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3. 중간신분층의 향상과 분화
  • 1) 중인층의 지위상승과 분화
  • (1) 중인의 특성과 성장배경

(1) 중인의 특성과 성장배경

 中人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그들의 동류의식이 형성되어≪雜科榜目≫이 편찬되기 시작한 연산군 4년(1498) 이후로 보는 학설도 있지만, 조선 후기까지 세력이 컸던 잡과집안은 17세기를 거치면서 대개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 잡과합격자를 배출한 성씨는 439씨족에 달하는데 그 중 합격자를 100명 이상 배출한 16씨족이 전체의 40%를 차지하였다. 대개 20씨족에서 합격자의 약 반수를 배출한 셈이다. 이에 반해 5명 미만인 성씨가 288씨족에 달해 잡과가 소수 명문씨족들에게 독점되어 간 경향이 엿보인다. 과별 합격자의 수는 譯科가 가장 많고, 籌學(算學)·醫科·雲科(陰陽科)·律科의 차례였다. 이것을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사 항 역 과 의 과 운 과 율 과 주 학 종 합
합격자 총수
합격자 배출 성씨수
2937
287
1523
216
831
133
709
145
1627
90
7627
439
과별 30대성 비율
과별 10대성 비율
부친 본과합격률
부친 잡과합격률
처부 잡과합격률
60.0
31.3
34.4
41.6
24.4
57.7
29.5
30.5
42.9
31.2
66.1
37.1
28.2
38.8
12.1
58.8
35.1
3.9
9.3
4.9
86.9
62.3
40.4
55.5
43.8
65.9
38.4
31.4
41.5
26.7

<표 1>각과별 중인씨족의 특성211)崔珍玉,<朝鮮時代 雜科設行과 入格者分析>(이성무·최진옥·김희복 편,≪朝鮮時代 雜科合格者總覽≫,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90), 27쪽.
김필동,<조선시대 ‘中人’신분의 형성과 발달>(≪韓國의 社會와 文化≫21,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3), 246쪽을 필자가 수정.

*단위:상단은 실수, 하단은 백분율(%)

 위의<표 1>에서 보면 잡과 성씨의 2%를 조금 넘는 10대 성씨가 전체 합격자의 4할 정도를 배출하고 잡과 중에 7% 정도인 30대 성씨가 6할 이상을 차지하여, 잡과 중에 명문집안의 독점화가 진행된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세습율에서도 부친의 본과합격률이 3할 이상 되고 다른 잡과합격률까지 합치면 4할 정도 되는 데에서도 확인된다. 잡과 중에 가장 세습율이 높은 것은 주학으로 부친의 잡과합격률이 55.5%에 달하였다. 각 시기별로 이러한 경향의 일단을 역과에서 보면 다음의<표 2>와 같다.

시 기\합 격 합 격 자 본관/성 씨 족 별
평균합격자
20대 성씨
연산군 4년∼선조
(1498∼1608)
79명
(161?)
60씨족/29성
(110?/47?)
1.3명
(1.5?)
40.5%
(33.5?)
광해군∼현 종
(1609∼1674)
374 124/44 3.0 48.7
숙 종∼경 종
(1675∼1724)
587 118/37 5.0 55.5
영 조∼정 조
(1725∼1800)
687 112/36 6.1 57.2
순 조∼철 종
(1801∼1863)
590 79/29 7.5 62.2
고종(1864∼1894) 530 87/31 6.1 60.4
전체시기
(1498∼1894)
2,847명
(2,929명?)
225/57
(257?/61?)
12.7
(11.4명?)
51.0

<표 2>조선시대 시기별 역과합격자와 성씨212)金良洙,≪朝鮮後期 譯官身分에 관한 硏究≫(延世大 博士學位論文, 1986), 167쪽.
―――,<朝鮮後期의 社會變動과 技術職中人-譯官層을 中心으로>(≪東洋學≫20, 檀國大 東洋學硏究所, 1990), 355쪽.

 역과에서는 광해군에서 현종까지(1609∼1674) 합격자 성씨가 124씨족이던 것이 19세기 중반인 철종 때까지 79씨족으로 격감하고 고종대(1864∼94)에는 87씨족으로 줄었다. 20대 성씨가 차지하는 비중은 48.7%에서 60.4%로 상승하였다. 씨족별 합격자수는 200여 년 사이에 3명에서 6명으로 증가하였다. 여기에서도 잡과집안은 조선 말기까지 일부 명문씨족에 편중되면서 문벌을 형성하고, 세습화되어 나간 것이 가장 큰 특징으로 확인된다. 이상과 같이 잡과집안은 잡과 전문관직을 계승하며 또한 중인 안에서 신분내의 결혼을 행함으로써 자신들의 신분 속성을 더욱 공고히 하였다.

