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1. 친족과 촌락구조의 변화
  • 2) 동족마을의 발달과 촌락조직의 변화
  • (2) 촌락조직의 성격변화

(2) 촌락조직의 성격변화

 동족마을의 발달과 함께 조선 후기 촌락의 변화모습은 촌락민조직의 성격변화와 촌락의 분화과정을 통해서도 확인이 가능하다. 조선 후기의 촌락변화는 인구의 증가나 생산력의 발전, 그리고 이와 더불어 진행된 농지의 확대문제가 매우 중요한 배경이었다고 보여진다.489)李海濬,<朝鮮後期 村落構造 變化의 背景>(≪韓國文化≫14, 서울大 韓國文化硏究所, 1993). 그런데 이러한 사회경제적인 변화와 함께 촌락 자체의 성장기반으로서 촌락민조직에 대하여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 전기 사족 중심의 지배질서가 확립되면서 생활공동체적 기반을 가졌던 대부분의 촌락조직들은 지주제적 강제와 향약질서의 강요로 그 기반이 사족들의 통제구조하에 귀속되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향약의 실시 논의와 함께 그 하부단위로의 활용이 거론되는 「鄕村結契」류의 촌락민조직들은 고려말 이래의 자연촌적인 香徒와 계통을 같이하는 것들이었다. 대체로 이들 조선 전기의 향도 조직들은 조직범위가 말단 자연촌락을 단위로 하고 있고, 구성원도 7∼9인에서 100인 혹은 40∼50호 정도의 常賤民으로 하였다. 또한 이들이 주체가 되어 행하는 행사들도 공동노역이나 마을의 잡역, 그리고 무속적 전통이 가미된 마을제사(淫祀;堂祭·洞祭), 관혼상제의 공유와 그 부조가 주된 것이었다. 그리고 몇몇의 사례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정례화, 혹은 정기적인 행사의 모습도 지녔다.490)李海濬,<朝鮮時代 香徒와 村契類 村落組織>(≪역사민속학≫창간호, 1991).

 이들 鄕徒·淫祀·洞隣契 등 香徒類(村契類)의 지층촌락민조직들은 대개 사족들의 동계(동약)조직의 하부단위로 편제되어 갔던 조직인데, 이처럼 기층민들의 촌락조직을 상하합계의 형태로 포섭하려던 16∼17세기 사족들의 동계조직은 본질적으로 사족 중심의 향촌재편을 목적으로 하면서, 수령권의 촌락(혹은 사족지배력)에 대한 통제를 방어하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들 16∼17세기 상하합계 조직은 본질적으로 상하민간의 목적과 이해가 다른 상태에서 상위조직인 上契에 의해 주도되게 마련이었고, 이미 기본적인 한계를 드러낸 사족들의 기존의 특권과 영향력을 강요하는 형태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사족들의 편입요구에 대한 촌락조직들의 반발양상도 부분적으로 확인된다.491)李海濬,<朝鮮後期 洞契·泂約과 村落共同體組織의 性格>(≪조선후기 항약연구≫,民音社, 1990). 16∼18세기의 洞契(洞約)구조 속에서 확인되는 촌락조직들, 예컨대 영암 鳩林의 四山香徒(1565년)나 안동 河回의 小契(1584년·1618년), 태인 古縣里의 各契(1666년), 영암 花樹亭의 村契(17세기 후반), 의령의 香徒(1692년), 영천 望亭의 私契(1735년), 영암 永保亭의 各村契(1772년) 등은 洞契類 조직의 하부에 엄연히 존재하던 기층민들의 촌락조직 모습을 보여주는 예이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의 측면에서 당시 일정한 수준의 자체 성장과정을 겪고 있던 촌락기층민들은 상하합계의 동계운영에서 자신들이 참여하는 폭을 훨씬 확대하였을 가능성을 엿볼 수 있고, 그러한 경험의 축적을 통해 계층적 자기인식의 분위기도 성숙되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즉 촌락기층민들은 그들대로 제한인 당시의 사회구조 속에서나마 현실에 대한 인식과 대응의 방향을 일정하게 모색하고 있었으니, 두레발생과 농업기술상의 변화와 연결에 대한 논의는 그런 관점에서 시사하는 따가 크다.492)李泰鎭,<17,18世紀 香徒組織의 分化와 두레 發生>(≪震檀學報≫67, 1989). 이앙법은 이전의 직파법에 비해 노동력을 5분의 4 정도로 감소시킬 뿐만 아니라 광작도 가능하게 하였다. 이는 생산량의 증가를 가져옴은 물론, 경제적·시간적 여유는 공동노동조직의 운영기반을 충실하게 할 수 있었다. 여기에 더하여 두레조직은 기본적으로 지주층의 참여와 간섭을 배제하여 자작·소작농민을 성원으로 했던 까닭에 신분제적 강제나 지배층의 모순강요, 법외의 침탈이 가중되었을 경우 이를 벗어나려는 공동적 대응과 자체 결속을 모색할 수 있었을 것은 자명하다. 여기에 생산력과 연관된 경제기반이 확보되었을 때 그 기능은 더욱 강화되었을 것이고, 이들이 명실상부하게 기층촌락민의 입장을 대표하는 조직으로 부상하였을 가능성은 쉽게 추측된다. 18세기 중엽 이후 상하합계형태의 동계조직에서 下契가 없어지는 현상도 두레조직의 위상강화나 반발과도 어느 정도 연관된 것이었다.

