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4. 서민층의 성장
  • 1) 서민의 경제적 성장
  • (3) 상인의 경제적 성장

(3) 상인의 경제적 성장

 조선시대에는 상업을 末業 또는 賤業이라 하여 천하게 여겼다. 때문에 양반신분은 상업활동에 참여하지 않았다. 18세기 이후에는 상당수의 양반층이 노복이나 하인을 통하여 혹은 직접 상업에 종사하는 예도 있었지만, 사회분위기가 이를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단계가 아니었기 때문에 상업종사자는 주로 서민층이었다.

 조선시대 상인을 구분하자면 크게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의 市廛商人, 지방鄕市의 행상, 대외무역 종사자로 나눌 수 있다. 이들 상인의 활동은 상업에 대한 조선왕조의 末業觀으로 인해 상당한 제약을 받았다. 시전은 관청의 수요품을 조달하는 한편, 도시민의 생필품을 판매하던 상설시장으로 시전상인은 관부와 결탁하여 특권을 행사하였다. 지방의 향시는 농민의 농산물이나 부업으로 생산된 가내수공업품 위주였기 때문에 상품유통이 활발하지 못하고 상행위는 미미한 수준이었다. 대외무역은 중국·일본을 대상으로 사신들에 의해 행해진 공무역으로 국가의 독점하에 이루어졌다.

 이러한 상업계에 변화가 오기 시작한 것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난 17세기 후반부터였다. 농업생산력의 증대와 수공업의 발달 등으로 생산력이 증진되고, 금속화폐의 보급과 대동법의 시행으로 조세방법이 바뀌고, 상품경제·화폐경제가 발달하는 등 유통구조에 변화가 생겼다. 이에 따라 공인·私商·客主·旅閣 등 새로운 상인층이 대두하면서 상인들의 활동이 활발해졌다.

 공인은 대동법 시행 이후 각종 공물을 쌀로 대납하면서 국가가 貢價를 지급하고 필요한 물품을 구매·조달하도록 하면서 성장한 상인이다. 왕실과 각 관부의 수요품을 구매하여 납품하는 공인들의 물품구매 활동은 서울을 비롯해 지방의 장시에 걸쳐 활발히 전개되었기 때문에 상품유통을 자극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들은 조달권을 가진 상품에 대해 禁亂廛權을 행사하거나 수공업제품인 경우 선대제적 수공업장을 경영하면서 특권적 상인으로 성장하여 갔다.

 그러나 후기로 올수록 정부에서 시가에 가까운 공가를 지출하였기 때문에 공인들의 이윤은 줄어들게 되었다. 이러한 정책은 공인층을 분해시켜 공가 자체의 이윤을 추구하는 층과 이윤 외에 유통 및 제작과정에서의 잉여와 공인권이 보장하는 특권을 추구하는 층으로 나뉘어졌다. 전자는 18세기 이후 점차 도태되어 갔으나 후자는 계속 공인권에 투자·성장해 갔다.365)吳美一,<18·19세기 貢物政策의 변화와 貢人層의 변동>(≪韓國史論≫14, 서울大 國史學科, 1986).

 사상인층은 조선 후기 상업계를 재편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상인들이었다. 토지로부터 유리된 농촌인구가 도시로 유입되어 상업인구가 증가하면서 대두된 사상인층의 성장은 시전상인을 중심으로 하는 기존의 체제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17세기 이후 서울에는 鐘路와 서대문 밖의 梨峴, 남대문 밖의 七牌에 시장이 서면서 사상들의 세력이 더욱 커졌다. 지금까지 특권을 행사하던 시전상인은 사상인층으로부터 상권에 침해를 받게 되자 금난전권을 얻어 전매권을 행사하기에 이르렀다. 시전상인들은 영세상인들을 난전이라 하여 금압하면서 상품전매권에 의거, 상품을 싼값에 매점하여 물가를 조정하고 가격을 앙등시키는 폐단을 낳았다. 이러한 官商 독점체제의 모순이 심화되는 가운데 18세기 이후에는 수공업자·농민·어민 등 소상품생산에 기반을 둔 富商都賈가 난전세력의 주체를 이루어 갔다. 경강상인, 칠패·이현의 상인, 광주·양주·포천 등 서울 주변의 상인들로 구성된 사상 都賈에 의해 관상체제는 쇠퇴해 갔다.366)金玉根, 앞의 책.