 중인들의 해외무역을 통한 富의 축적과 의식의 향상은 조선 후기에 이르러 현저해졌다. 특히 그들의 활동은 사회경제면에서 두드러졌는데 효종 6년(1655)까지 상평통보를 발행한 수십만 관이 중인 10개 집안의 재산에 해당하였다는 기록도 있다.213)≪孝宗實錄≫권 15, 효종 6년 12월 계해
金良洙,<朝鮮肅宗時代의 鑛業 및 鑄錢硏究-私企業資本의 形成과 그 影響을 中心으로->(≪史學硏究≫28, 1978), 81쪽.
중인들이 활약하던 왜관을 통한 사무역은 대륙의 정세가 안정되는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전반까지 번영하여 많을 때는 1년간에 은 6,000관에 달할 정도였다.214)田代和生,<朝鮮後期 韓·日間의 經濟交流>(≪韓日關係學術會議發表要旨≫, 韓國史學會, 1991), 106쪽. 중인들의 신분의식은 17세기 이후 詩社運動으로 나타났다. 역관시인 洪世泰가≪海東遺珠≫를 펴낸 이래 중인의 처지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흙 속에 묻힌 진주격으로 표현되었다. 중인은 외국문물의 도입이나 정보에 밝았고, 사고방식이나 행동이 현실적이며 변화에 민첩하고 계산적이어서 유교문화에 얽매이지 않았다. 그 결과 중인들은 개화운동의 선구자나 고위직관료로 진출하는 사례가 빈번하게 되었다. 개화당의 형성과 지도에 이바지하였던 역관 吳慶錫과 劉鴻基나, 또는 갑신정변에 깊이 관여했던 승려 李東仁이 그 실례가 될 것이다. 조선 말기 정치지배층 가운데 잡과출신이 1.5% 이상 되었고, 개화관료 중에는 11.6%가 잡과출신이었다.215)金泳謨,≪朝鮮支配層硏究≫(一潮閣, 1986), 233쪽.≪大韓帝國官員履歷書≫에 기록된 3,150명 중에는 적어도 67명 이상이 잡과의 합격자였다. 갑오개혁 때 내각의 대신 가운데는 과반수가 서자나 중인의 출신배경을 갖고 있었다.216)柳永益,≪甲午更張硏究≫(一潮閣, 1990).

 중인이 담당하던 전문업무는 과거 양반사회에서는 2차적이었으나 근대사회에서는 1차적으로 중요한 지식이었다. 근래 사회학방면에서는 조선시대에 양반체제가 500년 이상 지속된 원인의 하나로서 중인 중에 하급 행정실무자들이 현실적으로는 지배엘리트의 일부가 되어 하층의 불만, 분노와 공격으로부터 지배자인 양반계급을 보호하는 기능을 수행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조선왕조는 그만큼 오래 지속될 수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 이러한 견해는 조선시대의 중인계급을 이해하는 데 한 가지 시사가 되고 있다.217)송 복,<양반체제의 지배 지속성:중인계급의 구성과 기능을 중심으로>(≪사회계층:이론과 실제≫, 서울대 사회학연구회 편, 다산출판사, 1991), 485∼494쪽.

 일반적으로 조선 후기의 신분변동은 양란 이후 17세기에는 신분이 강화되는 보수화현상이 지배적이다가, 18세기 이후 크게 동요되면서 지배층이 증가하였다고 인식되었다.218)Edward W. Wagner, Social Stratification in Seventeenth Century Korea:Some Observations from a 1663 Seoul Census Register, Occasional Papers on Korea No.1 (Revised edition 1974).
Susan Shin, The Social Structure of Kumwha County in the Late Seventeenth Century, Occasional Papers on Korea No.1 (Revised Edition 1974).
盧鎭英,<17세기 초 山陰縣의 社會構造와 그 變動>(≪歷史敎育≫25, 1979).
김인걸,<조선후기 신분사 연구현황>(近代史硏究會編,≪韓國中世社會 解體期의 諸問題(下)-朝鮮後期史 연구의 현황과 과제-≫, 한울, 1987), 350쪽.
이와 같은 사실은 연대기를 위주로 한 자료들을 통하여 이 시기의 사회경제적 변화와 더불어 조정이 취했던 중인에 대한 정책을 살펴보는 가운데 그 실상을 점검할 수 있다. 그러한 점검 결과도 조선에서 피라미드구조를 이루었던 신분구조가 숙종대 이후 점차로 상층부가 증가되는 추세로 변동이 진행되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데 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경종 원년(1721)에 좌의정 李健命이 良役을 변통하는 일로 箚子를 올린 가운데에서도 이런 사실을 엿볼 수 있다.219)≪景宗實錄≫권 4, 경종 원년 8월 임술. 그는 “지금 100리 고을이 1,000호 정도지만 麻布를 내어 나라를 지키는 양민은 10분의 2나 3에 지나지 못하고, 양반·중인·서얼로서 閒游의 무리들이 10분의 8이나 9를 차지하고 있으니, 양민은 살을 깎아 뼈에까지 이르고 族徵·隣徵에 지쳐 목매어 죽는 자까지 있다”고 하였다.