 한편 여러 곳의 자연촌을 아우르는 사족들이 동계조직은 기층촌락민들의 조직(「촌계류」)과 비교할 때 조직의 목적과 성격이 전혀 다른 것이었다. 동계조직의 하부단위로서 존재했던 촌계조직들은 기층민의 조직으로 그들의 생활문화적인 기반 위에서 자연마을 단위로 존속되어 온 것으로, 현재까지도 전승되는 동제·당제(당산제)류가 바로 촌계류 촌락조직의 잔영이다. 물론 현존양상으로만 보면 일부 유교식의 축문이나 제의가 부가되기는 하였지만, 이는 촌계류조직이 복잡하게 경험했던 지배조직과의 접합과정을 보여주는 흔적일 것이다.493)이에 대하여 金龍德은 약간 다른 의미로 洞契와·村契를 해석하고 있다(金龍德,<洞契考>,≪斗溪李丙燾博士九旬紀念 韓國史學論叢≫, 1987 및 (朝鮮後期의 地方自治-鄕廳과 村契->,≪國史館論叢≫3, 國史編纂委員會, 1989). 그리고 실제 촌락의 운영이나 구성상 촌계류조직이 본래 담당한 영역은 동제로 대표되는 마을의 민속적 제의와 공동노역(잡역;울역)이나 동린적인 상장부조였다. 노동조직으로서의 두레조직도 16∼17세기에는 이들 촌계류조직과 긴밀한 관계 속에서 혹은 그 예하의 청장년조직으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동계조직과 촌계조직의 일정한 역할분담은 18세기 이후 사족지배력의 이완현상과 함께 진전되는 촌락의 발전, 특히 분화의 과정에서 변모되어갔다. 촌락들이 자연촌단위로 분화되는 상황에서 사족들의 동계조직은 관념적 형태로 남거나 형해화되어, 그 영향력의 범위가 이른바 本洞(本里) 혹은 사족들만의 상호부조적 역할로 한정되었다. 자연촌단위에서는 촌계류 조직들이 오히려 실제적인 촌락운영을 담당했다고 보여진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동제(당제)도 큰 당이나 작은 당으로 분화, 혹은 아예 다른 당산을 새로 마련하여 독립하고,494)李揆大,<19세기 洞契와 泂役>(≪조선후기 향약연구≫, 民音社, 1990). 노동조직으로서의 두레도 마찬가지로 자연촌의 구조에 맞게 재편되었다.495)두레조직의 성격을 이해할 때 그것이 철저하게 마을단위로 조직되고 있었음은 수많은 사례로써 검증이 되며(주강현,<두레 共同勞動의 史的 檢討와 生産文化>≪노동과 굿≫, 학민사, 1989), 두레의 분화과정은 형제두레나 두레기·세배드리기 같은 잔존민속으로서도 충분히 확인된다. 상장부조의 기능면에서도 이러한 촌락분화와 관련된 사실은 추적이 가능하다. 예컨대 洞物(상여·혼례도구)이나 동답의 분리운영, 서당의 분립 같은 변화가 그러한 상황을 말해 준다.