 경강 주변의 사상과 시전이 아닌 공인계열의 상인이 성장하게 되자 시전상인의 금난전권이라는 독점권만으로는 사상인들의 난전을 억제할 수 없었다. 정부는 난전 금압정책을 완화하고 상업의 자유를 신장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전환하였다. 신설 시전을 금압하지 않고 자유판매를 허용하고 금난전권지역을 제한하여 六矣廛 이외의 물종에 대해서는 자유판매를 허용하였다. 정조 15년(1791년) 정부는 육의전을 제외한 모든 시전상인들로부터 금난전권을 박탈하는 「辛亥通共」을 시행하였다. 이제 통공정책으로 사상인들은 자유로운 상업활동을 보장받게 되었던 것이다.367)姜萬吉,≪朝鮮後期 商業資本의 發達≫(高麗大 出版部, 1974), 137쪽. 시전은 물론 일반 공인에 대해서도 독점구매권과 금난전권을 철폐하기에 이르렀다.

 松商·江商·灣商·萊商 등 사상인의 활동은 규모가 크고 활동범위도 상당히 넓었다. 개성상인(송상)은 대동법 실시 이후 蔘貢을 둘러싸고 이윤을 추구할 수 있는 여지가 마련되자 인삼을 상품화하여 상업적 이익을 취하였으며, 17세기 말부터 18세기 초엽에 걸쳐 인삼의 재배가 가능하게 되자 인삼의 상품생산과 판로를 확대하여 갔다. 의주와 동래상인과도 연결하여 중국과 일본을 잇는 중개무역에도 관여하였다. 이들은 인삼을 공식적으로 중국에 수출하는 것 외에도 밀수출로 크게 이득을 보았다. 17세기 중엽에 이미 인삼밀상에 종사하는 서울과 개성상인들이 모두 부유했다고 할 정토로 자본을 축적해 갔다.

 밀매를 통하여 자본을 축적한 潛商 가운데는 蔘圃경영이라는 자본주의적 상품생산에 투여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도 하였다. 이들은 생산지와 소비지를 연결하는 도고상업을 전개하여 자본집접에 성공하였다. 19세기 이후에는 이들의 삼포경작이 더욱 발달하게 되며, 이들이 얻을 수 있던 상업적 이윤도 한층 증가되어 갔다. 인삼상인의 자본규모는 상업자본의 단계에서 산업자본의 단계에까지 이르게 되었다.368)姜萬吉, 위의 책, 109∼130쪽.
吳 星,≪朝鮮後期商人硏究≫(一潮閣, 1989).

 경강상인(강상)은 17∼18세기 이후 삼남지방의 정부세곡 및 양반관료층의 소작료 운반의 대부분을 청부하여 대규모 운수업자의 위치를 확보하였다. 이들의 활동범위는 거의 전국적이었으며 취급상품은 곡물과 魚鹽이 중심이었다. 17∼18세기 이후 서울의 도시적 성격이 짙어짐에 따라 이들의 상권과 자본규모는 더욱 확대되어 고도상업으로 전개되었다.369)姜萬吉, 위의 책, 제2장 京江商人과 造船都賈 참조. 18세기 말경 이들은 점차 船匠 등을 고용하여 造船都賈까지 경영하였다. 이들의 조선업은 중앙관서는 물론 지방관아의 선박까지 건조·조달하게 됨으로써 일반화하였고 그 자본규모도 확대되어 갔다.370)姜萬吉, 앞의 책(1984), 191쪽.

 경강상인 외에 송도·평양과 같은 대도시지역의 미곡상인들도 도시의 인구집중으로 곡물소비량이 증가하게 되자 미곡을 대량으로 매집·판매함으로써 자본을 축적하여 갔다. 이들은 소유자본의 규모가 크고 상당한 이윤을 추구하는 부상들로 米價를 조정할 수 있는 능력도 지니고 있었다. 그 밖에 주로 외방을 왕래하면서 활동을 벌이는 미곡상인도 있었다. 선박 등을 이용하여 산지·포구·장시 등지에서 미곡을 매집하기도 하였고 중소도시와 향촌지역을 다니면서 미곡을 판매하기도 하였다.371)吳 星, 앞의 책, 제3장 米穀商人과 米價의 變動.