 18세기에 들어 역관무역은 숙종 32년(1706)까지 실시되다가 이듬해에는 사상인들에게 柵門後市가 넘어가고, 다시 영조 4년(1728)부터 동왕 30년까지 역관들이 차지했다가 灣商에게 넘어갔다. 마지막으로는 역관제의 존속을 위해 정조 11년(1787)부터 동창 19년까지 허용된 이후로는 노론 등 세력가의 보호를 받던 역관들의 특권무역은 사상층과의 대결에서 패퇴하고, 마침내 辛亥通共(정조 15년;1791) 등 자유시장정책과도 연계되어 사라지게 되었다. 18세기를 통하여 역관무역은 두 차례 다시 허용되었으나 한 세기 동안에 역관들이 무역권을 장악했던 것은 통산하여 40년 정도였다.

 그러나 역관들의 비용을 위해 對淸使行에서 정조 11년에 한 사람마다 허용된 八包量이 인삼 120근으로 정해진 뒤 철종 2년(1851)에 이르기까지는 40,000근으로 늘어났다.220)吳 星,<朝鮮後期 人蔘貿易의 展開와 蔘商의 活動>(≪19세기 한·일 양국의 전통사회와 외래문화≫-제 5차 한·일합동회의 책자-, 한일문화교류기금, 1991), 7∼10쪽.
李泰鎭,<國際貿易의 성행>(≪韓國史市民講座≫9, 一潮閣, 1991), 82쪽.
또한 일본과의 공식적인 사행은 순조 11년(1811)에 끝났지만 대마도까지 가는 역관사행은 19세기 중반까지 계속되어 역관들의 무역기회는 지속되었다. 이후에는 주로 동래상인이나 송도상인들이 무역을 주도하였는데 19세기에 이르러 대표적인 무역품으로 등장한 소가죽은 왜관에서 이루어진 일본과의 私貿易에서 11,000장 내지 25,000장이 거래되고, 청과의 책문후시에서는 20,000장 이상 수출되었다. 고종 11년(1874)에서 다음해까지 일본에 수출한 牛皮價는 11,512관으로 수출 전체의 35.7%에 해당하여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221)金東哲,<19세기 牛皮貿易과 東萊商人>(≪韓國文化硏究≫6, 釜山大 韓國文化硏究所, 1993), 406·435쪽.

 사회변동에 따르는 인사제도의 변화를 보면 숙종 11년(1685)에는 銓郎薦代法이 폐지되기에 이르렀다. 정조 즉위년(1776) 5월에는 임금의 본의는 아니되 이조낭관 通淸權을 복구하였으나 이것은 그 다음 정조 13년 12월에 전랑의 통청권을 다시 파함으로써222)≪正祖實錄≫권 28, 정조 13년 12월 기미. 새로운 정치집단적 진출로 구실을 하던 당하관의 정치적 위치가 약화되고, 국왕의 측근세력들이 강화되면서 권력기반의 축소현상이 일어났다. 붕당의 기능이 크게 약화된 상태에서 정조가 갑자기 죽자 지금까지의 탕평정국에서 換局형태의 정변으로 이어져 권력기반은 극도로 축소되었다. 「勢道」 위탁이라는 명목으로 정국운영이 왕실 외척가문이 주도하는 몇몇 京華閥閱로 구성된 특권적 권력집단에만 편중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정조대의 탕평정국은 청요직 권한의 혁파와 군영의 강화로 왕권 및 집권적 관료제의 강화가 이루어지고, 도시와 농촌에서 성장해 왔던 향반이나 역관·서얼·상인세력 같은 중간계층의 성장을 정치구조 안으로 수용하려는 노력들이 기울여졌고, 유이민과 노비계층의 안정과 지위향상론이 탕평적 정치운영론 속에서 수용된 점이 특징이었다.223)鄭奭鍾,<正祖·純祖年間의 政局과 茶山의 立場>(≪丁茶山과 그 時代≫, 民音社, 1986).

