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5. 노비신분층의 동향과 변화
  • 2) 노비정책의 전환
  • (3) 추쇄정책의 전환

(3) 추쇄정책의 전환

 조선 후기에 들어와 노비의 도망이 급격히 증가하고 있었는데, 이것도 사회경제구조의 변화와 무관하지 않았다. 즉 노비들이 도망하여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여건이 성숙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결과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는 노비인구가 격감하게 되었다. 기존의 연구에 의하면 대구지방의 경우 숙종 16년(1690)부터 철종 9년(1858)까지 168년 동안 노비호가 37.1%에서 1.5%로 급격히 감소하였던 것으로 나타났다.427)四方博,<李朝人口に關する身分階級別的觀察>(≪朝鮮經濟の硏究≫3, 1938). 이러한 경향은 다른 지역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이와 같이 조선 후기에 노비인구가 격감하자 국가에서는 도망노비의 추쇄를 실시하였다. 전국적으로 노비추쇄사업을 실시한 것은 효종 6년(1655)의 일이었다. 그 당시 중앙 각사의 노비안에 올라 있는 노비는 19만여 명이나 되었으나 이 가운데 신공을 거둘 수 있는 노비는 겨우 27,000여 명에 불과한 실정이었다.428)≪孝宗實錄≫권 14, 효종 6년 정월 임자. 이에 국가에서는 도망·은루노비를 추쇄하여 북벌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군비확충을 위한 재원과 인적 자원을 확보하려 하였다. 이러한 목적에서 추쇄사업이 추진되었기 때문에 효종은 특별히 推刷都監을 설치하고 추쇄어사를 파견함과 동시에 각 지방수령들의 추쇄사업을 독려하는 등 실효를 거두기 위하여 여러 가지로 노력하였다.

 그러나 이 추쇄사업은 효종 8년 6월에 마무리되었는데, 결과적으로 별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推刷都監儀軌≫를 통하여 이 때의 추쇄실태를 살펴보면 元奴婢가 추쇄 전에 200,515명이었는데, 추쇄 후에는 92,759명으로 대폭 줄어들었으며, 원노비에서 탈이 생긴 노비를 뺀 實奴婢에 있어서는 추쇄 전에 69,306명이었으나, 추쇄 후에는 79,992명으로 10,686명이 증가하였다. 또 실노비에서 弱奴婢·舟師奴 등의 신공면제 대상자를 뺀 貢奴婢는 추쇄 전에 32,132명이었는데, 추쇄 후에는 37,976명으로 5,844명이 증가하였다. 전체적으로 볼 때 공노비의 증가분인 5,844명이 이번의 추쇄사업으로 새로이 추쇄한 노비라 할 수 있으나, 이것도 반드시 정확하다고는 할 수가 없다. 이는 추쇄 후에 작성된 노비안에는 추쇄 전에 작성된 노비안에 올라 있던 자들이 다수 중복되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때의 노비추쇄사업이 정부의 강력한 지원과 막대한 노력 및 시간을 들여 추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실패한 것은 이미 당시 노비의 존재양태가 종래와 같은 법제적인 조처만으로는 유지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게 변화되어 있었던 데에 기인하였다. 말하자면 조선 후기의 사회경제적 변화에 수반하여 나타난 노비신분층의 동요현상을 고식적인 법제적 장치로서는 이제 더 이상 지탱할 수 없을 만큼 그 변화의 폭이 넓었던 것이다. 추쇄는 원래 노비의 예속성이 강한 단계에서 유용한 파악 수단이었으나, 이동성이 강할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 독립하여 신분적으로만 예속되어 있는 상태에서는 적절히 기능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 아래 국가에서는 도망·은루노비의 추쇄만으로는 노비제의 유지가 힘들게 되자, 전술한 바와 같이 신공을 감액하여 주기도 하고 면천·속량의 길을 넓혀 주었을 뿐만 아니라 「奴良妻所生從母從良法」을 실시하였다. 이처럼 노비신분층에 대한 국가의 정책대응은 노비신분층의 사회경제적 존재양태의 변화를 추인해 주는 방향에서 실시되었다.

 공노비의 추쇄는 원래 중앙 각사에시 추쇄관을 파견하여 추쇄하도록 되어있었는데, 추쇄관의 작폐가 심해지자 그 대책으로 영조 4년(1728)부터는 寺奴婢의 추쇄에 한하여 임시로 추쇄관을 파견하는 대신 감사나 수령으로 하여금 추쇄하게 하였다가, 같은 왕 21년에 영남에 比摠法을 실시하고 이어서 같은 왕 41년에는 兩湖로 이를 확대시켜 실시함으로써 완전히 지방관에게 일임하였다. 또한 內奴婢의 추쇄에 있어서도 정조 2년(1778)에 비총법을 확대 실시함으로써 모든 공노비의 추쇄는 지방관의 책임하에 실시하는 방향으로 전환되었다.

 비총법은 도내의 노비수를 일정하게 고정시키고 각 고을의 노비출생자의 다과에 따라 노비의 수를 조정하되 도내 전체의 신공을 내야 할 노비수에는 변동이 없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이르러 도망 등으로 노비가 급격히 감소하고 있는데도 비총법체제에서는 노비수가 일정하게 고정되어 있어, 남아 있는 노비의 부담은 더욱 무거워질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러한 상황은 노비의 도망이나 은루를 더욱 심화시킬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추쇄관의 폐지와 비총법의 실시는 노비신분층에 대한 법제적인 구속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와 이들은 보다 용이하게 노비신분에서 빠져나갈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이제 노비제는 재검토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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