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5. 노비신분층의 동향과 변화
  • 2) 노비정책의 전환
  • (4) 「노양처소생종모종량법」의 실시

(4) 「노양처소생종모종량법」의 실시

 조선 후기에 들어와 양역을 담당할 인구가 부족하게 되자, 국가에서는 노비의 신분적 규제를 완화하여 이들의 일부를 제도적으로 양인화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 법제화하였는데, 이것이 「奴良妻所生從母從良法」이다. 원래 노비의 신분 결정은 종모법이어서 어머니의 신분을 따르도록 되어 있었으나, 노비와 양인이 혼인한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一賤則賤’의 규정이 적용되어 노와 비 사이의 소생은 물론이고 노비와 양인과의 소생도 무조건 노비신분이 되도록 되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양처소생종모종량법은 이들 중 노와 양녀가 혼인하여 낳은 소생을 어머니의 신분을 따라 양인신분으로 하여 이들에게 양역을 지울 목적으로 실시된 것이었다.

 노양처소생종모종량법은 栗谷 李珥가 선조 때에 처음 그 실시를 주장하였으나, 그 때는 실시되지 못하였다. 그 후 현종 10년(1669)에 宋時烈이 이 법의 실시를 강력히 주장하여 처음 실시되었다. 그러나 이 법은 이후 집권세력 사이의 정치적 입장으로 서인(노론)의 집권기간에는 실시되었으나, 남인의 집권기간에는 폐지되는 악순환을 거듭하다가 영조 7년에야 영구히 하나의 법령으로 제도화되었다.≪속대전≫에 보이는 바와 같이 그것은 현종 10년에 처음 실시되었다가, 숙종 원년(1675)에 還賤으로 결정되었으며, 같은 왕 7년에 다시 종량으로 결정되었다가, 15년에 다시 환천으로 환원되었고, 영조 7년에 이르러 종량의 규정이 고정되었던 것이다.

 이 법의 실시와 폐지과정에 나타난 논의를 보면 서인(노론)은 국가재정 내지는 良丁의 확보라고 하는 현실적인 면에서 이 법의 실시를 강력히 주장하였고, 남인은 ‘奴主之分’이라고 하는 유교적인 명분론을 중시하여 이 법의 실시를 반대하였다.

 서인(노론)이 이 법의 실시를 강력히 추진한 것은 이들이 제도개혁을 통하여 현실사회의 모순을 시정해 보려는 실천면을 중시하는 정치사상을 가졌던 율곡 이이의 학풍을 계승하였기 때문이며, 반면 남인은 명분과 이념 등 정신면을 중히 여기는 退溪 李滉의 학풍을 계승하였으므로 명분론을 내세워 이 법의 실시를 반대하였다.

 사회경제적 처지에 있어서도 서인은 畿湖地方에 근거를 가진 대토지소유자들이어서 노비노동력을 동원하기보다는 부재지주로서 전호에 의한 소작경영이나 고용노동력의 동원으로 토지를 경영하고 있는 자들이 많았으며, 반면에 남인은 영남지방과 경기 일부에 토착적 기반을 가진 비교적 중소지주적 기반을 가진 자들이 많아 아직까지도 토지경영을 노비노동력에 의존하고 있었던 자들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정치집단 사이의 정치적 계보상, 학통상, 사회경제적 차이에 더하여 서인은 국가정치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국가의 입장에서 이 법의 실시를 끈질기게 추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영조 이후 서인의 일파인, 특히 송시열을 계승한 노론의 영구집권이 가능하게 되면서부터는 이 법도 그대로 존속될 수 있었다.

 노양처소생종모종량법의 실시로 양인과 노비가 결혼하여 낳은 소생이 양인으로 되어 양역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노와 양녀 사이에 낳은 소생을 어머니의 신분을 따라 양인신분으로 인정한 본래의 의도가 양역인구의 확보라는 국가재정적인 고려에서였기 때문에, 국가의 필요에 따라서는 이 법이 특수한 직역에 입속할 인구의 부족을 타개하는 수단으로 변칙적으로 운용되기도 하였다. 土卒과 驛奴의 경우가 그러하였다.

 토졸은 함경도 茂山 이북의 각 鎭堡에 입역하고 있었는데, 부족한 토졸을 보충하기 위하여 토졸과 공사천 사이의 소생 중 여자는 어머니의 역을 따르도록 했으나, 남자는 아버지의 역을 따르게 하여 노비안에서 뺀 뒤 토졸로 입역하게 하였다.429)≪備邊司謄錄≫118책, 영조 22년 8월 3일.
≪承政院日記≫1,629책, 정조 11년 7월 4일.
이 경우에는 종부법이 적용되었으며, 이들의 신분은 양인으로 신분상승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역노 소생의 신분귀속에 대하여≪속대전≫에서는 “驛奴가 공사천에 장가들어 낳은 소생은 남자는 아버지의 역을 따르고 여자는 어머니의 역을 따르며, 양처와의 사이에 낳은 소생은 驛役을 자원하는 경우에는 從良의 예에 따라 驛吏로 승격시켜 역에 입속시킨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정조 때에는 이들 소생 중에 역역을 자원하는 자들이 거의 없자 역노양처소생을 이들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모두 역역에 입속시키고 역리로의 승진만을 인정하도록 하였다.430)≪承政院日記≫1,687책, 정조 15년 4월 30일.

 이와 같이 노양처소생종모종량법이 본래 양역인구의 부족을 타개하기 위한 목적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반드시 양역이 아니라도 특수직역에 입속할 인구가 부족되는 사태에 직면하여서는 그 직역에 입속할 인구의 확보를 위하여 이 법의 규정이 변형되어 적용되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그들의 신분은 양인으로 간주되었다.

 노비의 신분귀속에 있어서 노인 아버지의 신분에 따라 노비로 된 자들이 노양처소생종모종량법이 실시된 지 50여 년이 지난 정조년간에 작성된 호구자료에도 기재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법이 실제 지방양반들 사이에 제대로 지켜지기까지는 어느 정도의 시일이 필요했던 것 같다. 그렇다고 하여도 영조 이후 노와 양녀와의 결혼이 더욱 성행했던 것은 역시 노비들이 이 법으로 그 소생을 간단히 면천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 법의 실시는 조선사회의 엄격한 신분제도를 크게 변질시켜 노비와 양인과의 간격이 그리 명확하지 않을 정도로 변화되어 신분질서의 해이를 초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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