 다음에는 18세기 중반 이후 중앙의 중인직에 대한 정치권의 배려를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영조 17년(1741)에는 蔭官인 참하관과 雜技의 6품에 오르는 법을 다시 정하였다. 천문·지리·命課學 및 治腫敎授와 吏文學官, 能麽兒郞廳은 모두 전부터 정한 대로 60개월 만에 陞六시키도록 하였다. 이것은 이조판서 越尙絅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224)≪英祖實錄≫권 53, 영조 17년 정월 신묘. 또 사간원에서 較子를 탔던 일로 지평현장 吳志哲과 금교찰방 李喜謙이 모두 중인과 서얼출신으로 방자하게 금법을 범하였으니 파직하라고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225)≪英祖實錄≫권 53, 영조 17년 2월 임술. 영조 18년에는 과거에 京都 5부에 각기 중인과 서얼로 주부와 참봉 1인씩을 두고 업무를 관장시켰던 것을 체모가 서지 않아 행정이 실현되지 않은 당시 실정을 고려하여 士夫출신으로 바꾸되 주부는 도사로, 참봉은 봉사로 고쳤다. 그리고 中庶의 불만을 보완하기 위해서는 禮賓寺와 典獄署에 각기 참봉을 두고 중서출신으로 임명토록 하였다.226)≪英祖實錄≫권 56, 영조 18년 10월 기해. 그러나 그로부터 2년 후 경도 5부의 관제를 다시 개정하여 중서출신도 사옹원의 예에 따라 봉사에 다시 승진되도록 하였다.227)≪英祖實錄≫권 59, 영조 20년 2월 을해. 또한 吏隷도 廩料를 받도록 하여 중인신분의 생계를 고려하였다.

 영조대는 하층농민 등의 항거에 대처하는 격동기로서 농민부담이 경감되는 균역법을 실시하였으며, 한편 영조 3년(1727)부터 이듬해까지 변산에 나타난 노비도적은 이 시기 사회실정의 한 단면이었다. 영조 45년에는 하층 천민과 농민의 이해에 접근하고 노론집권의 안정을 기하기 위하여 掌隷院이 혁파되었다. 그러나 영조 말년에는 척신당의 전횡이 붕당의 폐해보다 무서울 지경이 되었다.

 위와 같은 정세에서 부친을 여의고 洪國榮 등의 보호를 받아 즉위한 정조는 오로지 주위에 친위세력을 부식시키는 데 마음쓰게 되었다. 정조 원년(1777) 3월에는 잡과 초시 전날에 고시를 공정하게 하고, 본디 정원에 차지 못하더라도 우수한 사람을 뽑도록 특별히 하교하였다.228)≪正祖實錄≫권 3, 정조 원년 3월 임오. 이런 중인 이하에 대한 관심은 같은 달 서얼소통에 관한<丁酉節目>의 반포로 나타났다.229)≪正祖實錄≫권 3, 정조 원년 3월 정해. 다음해에는 잡직에 관한 官敎釐整을 반포하여 참상은 3계를 넘지 않게 하고 참하는 2계를 넘지 않도록 하였다.230)≪正祖實錄≫권 5, 정조 2년 6월 임진. 그리고 참상은 900일에, 참하는 450일에 벼슬을 옮겨 加階시켰다. 정조 4년에는 사람을 쓰는 것이 넓지 못함을 논한 부수찬 韓光敎의 상소가 있었고,231)≪正祖實錄≫권 10, 정조 4년 10월 정묘. 정조 8년에는 중서는 僉正으로 한도를 삼는데 이후로는 어떻게 한계를 정할지를 병조판서가 품의하기도 하였다.232)≪正祖實錄≫권 17, 정조 8년 4월 갑인.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관직이 너무 남발되었던지 정조 11년에는 근래 관직이 분수를 넘은 것이 많다 하고, 한성판윤의 자급을 資憲으로 내리도록 특허하였다.233)≪正祖實錄≫권 24, 정조 11년 10월 임인. 정조12년에는 남인 蔡濟恭을 우의정으로 등용하면서 재상권의 강화조치를 내림으로써 노론 내부에 갈등이 생기고 僻派의 권력집단으로서의 결집이 이루어졌다는 설도 있다.234)思悼世子의 죽음에 대한 의리논쟁이 야기된 후의 대립으로 정조 19년에 僻派가 결집되었다고 한다. 다시 정조 14년에는 재상 채제공의 건의에 따라 근래 승문원이 심히 적체되어 14년이나 된 자도 참하에 있으니 승문원 관원 및 郵官으로 10년 이상된 자는 6품으로 승진시키도록 조치하였다.235)≪正祖實錄≫권 29, 정조 14년 2월 정축.

