로 삼지 않고 타인을 양자로 삼는 부모에 대하여는 각자가 정성을 다하여 간하되 거듭 간하여도 듣지 않거든 울면서 간하고 울면서 간하여도 듣지 않거든 머리를 땅에 부딪쳐서 피흘리며 간하라고 하였다.

 이 통문을 발송한 이후에도 이전 관습대로 인륜을 저버리게 하는 자가 있으면, 그에 대해서는 국법을 준수하지 않는 점과 왕명을 받들지 않는 점을 들어 공동으로 성토하고 이름을 지적하여 임금의 거둥길에서 호소할 것을 선동하였다. 이와 같이 19세기 중엽에 이르면 이전 시기의 서얼소통운동과는 달리 준법과 왕명 준수를 내세워 위법행위자와 격렬하게 싸울 것을 주장하게 된 것이다. 사실 이 시기의 서얼금고는 법제상으로는 상당히 완화되어 서얼도 淸宦으로 임용될 수 있었고 후사에 있어서도 서얼을 배제하지 않았다. 오로지 법과 왕명을 준수하지 않는 사회적 현실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남인계의 대원군이 집권한 이후 서얼소통에 관한 논의나 그 운동에 관한 사실은 기록상 별로 보이지 않는다. 다만 고종 6년(1869) 정월 이조에서 관제개정을 논의하면서 서류 종친까지도 적통을 잇는 자(承嫡者)가 아닌 한 ‘文槐武宣’이 안된다고 하였으니203)≪高宗實錄≫권 6, 고종 6년 정월 24일. 일반 사족의 서얼이 承文院의 權知(試補)나 宣傳官을 바랄 수는 없게 되었다. 철종대에 허용되었던 서얼통청의 길이 도로 막히니까 서얼들은 앙앙불락하다가 대원군이 실각하자 다시금 통청운동을 벌였다. 고종 11년 2월 前持平 洪贊燮 등이 연명으로 상소하여 역대 국왕·명현·대신들이 서얼통청을 거듭 촉구하였고, 특히 철종은 ‘문괴무선’을 서얼들에게도 허용하도록 하였다고 하면서 한 나라의 반이 넘는 사람들의 백세의 원한을 풀어달라고 하였다.204)≪承政院日記≫, 고종 11년 2월 15일.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전 지평 權鵬圭 등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또 연명으로 상소하였다.205)≪承政院日記≫, 고종 11년 2월 23일.

① 고종 원년 봄에 趙大妃가 兩銓(吏曹·兵曹)에 분부하기를 서얼허통에 관한 지시가 여러 번 있었으나 아직 실효성이 없으니 오직 재능에 따라 임용하여 억울하다고 탄식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하다.

② 고종 2년에 반포한≪大典會通≫吏典 除授 新增條에 있는 ‘中庶’두 글자를 보고 아연실색하였다. 중인은 본래 사족이 아니나 서얼은 비록 모계가 한미하지만 부계는 귀족이다. 율령에 따라 풍속을 고치는 것이 서얼들의 답답함을 풀어 주는 제일의 양책이다.

 영의정 李裕元이 서얼통청은 이미 경연에서 아뢰어 복구하였으니 그 地閥로 보아서 좋은 집안의 서얼은 괴원으로 올려줌이 옳다고 하였고, 고종도 國子降調人이 이제 괴원으로 올라가게 되었으므로 芸閣(校書館)降調人도 國子監으로 올려주는 것이 옳다고 하였다.206)≪高宗實錄≫권 11, 고종 11년 3월 5일. 이에 따라 芸閣人 辛哲求·南相說·鄭元時·權鵬圭·李載龜·李秉淵·李健容·金羽永·李東相 등을 모두 괴원으로 올리고 관서의 강조운각인 崔德明·韓龍珪 등과 운각인 尹基周를 국자감으로 陞調하되 국자강조인 趙廷祖는 평판이 좋지 않으니 운각으로 강조함이 좋겠다고 趙康夏가 아뢰어 윤허를 받았다.207)≪承政院日記≫, 고종 11년 3월 5일. 208)≪高宗實錄≫권 14, 고종 14년 4월 6일.
≪承政院日記≫, 고종 14년 4월 6일.
≪備邊司謄錄≫263책, 고종 14년 4월 6일.

 그 후 고종 14년 4월 경연에서 서류였던 前正言 金基龍·前掌令 韓兢烈·直講 李載龜 등은≪大典會通≫의 原·增·續·補 중에서 서얼금고에 관한 조항을 일일이 삭제하여 줄 것을 청하였다.100)종전 같으면 엄두도 못낼 청환인 대간자리에 있던 서얼양반들이 국왕에게 직접 호소하여 법전상의 서얼차대조항을 삭제하여 달라고 한 것이다. 결국 고종 19년(1882) 7월 국왕은 “무릇 西北人·松都人·서얼·醫譯·胥吏·軍伍 등을 모두 顯職에 통용하며 오로지 재능만으로 관원을 임용하되 특이한 재능이 있는 자는 안으로 공경백관과 밖으로는 방백수령에 뽑아 쓰겠다”고 하여 법전상의 서얼금고 내지 서얼차대에 관한 조항을 사문화시켰다.209)≪高宗實錄≫권 19, 고종 19년 7월 22일.
≪承政院日記≫, 고종 19년 7월 22일.

 이상과 같이 19세기 후기에 이르러 서얼들의 끈질긴 통청운동의 결과로 차대에 관한 법제상의 장애가 완전히 제거되었다. 농촌사회의 구석구석에 보수세력이 남아 있었고 일반적인 사회의식으로도 적서차별의 나쁜 관행이 내재하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위로는 공경대부를 비롯하여 먼 시골의 향유에 이르기까지 많은 서얼들이 승반하여 조선 말기의 신분구조 변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아울러 서얼통청운동의 성공은 기술직 중인들을 비롯한 중간신분층의 승반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일부 서얼은 승반운동 대신 새로운 사조와 신흥종교인 동학이나 외래종교인 서학에 신속히 귀의하여 다음 세대를 담당할 주역으로서 떠오르기도 하였다.210)李鍾日, 앞의 글(1987), 44∼45쪽·57∼79쪽.

<李鍾日>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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