 결국 촌락의 분화과정을 겪으면서 마을의 운영과 조직체계도 과거 「동계-촌계」간의 연결구조보다는 「촌계-동회·동제조직」, 「두레-생산조직」, 기타 「상장부조조직들(목적계류)」간의 연결과 상대적 역할분담이 오히려 문제된 상태로 변해 갔을 것이다. 특히 19세기 이후 민중의식의 성장과 사회모순의 증대는 노동조직으로서 계층적 이해를 반영하는 두레조직의 역할과 주도력을 보다 강화시켜, 촌계류조직이 지녔던 기존의 영향력을 대부분 확보할 수 있었다.

 촌락의 분화를 촉진시킨 또 다른 외적 배경으로 정부의 향촌통제방식의 변화가 일으키는 촌락의 변화상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사족지배체제가 한계에 직면하면서 중앙정부가 추진했던 面里制나 공동납체제 같은 통치방식의 변화가 바로 그것이다. 이 역시 촌락의 구성 및 운영체계를 전면적으로 급전시키는 요인이었던 것이다. 재지사족들에 의한 향권의 확보라는 측면에서 16세기 사족의 향촌지배는 일단 자율성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16세기 이래 사족들은 향촌사치에서의 부세운영과 향임층에 대한 인사권을 쥐고 향규·향약 등의 향촌규약을 만들어 향리와 일반민들을 그들의 지배하에 붙잡아 둘 수 있었다. 이처럼 향촌사회에서 사족들이 향권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은 「鄕會」로 대표되는 그들 중심의 합의체적 향촌권력기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향회를 통해 향임을 선출·통제하였고 「향규」를 만들어 吏胥와 하층민들을 통제하였고, 위로는 관권과 일정하게 타협하면서 자신들의 특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18세기의 조선사회에서 그같은 기본적인 구조는 변질되고 있었다. 즉 사족들이 물적 토대가 취약해지고 새로운 계층이 경제력을 바탕으로 성장하여 사족들과 경쟁적 위치에 서게 되자, 중앙정부 및 그 대행자로서의 수령은 이른바 新鄕세력을 끌어들여 궁극적으로는 사족지배권을 약화시키면서 관주도적 통제를 강화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기존의 사족들에 의한 향회의 권위는 사라지고 심한 경우는 수령의 부세자문기구로 전락하는 현상까지 생겨났다. 국가의 향촌통제와 부세정책이 변화되면서 대지주, 혹은 중소지주 등으로 분기를 이룬 재지사족들로서는 과거와 같은 공동이해(「鄕中公論」의 형성)와 一鄕의 지배를 관철하기 어려웠다. 이에 재지사족들은 과거와 같은 향안·향규·향악 등을 통한 1향의 지배보다는 혈연적인 족계나 동계(洞約), 혹은 촌락기반을 매개로 하는 하층민과의 유대 속에 자기방어를 모색하고자 하는 상하합계 형태의 동계를 발전시키게 되었다.496)朴京夏,<倭亂直後의 鄕約에 대한 硏究>(≪中央史論≫5, 中央大, 1987). 상하합계는 양란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화와 함께 사족지배제제가 동요함에 따라 대응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이것은 사족층이 촌락사회내에서의 상하민질서를 재확립하려는 의도를 표출한 것인 동시에, 한편으로 보면 하층민을 기반으로 하는 그들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도전받고 있음을 드러낸 것이다. 이 시기 재지사족들의 향권에 대한 집요함이 사라지고 향안질서가 형해화되는 것, 그리고 친족결속력 강화를 배경으로 확대되는 문중활동, 그 문중 권위의 상징으로 문중서원·사우가 남설되는 현상은 이같은 향촌사회구조, 사족지배구조의 변모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중앙정부에 의해 추진되는 일련의 촌락 직접통제방식은 사족들의 간여를 배제한 채 서서히 진행되어 갔다. 이 과정에서 사족들이 중심이 된 동계·동약조직들은 부세단위로 전락하는 이른바 공동납체제로 전환되었다.497)金仁杰,<朝鮮後期 鄕村社會 統制策의 危機>(≪震壇學報≫58, 1984).
―――,<朝鮮後期村落組織의 變貌와 1862年 農民抗爭의 組織基盤>(≪震檀學報≫67, 1989).
조선 후기 부세체계의 두드러진 특징은 부세가 토지를 중심으로 일원화되는 추이와 총액제(공동납제)를 채택하고 있었다는 점, 그리고 그 최말단의 부세단위로서 촌락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점이다. 17세기 이후 부분적인 시행을 거쳐 18세기에 이르러 전국적인 실시가 이루어진 大同法과 18세기 중엽의 均役法, 그리고 田稅에서의 比摠制와 軍役에서의 郡摠制(里定制), 還穀에서의 里還制 등은 그 구체적인 내용이었다.498)金仁杰,<朝鮮後期 鄕村社會 機力構造 變動에 대한 試論>(≪韓國史論≫19, 서울大 國史學科, 1988).
―――,<民狀을 통해 본 19世紀 前半 鄕村社會問題>(≪韓國史論≫23, 서울大 國史學科, 1990).
高錫珪,<19世紀 前半 鄕村社會 支配構造의 性格>(≪外大史學≫2, 1989).
이러한 공동납의 강화는 종래 유지되어 왔던 사회체제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음에도 변화된 현실을 충실히 포용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향촌사회 내부세력간의 갈등심화와 부세의 단위가 되는 촌락질서 자체를 크게 변화시켰다. 이정법도 공동납의 한 방식으로 국가의 양역을 촌락에 부여한 것이다. 이러한 제도가 성립하게 된 이면에는 이정법이 동원되어야 했던 현실적 배경이 있었고, 촌락의 구성면에서 이를 수용할 만한 촌락발전이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499)金俊亨,<18世紀 里定法의 展開>(≪震檀學報≫58, 1984).