 정조 15년 신해통공을 전후하여서는 정조 원년시기와 마찬가지로 잡과중인에 대한 임금의 주의가 절정을 이룬다. 정조 14년에는 사역원·전의감·관상감제조와 형조당상이 잡과합격자를 거느리고 입시하여 親試製講하고 賜科토록 하였고,236)≪正祖實錄≫권 31, 정조 14년 8월 경오. 雜科講冊을 1차 시험과 2차에서 모두≪大典通編≫으로 통일토록 지시하였다.237)≪正祖實錄≫권 31, 정조 14년 9월 정해. 정조 16년에도 잡과합격자를 임금이 친히 부르는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238)≪正祖實錄≫권 34, 정조 16년 4월 신유. 신해통공이 있던 정조 15년에는 서류와 중인을 騎射將에 천거토록 하였고, 임금이 태학에 나이대로 앉도록 하였으니 문관은 돈녕부 都正에, 음관은 部令에 천거토록 銓曹에 채근하였다.239)≪正祖實錄≫권 32, 정조 15년 6월 정미. 이런 조치들은 정조 13년 수원의 읍치를 八達山 아래로 옮기고 장차 천도할 계획이 수립된 상태에서 주변세력을 결집하기 위한 정리로 해석된다. 이것이 어느 정도 해결되고 채제공이 영의정에 오르는 정조 17년에는 임금도 자신을 갖게 되었다.

일은 평균에 있는 것인데 하물며 인사행정에 있어서랴. 오래 굽혔던 자는 모두 수용하였다. 官案에는 嫡子만이 아니고 모두 거론하였다. 전조에 庶類로서 오래 저지되었던 자들은 차차 수용토록 하라. 中人 중에 또한 이런 자가 있으면 일체 수용하라(≪正祖實錄≫권 37, 정조 17년 5월 계모).

 이런 가운데 灣商後市가 다시 열린 다음해인 정조 20년에는 임금이 근래 조급하게 奔競하는 것이 풍습을 이루어 30미만의 나이에 緋玉에 천거되는 것을 걱정하였고, 우의정 尹蓍東은 중인 이하 연소자는 일이 혹간 소루하고, 노성한 사람은 거의 주밀하다고 하였다.240)≪正祖實錄≫권 44, 정조 20년 4월 을유.

 그러나 정조대에도 노론의 우세 속에 남인을 등용하고, 사회세력으로서 취약한 잡과중인 등을 취합하려는 정책은 노론측의 반격에 직면하였다. 신해통공 등 자유정책이 실시되던 정조 15년(1791)에는 서학교인 尹持忠이 제사를 폐지한 이른바 「珍山事件」이 적발되고 형조에 남인과 중인출신 邪學罪人들이 포획되었다. 이 때 정조는 다음과 같이 타이를 수밖에 없었다.

대체 中人이란 양반도 아니고, 常人도 아니고 그 중간에 있어 가장 교화되기 어려운 존재이다. 權日身·崔必恭 등에게 의리를 일러 스스로 새롭게 되게 하라(≪正祖實錄≫권 33, 정조 15년 11월 경진).

 그 후 정조가 죽고 세력변동에 의하여 집권한 노론 벽파는 순조 원년(1801) 천주교 탄압을 빙자하여 辛酉邪獄을 일으켜 반대세력을 잡아들였다. 이 때 좌의정 李時秀는 그들이 정조 15년 무렵 刑官으로서 옥사를 다스렸을 때, 교인들이 다시는 사학에 들지 않겠다고 하여 정조가 살려주고 최필공은 審藥으로 임명했는데 지금 우두머리를 모른다고 하니 안타깝다고 하였다.241)≪純祖實錄≫권 2, 순조 원년 2월 무오. 그 후 포도청 結案에는 중인 崔仁喆이 周文謨를 높이 받들어 도당을 체결하고 형륙을 달갑게 여겨 죽음에 이르러서도 변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또한 역관출신 金顯禹가 周哥를 맞이해 흉상을 걸어 놓고 예배를 보고, 妖書를 외면서 남녀가 뒤섞여 거처하였다고 하였다.242)≪純祖實錄≫권 3, 순조 원년 5월 정유.