 이 밖에 목재를 취급하는 목재 사상들도 목재매매를 통해 적지 않은 상업적 이윤을 남겨 부상으로 성장하였다. 이들은 지향수령·관리·궁방 등과 연결하여 벌목에 나섬으로써 상업적 영향력을 강화하였다. 사상층 가운데 「부상」으로 성장한 상인들이 경제적 성장을 이루는 데는 자본력 못지 않게 관부와 밀착되거나 양반관료층과 결탁하는 것이 바탕이 되었다.372)吳 星, 위의 책, 제2장 木材商人과 松禁政策 참조.

 이처럼 사상인층의 상업활동이 활발해지자 물품의 운반·보관·자금지원 등과 관련하여 客主와 旅閣主人의 활동도 활발해졌다. 이들은 상품매매의 중개와 관련된 숙박·운송·보관·금융업 등도 수행하였다. 경강과 외방의 여객주인은 상품유통의 독점적 중개권인 主人權을 행사하여 상품유통권의 주도자로 행세하였다. 18세기 이후 이들은 양반·궁방·아문과 결탁하게 되었다. 18세기 말 19세기 초를 전후하여 주인권은 독립성을 확보하면서 더욱 강화되어 갔다.373)李炳天,<朝鮮後期 商品流通과 旅客主人>(≪經濟史學≫6, 1983).

 18세기 이전에는 포구가 어염의 생산 및 유통, 군사상의 방어, 세곡운송을 주된 기능으로 하였으나 차츰 큰 강 하구의 대포구들이 상품유통의 중심지로 발달하였다. 18세기 말 19세기 초를 지나면 소포구들도 상품유통의 거점으로 변하게 되었다. 포구는 장시와 연결되어 상품유통의 거점으로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18·19세기 상품유통의 발전은 장시의 발전과 외방포구의 확대로 나타났다. 이 과정에서 부를 축적한 浦口主人層이 독자적 상품유통권을 장악하려 하였고 도고상인으로까지 성장하였다.374)高東煥,<18·19세기 外方浦口의 商品流通 발달>(≪韓國史論≫13, 서울大 國史學科, 1985). 포구나 장시에서 상품유통을 매개하면서 포구상업을 주도했던 포구주인의 경우에 주인층의 명칭은 浦口主人·船主人·江主人·施客主人·浦主人·客主·旅閣·旅主人·邸店 등으로 다양해지는데, 이들의 명칭이 이처럼 다양하게 기능화되어 간 데서도 상업활동이 활발해진 면모를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이 시기에는 전국적으로 장시가 발전하여 대도시에 한정되었던 상설시장이 지방 중소도시로 확대되었고, 농촌에서도 정기적인 장시의 수가 증가하며 규모도 커지고 점차 상설화되어 갔다.≪東國文獻備考≫에 의하면 18세기에는 전국의 장시가 1,064개소에 이르게 된다. 숙종대를 전후한 시기에 장시의 개설이 지역적으로 확산되며 장시가 독자적인 유통망을 구축하게 되었다. 18세기 말 19세기 초를 지나면서 시장권이 형성되는 장시를 중심으로 주변의 장시가 소멸·신설·흡수 등의 과정을 거쳐 큰 장으로 발전하였다.375)韓相權,<18세기 말 19세기 초의 場市發達에 대한 基礎 硏究-慶尙道地方을 중심으로->(≪韓國史論≫7, 서울大 國史學科, 1981). 4∼5개의 장시가 날짜를 달리하면서 개시되어 각 지방의 장시는 일정한 범위내에 시장권을 형성하여 시간적·공간적으로 하나의 장시로서 기능하였다. 이와 같이 장시가 발달하게 되자 상업활동을 하는 상인의 수가 증가하고 활동범위도 확대되었다. 또한 상업에 대한 인식도 달라져 공민들 가운데 상업적 작물을 재배하여 팔거나 수공업제품을 생산·판매하여 소득을 늘려가기도 하였다.376)金大吉,<朝鮮後期 場市의 社會的 機能>(≪國史館論叢≫37, 國史編纂委員會, 1992), 174∼181쪽.

 이상과 같이 조선 후기 상인들은 다양한 상업활동을 통해서 경제적으로 성장하였다. ‘京江富民’·‘京江巨富’·‘江上富民輩’·‘五江富商輩’등으로 불리던 서울과 주변의 부상들, 송도·동래·평양 등 대도시에도 존재했던 부상들, 외방포구나 지방의 장시를 무대로 활동하는 사상층 가운데 부상으로 성장한 상인들을 통해서 경제적으로 성장한 상인의 면모가 잘 드러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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