 사족지배질서의 해체현상과 촌락통제방식의 개편은 이미 자체적인 변화를 겪고 있던 촌락들을 더욱 빠른 속도로 변화시켰던 것이다. 조선 후기 촌락사회의 분화현상은 바로 이러한 내외적인 변화를 배경으로 이루어졌다. 조선 후기에 일반화되는 分洞·分村의 문제는 당시 수령들이 직면한 주요 업무로 부각되어 牧民書에서도 분동의 처리문제가 하나의 항목으로 나타날 정도였다.500)≪七事問答≫, 文狀 28條. 촌락의 분화는 외적으로는 촌락의 수적 증가를 말하여 주는 것이지만, 내적으로 보면 각각의 촌락들이 지녔던 공동체적 기반과 촌락주도 세력의 변모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501)鄭震英,<18·19세기 士族의 村落支配와 그 해체과정>(≪조선후기 향약연구≫, 民音社, 1990).
李揆大, 앞의 글.
지명에서 上○○·下○○·內○○·外○○·元○○·舊○○·新○○·本○○ 등으로 지명 앞에 그 관계가 붙여진 경우는 예외 없이 촌락분화의 흔적이라고 보아도 좋다. 이러한 촌락의 분화와 분동의 과정을 앞의 촌락변화 요인들과 관련시켜 살펴보면, ① 산곡이나 계곡의 마을들이 저지대 평지의 농지를 넓히면서 경작인들의 마을이 생겨나는 경우, ② 동족기반을 가진 마을에서 분가나 농지가 있는 인근지역으로 이주과정을 거쳐 신생되는 경우, ③ 그리고 賦稅(洞役)문제나 마을주도권을 둘러싼 갈등으로 분동하는 경우 등, 매우 다양한 모습이었다고 생각된다.

<李海濬>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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