 여기에서 조선에 천주교가 수입된 이후 신앙공동체의 지도층을 살펴보면, 정조 8년부터 정조 15년 진산사건이 발생하기까지의 초창기에는 양반세력이 주도하였으나 그 후 신유사옥이 일어나기까지는 중인세력이 중추를 이루게 된 것이 주목된다. 곧 초창기 지도인물 12명 가운데는 중인출신으로 金範禹와 崔昌顯·최필공 외에 양인 1명을 제외하고는 권일신·李蘖·丁若銓 등 8명이 모두 양반의 신분에 속하였다. 그러나 진산사건 이후 10년간에는 지도층이 38명으로 확대되면서 교회지도층의 주류가 중인신분으로 전환되고 있었다. 이들을 신분별로 분석해 보면 양반이 丁若鍾 등 9명(23.68%), 중인이 金啓完 등 21명(55.26%), 양친이 李存昌 등 5명(13.16%), 성명미상이 3명(7.89%)으로 나타났다.

 중인의 거주지는 모두 서울이었는데 잡과중인으로는 金宗敎 등 의약계통이 8명이고, 崔仁吉 등 역관도 3명 이상으로 보인다. 역관계 중인들은 먼저 양반출신 교인과 함께 교회를 창설하고 초기 교회의 기초를 닦고 조직적 활동을 폈다. 그리고 의관계 중인은 약방을 큰 거리에 설치·운영하면서 집회장소를 제공하고 약국을 출입하는 사람을 대상으로 자연스럽게 전교활동을 폈다.243)趙 珖,≪朝鮮後期 天主敎史硏究≫(高麗大 博士學位論文, 1984). 지도자 중에는 정조 9년 秋曹적발사건으로 죽은 역관 김범우의 서얼형제 金履禹도 窩主로서 활동하다가 순조 원년에 순교하였다. 추조적발사건 이후 양반신자들은 배교한 사람이 많았으나 중인신자들은 오히려 천주교 확산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해 나아갔다.

 역관 김범우의 집안은 본관이 경주김씨로서 16세기에는 가장 많은 역관을 배출했던 집안이었다. 김범우가 귀양간 후에도 그의 형제들은 계속하여 서울에 거주하였다. 역과에 합격한 후 봉사를 지냈던 金績禹는 친척집에 세들었고 이우와 현우도 서울에서 신앙생활을 하며 자기집을 집회장소로 제공하기도 하였다. 그 후 김범우의 직계후손은 밀양으로 이주하였다. 그의 손자 金東曄은 밀양에 있던 金左根의 田場을 관리하는 집사로 있었고, 선혜청의 屯監도 맡았다. 그는 친척 동생의 소개로 안동김씨 일문인 김좌근의 재산관리인이 되었고 중앙의 중인들과도 계속 유대를 맺었다. 그러나 그의 집안은 더 이상 잡과중인을 배출하기는 어렵게 되었다.

 위의 경우는 조정에서 금지한 천주교를 믿은 후로 서서히 신분이 하강해 가는 사례가 될 수 있겠으나 민중운동 차원에서는 큰 공헌을 하였다.244)孫淑景 편,≪中人 金範禹家門과 그들의 文書≫(천주교 부산교구순교자현양위원회, 1992). 이런 위험을 무릅쓰고 순조 23년에는 당상역관 劉進吉이 천주교에 입교하여 신부들을 맞아들였고, 金大建 등에게 중국어교육을 시키는 등 큰 공헌을 하고 헌종 5년 己亥迫害 때 순교하였다. 이것은 중인층의 새로운 사회를 향한 의식의 성장이라는 면에서 높게 평가될 문제였다.

 조선시대에 잡과중인의 구성변화를 역과의 사례로 보면 다음과 같다. 조선시대에는 잡과에 일부 씨족의 편중 경향이 심하여 역과에서 합격자의 1/10도 못되는 20대 성씨가 전체의 51%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각 시기마다 변동이 있어 16세기에 가장 합격자를 많이 냈던 경주김씨와 밀양변씨는 영조·정조대에 6위와 4위로 밀려났다. 18세기 이후 급히 부상하는 씨족으로는 전주이씨·천녕현씨·남양홍씨 등을 들 수 있다. 18세기 전반 역과에서 6위∼10위를 차지한 금산이씨·한양유씨·제주고씨·해주이씨·순흥안씨 등은 새로운 세력의 등장으로 주목해 볼 수 있다.245)金良洙, 앞의 책, 72∼73쪽. 그러나 19세기 후반에 역과생도에 입속하기 전의≪完薦記≫를 분석한 것을 보면 대부분이 잡과중인의 자제로서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신분제 운영이 계속되었을 것으로 보인다.246)≪完薦記≫(국립중앙도서관소장 필사본 MF1 81-256).
金玄穆,≪朝鮮後期 譯學生徒 薦擧에 관한 硏究-19世紀 前半 完薦記를 중심으로-≫(仁荷大 博士學位論文, 1994). 상급기술관에 대한 천거제는 完薦制였다. 완천에 합격하여야 生徒에 入屬하였고, 이들은 取才에 합격해야 祿官에 임명되었다. 취재합격자는 6품 이상의 고관으로 승진하려면 雜科에 합격해야 하였다. 완천과정은 폐쇄적이며, 소수의 명문 중인집안에 유리하게 운영되었음이≪通文館志≫ 등에 보인다. 철종 12년(1861)부터 고종 30년(1893)까지≪完薦記≫에 있는 被薦者 童蒙 700명, 閑良 120명, 幼學 125명을 더한 945명을 분석해 본 결과 대다수가 중앙전문직 중인의 자손이었다. 피천자의 아버지와 할아버지 가운데 文武科합격자는 l0% 미만이었고, 피천자 중 幼學과 閑良의 4祖身分도 같은 실정으로, 이 때에 중인의 자손들도 幼學을 칭했음을 알 수 있다. 생도가 나중에 역과에 합격한 비율은 14.6%에 불과하였다.

 한편 근래에는 넓은 의미에서 중인에 속하고, 17세기 후반부터 서울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京衙前의 성장을 주시하는 경향이 있다. 이들은 조선 전기에는 取才로 충원되었지만 후기에는 주로 경아전집안에서 충원되었다. 이들은 서울의 「우대 (上村)」라고 부르던 삼청동에서 인왕산 기슭에 이르는 지역의 출신들로, 권세가의 傔人으로 들어가 그 세력을 이용하여 중앙관서의 서리로 진출하였다.≪續大典≫에는 101관청에 1,400명 정도의 경아전이 있다고 하였다. 이들은 나중에 폐쇄적인 집안을 형성하지만, 평민 내지 私賤에까지 개방되어 있었다.247)姜明官,<朝鮮後期 京衙前社會의 變化와 閭巷文學>(≪大東文化硏究≫25, 1990), 115쪽. 이들은 16세기 후반에 와서 중앙관서의 실무를 완전히 장악하고, 관청에 근무하면서 서리라는 직위를 이용하여 부정한 수단으로 손쉽게 치부할 수 있었다. 부정은 국가나 왕실의 재정을 담당하던 주요 관서에서 더욱 혹심하였는데, 영조 2년(1726)에는 병조의 서리가 군포 수십만 필을 횡령하고, 순조 20년에는 선혜청 서리가 50만 냥에 해당하는 물자를 횡령하고 효시되었다는 자료도 있다.248)≪英祖實錄≫권 10, 영조 2년 12월 기미.
≪純祖實錄≫권 23, 순조 20년 8월 계묘.
이들에게는 조선 초기부터 科田이 주어지지 않았고,≪經國大典≫반포 이후에는 녹봉조차 받지 못하였다. 벼슬을 마친 후에 驛丞이 될 수 있는 규정도 중종 때에는 폐지되었다.249)≪中宗實錄≫권 9, 중종 4년 8월 무자 및 권 79, 중종 30년 6월 기축.
姜明官, 앞의 글, 112쪽.
그러나 조선 후기에 와서 이들은 액정서의 잡직이나, 변장 등은 하급무관직, 그리고 지방관 따위의 직임으로 활발히 진출하였다.250)姜明官, 위의 글, 126쪽.
馬聲麟무리와 從遊한 林世載·千世弼은 모두 별군직으로 漆原·彦陽縣監이 되었고, 규장각서리였던 李興潤의 아들 李重根도 역시 별군직에 충원되어 南陽府使에 이르렀다(劉在建,≪兼山筆記≫, 172∼173쪽). 특히 정조 이후 규장각서리는 領籤·司鑰, 밖으로 郵官·邊將·五衛將·衛將·殿監·別提 등 除拜가 매우 많아 일찍이 경아전에게 없던 성사를 이루었다.

 이들의 치부가 쉬워졌던 것은 조선 후기의 생산력이 조선 전기보다 급속히 확대되었기 때문이었다. 양란 후에 경제규모가 회복기에 접어들고 대동법과 균역법의 실시로 인한 상공업의 발달이 곧 생산력의 증대로 이어지면서, 경아전들은 여기서 발생한 잉여생산을 통치구조가 이완된 틈을 타서 중간에서 흡수하고 부를 증식하였다. 중개무역을 통했던 역관은 부는 무역활동에 재투자되는 자본의 속성은 갖고 있었으나, 경아전의 부는 생산활동과는 유리된 것이었고, 재생산을 위해서 재투자자본으로 축적해야 하는 요건을 갖고 있지도 않았다. 여기에서 그들의 부는 소비적이고 유흥적으로 흐를 소지가 농후하였다. 이것은 조선 후기에 경아전들이 문학과 음악 및 그림 등 예술활동에 기울어지는 기반이 되었다.

 洛社 이후 본격적으로 전개된 경아전의 閭巷文學 활동은 대개 19세기 말까지 지속되었다. 18세기 이들의 詩社활동은 대개 두 시기로 보아 17세기의 끝에서 18세기의 전반까지가 한 시기이고, 18세기 중반 이후 18세기 말까지가 한 시기이다. 그 중 실세한 역관집안출신 鄭來僑는 사회를 구성원들간의 이익추구의 대립장으로 파악하고, 사회적 불평들의 원인을 지배층의 이익독점에서 찾아 그 모순의 본질을 정확하게 터득하였다. 또한 경아전 시인 林光澤은 여항인의 예속상을 벗어나 사회모순의 해결에 대해 적극적으로 발언하기 시작하였다.251)姜明官,≪朝鮮後期 閭巷文學硏究≫(成均館大 博士學位論文, 1991), 83·148·248쪽.

 서유럽에서 최초의 公衆형태는 17∼18세기에 문학적 공중형태였다고 한다. 그들의 토론주제는 처음에는 예술적 문제에만 국한되었으나, 점차 정치적인 문제로 바뀌어가면서 공중의 성격 또한 정치적으로 변모하여 갔다. 이러한 변화형태에서 보면, 18세기 조선사회에서 나타난 양반사대부의 독점물이었던 지식의 대중적 확산과 서울주민들이 소설·판소리 등 예술활동을 즐기는 경향은 이른바 문화적 공중의 형성 및 확산단계에 해당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252)김호기,<공중과 의회민주주의의 구조적 변동-하버마스의 정치이론을 중심으로->(≪연세사회학≫10·11, 연세대 사회학과, 1990).
조성윤,<조선 후기 서울지역 중인세력의 성장과 한계>(≪역사비평≫21, 1993), 245쪽.

 이 때에 경아전의 부의 축적이 큰 제재를 받지 않고 가능하였던 원인은 지배계급과 분배하는 공생구조가 갖추어졌던 데 있었다. 지배관료들은 조세를 통해 할당받는 것보다 중인들을 통해 확보할 수 있는 재부의 양이 훨씬 많았기 때문에 경아전의 중간착취를 묵인하거나 비호해 주면서 막대한 양의 상납을 받았다. 그러나 신해통공 이후 19세기의 상황은 六矣廛이나 市廛 중심의 특권상인의 힘이 크게 약화되고, 안동김씨정권이 자유상인까지도 어느 정도 장악하고 있었다. 동시에 私商들은 권력에 의존하는 가운데 자신의 경제활동을 전개해 나가는 모습을 보였다.253)조성윤, 위의 글, 242쪽. 이리하여 18세기에 다소 근대지향성을 함유하던 여항문학은 19세기에 와서 여항인층의 본래 속성인 예속성이 도리어 강화되면서 체제에 안주하는 소시민적인 것으로 방향을 잡기 시작하였다.254)姜明官, 앞의 책, 249쪽. 대개 숙종때부터 1730년대 사이에 역관의 국제무역이 퇴조하는 시기에 주도권을 잡기 시작한 경아전의 여항문학활동은 18세기에 정부재정의 확대에 힘입어 크게 안정적으로 발전하였다. 중간착취로 정부세입이 줄고 세도정치권력이 주도권을 쥐는 19세기에 와서는 사회의 보수반동화 기운이 나타나게 되었고, 그 동안 여항시단의 외곽에 있었던 기술직중인들이 다시 등장하여 시사활동에 참여하고, 군소시사가 많이 출현하여 명멸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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